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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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치 약에 대한 복약 지도를 마치자마자 쇼는 떠났다. 왔던 것처럼 떠나는 것도 훌쩍 빨랐다.
릴리엔은 저녁나절까지 조금만 쉬다 하녀장을 만나 볼 생각이었는데 그보다 다미언이 다시 얼굴을 내미는 게 빨랐다.
“지금 바쁘신가요?”
“전하.”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옷도 갈아입었고 나름대로 휴식도 취하다 온 거예요.”
다미언이 진지한 척 고했다. 릴리엔의 입가에도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성공을 확신한 다미언이 눈꼬리를 내리고 부러 불쌍하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전하."
희희낙락해서 들어오는 다미언뒤를 따라 아이반이 들어왔다.
얼결에 날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수하야 그러거나 말거나. 성큼 다가온 다미언이 당연하다는 듯이 릴리에이 앉은 긴 소파 옆자리를 냉큼 차지하고 앉아서 릴리 엔의 손을 끌어 당겼다.
“전하.”
말릴 새도 없이 손가락이 얽혔다.
“낮 동안 잘 계셨지요? 식사도 잘 하셨고요?”
“낮 동안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반나절짜리 안부까지 묻다니.
누가 봐도 새신랑이 신부에게 넋이 나간 꼴이었다. 사실 첫날밤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은 사이인데도.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철저하게 사랑 넘치는 부부 관계를 연기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야. 여기는 수도고 어떤 식으로 소문이 샐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장단을 맞추긴 해야 할 것이다. 릴리엔은 조금 부끄럽지만 잡힌 손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다미언이 아이반을 향해 손짓했다.
사실 아이반은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다미언으로부터 “내 명령이 있기 전에는 비에게 한마디도 걸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참이었다.
비합리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명령에 아이반은 당연히 반발했다.
"아니, 비전하께 말 한마디도 못 걸면 인사는 어떻게 드리라고요? 비전하께서 저를 웬 놈의 후 레자식인가 하고 오해하시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라. 내가 시키기 전까지 너는 그 방에서 없는 사람인 거다.”
“내 참……."
아이반은 내심 별 염병을 다 떤다고 생각했지만 계급이 깡패인 죄로 참았다.
“아이반 아이작이 비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경."
“오늘 뵙고자 한 건 비전하의 승인이 시급한 사안의 정리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사안이라면……"
뒤에 보니 산더미 같은 서류를 다 들지 못해 작은 손수레가 동원되어 있었다.
“저게…… 다?”
“예, 일단 지금 가장 먼저 보시게 될 서류들은 일전에 작성하신 혼전 계약서에 따라 전하께 양도 될 재산에 관한 것들입니다. 대부분 보시고 승인만 해 주시면 되는 간단한 것들입니다.”
'간단한'이라는 수식어가 무식하게 서류 한 더미가 테이블 위에 턱 놓였다.
“음…….”
저 서류 한 더미의 값어치를 헤아리면 과연 얼마나 될지 조금 두려웠다.
'다 모으면 조그마한 백작령 하나 정도는 돈으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도 인정했지만 릴리엔은 돈이 많았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영지와 통치권은 장자이자 후계자인 세드릭에게 상속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아래 묶여 있던 외가 쪽의 상속분과 아버지가 따로 안배해 둔 지참금 명목의 재산이 꽤 됐다.
거기에 시집올 때 세드릭이 떼어준 것들도 이것저것 많았다.
"너도 이제 루펜바인 황가에 편입되었으니 이것저것 돈 쓸 일이 많을 거다. 돈을 써야 할 때 제대로 쓰지 못하면 우스운 취급을 당하는 법이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비상금 정도는 톡톡히 챙겨 주마.”
…라고 말하면서 떼어 준 게 저 어디 소금섬의 조세권이었다.
천혜의 관광지이기도 한 이 섬은 세드릭이 가진 개인 재산 중에서도 상당히 알짜배기에 속했다. 자세한 규모는 몰라도 절대 비상금으로 받을 스케일은 아니었다.
릴리엔이 정색을 하고 나무라도 소용없었다. 빈손으로 보내지도 않으면서 “너를 어떻게 빈손으로 보내느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통에 릴리엔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항복선언을 얻어 낸 세드릭은 “아무도 모르게 잘 숨겨 놓고 유용하게 써라.” 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으실까.'
