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62화 (62/155)

62화.

아라티네 황후.

그녀는 마테오 황태자의 생모이자 선황 이도엘의 아내였고 지금은 그 동생이자 배신자인 클로드황제의 아내였다.

이 저택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이름을 꺼낸 걸 질책해야 할지, 아닐 거라고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총관은 망설였다. 모린 부인은 괴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몸도 마음도 약한 분이었잖아요. 혹시 새 비전하께서도……"

“그렇지는 않을 거야, 유모.”

뒤에서 들려온 단정한 소년의 목소리에 모린 부인의 어깨가 화들짝 흔들렸다.

“세상에, 전하!”

마테오 황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린 부인이 그녀의 아기를 향해 후다닥 다가왔다.

“세상에나, 이 사람이 정신이 없어 전하께서 오신다는 것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고생이 많으셨지요?”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고 편지에 적었는데.”

“이 뺨 마르신 것 좀 봐.”

“저울은 거짓말을 안 해, 유모.

오히려 살이 좀 붙었어.”

눈이 글썽글썽해진 모린 부인에게 논리적인 설명 같은 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인이 덥석태자를 껴안았다.

어른스러운 소년은 다소 닭살스러운 포옹을 감내하며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총관이 구명줄을 내밀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전하. 곤하실 텐데 방으로 뫼실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어쨌든 유모.”

“네, 네.”

모린 부인이 눈가를 닦으며 서둘러 떨어졌다. 소년이 위로하듯 그녀를 토닥였다.

“새 비전하는 결코 아라티네 황후 폐하 같은 분이 아니야.”

모린 부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들으셨구나.

“전하, 이 모린이 나이가 들어 그만 실언을…….”

“질책하려는 게 아니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소년이 턱을 매만지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고 중얼거렸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아라티네 폐하보다는 선황 폐하를 닮았다고나 할까.”

“네?”

모린 부인과 총관은 도저히 짐작이 안 되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가 빙긋 웃으며 아리송한 말투로 덧붙였다.

“아무튼 보면 알 거야. 한 가지 장담하는데, 기대해도 좋을걸.”

* * *

릴리엔은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들어요?”

“음…"

릴리엔이 가늘게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미언이 보였다.

릴리엔은 손을 뻗었다. 다미언이 별말 없이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약한 현기증이 들었지만 릴리엔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아팠던 환자답게 주변 사람부터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좀 피곤했을 뿐이라서…….”

“코에서 피가 흐르는데요."

“앗.”

화급히 틀어막아 보았지만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금세 손바닥을 적셨다. 그나마 다미언이 재빠르게 손수건을 받쳐 준 덕에 옷을 망치는 사태는 면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릴리엔은 머리가 짓눌리고 코를 틀어막은 우스운 꼴로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좀 많이 피곤했나 봐요.”

다행히 피는 금방 멎었다. 손수 건을 받으며 다미언이 어깨를 쓱했다.

“주치의가 들었다면 '의사도 아닌데 마음대로 진단하지 마시라’고 했을 것 같군요."

다미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매끄러웠다. 얼굴에 웃음기가 좀 덜한 것만 빼면 릴리 엔이 정신을 잃기 전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잠깐, 전혀 차이가 없다고?

“전하,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나요?”

"......."

다미언이 대답 대신 난감하게 웃었다. 리타가 대신 대답했다.

“하룻밤 꼬박 잠들어 계셨습니다.”

“혹시 여기서 밤을 새우셨나요?”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그대로인 옷차림을 지적하자 다미언이 시계를 꺼내 보는 척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워낙 늦은 밤에 도착해서 지금은 이른 아침이고…….”

“전하.”

릴리에의 말투에 화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되는대로 주워섬기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뚝 그쳤다.

“가서 쉬세요. 옷도 갈아입으시고요.”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 * *

그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던 다 미언이었지만 “전하 앞에서는 편히 쉬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릴리에 앞에서는 더 버티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 점을 미처 생각 못했군요.”

그러고 뒤돌아서서 나가는데 표정이 서늘하고 묘하게 어깨 끝이 처져 보이는 게…….

'아무래도 상처받으신 것 같은데.’

릴리엔은 모르는 눈치였다. 굳이 설명해 줄 의리도 없어서 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곧바로 릴리에이 다시 코피를 터트린 탓에 정신이 없기도 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코피가 나는 걸 빼면 딱히 내가 느끼는 컨디션에 차이는 없단다.”

“평소랑 똑같이 안 좋다는 뜻이 신 거군요.”

“예리하기도 하지.”

릴리에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리타가 코를 꽉 눌렀던 손을 치웠다. 다행히 이번에는 확실히 지혈이 됐는지 피가 더 흐르지 않았다.

“물수건을.”

“예.”

눈치 빠른 하녀가 찻물로 쓰려고 데운 물로 수건을 따뜻하게 적셔 내밀었다. 릴리엔은 수건을 직접 받아 얼굴을 닦았다.

“근래 무리하셨습니다.”

“내 몸 상태에 이 정도로 끝났으니 생각보다 양호한 거 아닐까?”

“굉장히 긍정적이시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타는 공감했다. 적어도 결혼식장에서 쓰러지지는 않았으니까.

“어쨌든 단순한 코피니까 요란 떨지 않는 게 좋겠구나. 어제 쓰러져서 들어온 새 신부가 이 모양이면 다들 놀라지 않겠니. 잘 처리하렴.”

“아, 예, 예!”

시녀를 통하지 않고 릴리엔에게 직접 지목받은 하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드러운 말씨와 눈빛이 온전히 저를 향하니 이상하게 정신이 차려지질 않았다. 하녀는 간신히 떨리는 손으로 물수건을 받았다.

리타는 혀를 찼다. 상대를 무론하고 사람 홀리는 저 버릇 좀 어떻게 자제시킬 수 없나?

“그래도 진찰은 받으셔야 합니다. 기다리다 못한 성질 급한 윈스턴 씨가 쳐들어오는 상황을 바라시지 않는다면 더더욱이요.”

“음.”

일리가 있었다.

잠시 후 예의 사각 가방을 멘기골 장대한 의사가 나타났다.

“갑자기 코피를 쏟으셨다고요.”

“민망하네요.”

“원체 허약하신데 무리를 하셔서 몸이 놀랐을 겁니다. 일단 좀 보죠.”

릴리엔은 얌전히 쇼가 자신을 진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릴리 엔의 맥을 잡고 코어와 마력, 생명력의 상태를 점검하던 쇼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코어가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다른 불편하신 점은 없습니까?”

“아직까지는?”

쇼가 심상찮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릴리엔은 손목을 되돌리고 옷을 정리하며 가볍게 물었다.

“상태가 안 좋나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진행이 빨라졌습니다.”

쇼는 비보를 전하는 재주가 없었다. 다행히 릴리엔이 무던하고 강인한 편이었다.

“일단 그동안 무리하신 게 있어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며칠 쉬시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중에 다시 회복세를 보이실 수도 있으니까요.”

릴리엔은 열아홉 살이었다. 소녀보다는 아가씨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봄철에 돋아나는 새싹 같던 성장세도 둔화를 보인 지 이미 오래였다.

생애 주기 상 가장 생명력 넘치는 시기인 성장기가 끝났으니 감소세를 보이는 건 사실 예견된 사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현상 유지의 시기는 끝났어.'

다만 예상보다는 그 시기가 좀 빨리 찾아왔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해결책은 평소와 같습니다.”

“잘 먹고, 잘 자는 거요?”

“예, 이제까지도 잘 지켜 주셨지만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쇼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릴리엔이 물었다.

“오늘 출발하시나요?”

“그럴 예정입니다.”

모린 부인의 추측과는 다르게, 쇼는 릴리엔을 따라 아예 옮겨온게 아니었다. 여정 중에 돌발 사태가 일어날 걸 대비해 따라왔을 뿐이었다.

“오라버니께서도 곧 황도에 오실 텐데. 그때까지 머무르셔도 괜찮아요.”

“주치의 잔소리를 계속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쇼가 픽 웃었다. 세드릭만큼 애끓는 마음은 아니더라도 7년을 봐 온 만큼 그도 이 아가씨를 조카만큼은 아끼게 되었다.

“먼 길을 오가게 해서 죄송해요. 살펴 가세요.”

“너무 좋아하시면 안 됩니다.

금방 다시 뵙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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