다시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현재 릴리엔의 개인 재정 상황은 일국의 황녀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지금도 부자인데 저 서류 정리가 끝나고 나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부자가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다다익선이라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일단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부터 시작하죠.”
아이반이 가장 위에 놓여 있던 황금 쌍두 독수리 인장이 새겨진 새하얗고 납작한 상자를 내밀었다. 릴리엔은 상자 위에 새겨진 인장이 현 황실의 인장이 아니라 선대, 즉 이도에 황제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다미언이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비께서도 아시다시피 선황께서 제게 하사하신 것 중에 가장 사람들의 반대를 많이 받았던 게 있습니다.”
“그건…….”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칭호입니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전통적으로 임페라토르는 황제 혹은 군의 사령관을 일컫는다.
후자의 의미보다는 보통 전자의
“황제”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빈축을 산 건 그 말의 사전적인 뜻보다도 칭호에 부여된 부가적인 특권이었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호칭에 따라 저는 제국군의 명예로운 대원수로서 황실로부터 항구적인 면책 특권을 하사받았습니다.”
“그 말인즉슨…….”
“간단하게 말하자면 반란을 일으켜도 사형되지 않는다더군요."
“예?”
면책 범위가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를 포함해서 제 직계 비속과 비속의 비속, 즉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상속되는 권한입니다.”
그래서 이도엘이 칭호를 내릴 때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기는 격.” 이라며 항거했다.
공정하고 자애로운 황제는 전에 없이 완고하게 그 모든 반대를 꺾고 기어이 그 명예롭고 절대적인 칭호를 동생에게 부여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이…
저에 한해서 부인에게도 같은 칭호가 붙습니다.”
“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아이반이 나섰다.
“선황께서 부여하신 준칙에 따라 다미언 전하와 정식으로 혼인하신 분께는 '임페라트릭스'의 칭호가 부여됩니다.”
보통 황실의 여인들은 '임페리 얼 레이디'로서 각자의 위치와 서열을 부여받는다.
전례대로라면 릴리에도 '임페리 얼 레이디'가 되어 합당한 서열을 배정받아야 했지만…….
“비전하께서 ‘임페라트릭스'가 되시면 자연적으로 황후 폐하와 동격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예, 전하께서도 황제 폐하와 동격이십니다. 범위가 좀 한정적 이시긴 합니다만."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나마 제국 황제와 동격인 남자의 반응은 심플했다.
“그래서 클로드가 황제가 되어 궁을 장악했을 때도 마테오를 빼올 수 있었죠.”
“하지만 전례와 상황을 고려하여 실제적으로는 황제 내외분에 비해 반격 정도 아래에 위치하게 되십니다.”
반격 아래라고 해도 너무 엄청났다. 애써 이해해 보려는 릴리 엔에게 다미언이 설명했다.
“쉽게 생각해서 황태자와 황제 그 사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아."
릴리엔은 납득했다. 즉, 황제와 황후를 제외하고는 궁내에서 그녀가 의전 서열 두 번째라는 뜻으로 두 지존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무도회장에 입장하실 때 시간이 좀 걸리실 겁니다. 그동안은 전하의 당도를 고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거든요.”
회장에 입장할 때는 입구에 서 있는 시종에게 초대장을 주고, 초대장을 받은 시종은 “어디어디의 누구누구께서 드십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다미언은 그들의 악몽 속에서나 나올 법한 긴 공식 칭호를 보유하고 있었다.
“알만하군요.”
“예부에서 검토를 할 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살펴보시고 승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릴리엔은 가만히 서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부터 심장이 의식 될 정도로 쿵, 쿵 하고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릴리엔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다미언이 덧붙였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칭호는 실질적인 특권보다 저와 제 안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선황 폐하께서 하사하신 최소한의 보호막입니다.”
“보호막이라면…….”
“글쎄요. 선황께서는 상황이 이렇게 되리란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셨던 게 아닐까요.”
둘째 동생이 반역을 일으키고 막냇동생이 유일한 후계자를 보호하는 작금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하튼 그 말에 릴리엔은 좀 더 부담스러워졌다.
릴리엔과 다미언이 한 건 말이 좋아 결혼이지, 사실상 결혼 계약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