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릴리엔은 그동안 이 계약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
어차피 하게 될 결혼이다. 실패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 실수를 줄이고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안주인이 되어 현명하게 가솔을 이끌고 정확하게 안살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거든 안정적.
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잘 양육할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기보다 처음 입사하는 신입 사원과도 같은 각오였다.
하지만 막상 임해 보니 이 결혼계약은 계약이라기보다 훨씬 더…….
훨씬 더 결혼에 가까웠다.
릴리엔은 계약에는 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결혼에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혼전 계약서를 받았을 때부터 이 결혼은 릴리에이 생각한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두 사람의 삶이 엮이고 있었다.
마력을 나눠 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나누는 입맞춤이나 결혼을 그럴싸하게 보여야 한다고 꾸렸던 신방 같은 것도 그랬다. 생각하기로는 입맞춤 정도는 인공호흡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심없이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침대 위에서도 베개처럼 무심하게 곁에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 틀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섞이고 말았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도 마음이 컵 안에 가득 담긴 물처럼 울컥 흘러 버리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다미언이 훨씬 더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사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다미언 역시 릴리엔의 예상보다 더 훨씬 더, 훨씬 더…….
'진짜 남편처럼 굴고 있잖아.'
난감했다.
릴리엔은 맹탕에 둔하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다미언의 미소를 보면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호의는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호의의 존재를 확신하기엔 다미언이 종종 아주 낯설게 굴 때가 있었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릴리 엔에게 말해 주지 않는 비밀이 있었다.
첫 번째 결혼은 릴리에의 자살로 끝났다.
지금은 시작이야 그때보다 훨씬 좋지만 과연 마무리까지 좋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릴리엔은 불안했다.
이혼과 재혼과 불륜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이 결합의 신실함을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릴리엔은 튜린 사람이다. 튜린 사람은 고지식해서 한번 먹은 마음을 쉽게 고쳐먹지 못한다.
그러니 다미언을 마음 깊이 남편으로 받아들이면 거기서 끝이었다.
그 시점에서 릴리에에게 이혼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은 그렇게 됐는데 목적을 달성했으니 서로 좋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면 과연 어떨까.'
많이 아플 것 같았다.
지금 받고 있는 이것들을 곱게 다시 토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릴리엔은 계약은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은 감당할 수 없었다.
한 발짝 물러서고 싶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피곤해서 이만 쉬고 싶네요. 가장 중요한 설명은 들었으니 나머지는 차차 해결하기로 해요.”
겁이 났기 때문에 릴리엔은 이 순간을 피하고 싶었다.
다미언은 그런 릴리엔을 잠시 바라보더니 “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그제야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 *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파악한 아이반이 눈치껏 물러가고 반쪽짜리 부부는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릴리엔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잠들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번에도 다미언은 별말 없이 그녀를 보내 주었다.
교활한 그는 알고 있었다.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은 끽해야 한두시간 정도. 책임감 강한 릴리에은 다시 자기 발로 침실에 돌아올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이 썩 위로가 되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금 분명…….'
릴리엔은 피했다. 아이반마저 눈치챌 정도로 아주 명백하게.
어금니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가고 뺨에 사선으로 근육이 섰다.
이를 악문 채 다미언은 생각했다.
왜일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가 너무 성급했을까?
…아니면 릴리에이 눈치채 버렸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요동쳤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다미언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가 반쯤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 아닐 터였다.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숨겼다.
자제력이 고장 난 탓에 가끔 릴리엔 앞에서 신체가 변형될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미언은 도망을 가는 것도 불사했다.
릴리엔은 의아해하면서도 끝까지 묻지는 않았다. 다미언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면 넘어가 주었다.
'성격이 성격인 탓인 건지, 아니면 내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어 서인 건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다미언은 지끈 쑤시는 심장을 달랬다.
어쨌든 그걸 들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들켰다면 진작에 세드릭에게 매달려 구해 달라고 애원했어야 옳았다.
추측하기엔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은근히 자기를 옭아매려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천천히 접근했어야 하는 건데. 후회해 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릴리엔은 마치 작은 물고기처럼 물속에 가만히 담근 다 미언의 손아귀 안쪽까지 헤엄쳐 왔다가 위험을 간파하자마자 지느러미를 치며 재빨리 벗어나 버렸다.
빈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거의, 다, 잡았었는데.
바로 그때 잘 준비를 마친 릴리 엔이 침실로 돌아왔다.
“전하.”
창가에 서 있는 다미언을 발견한 릴리엔의 눈빛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직 계셨네요.”
보통의 제국 귀족 부부는 침실을 따로 사용한다. 가주의 공간과 안주인의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보여 주기 위한 신방 놀이 역시 튜린에서 끝난 지 오래였다.
다미언은 뭐 하시냐고 말하는 듯한 릴리에의 얼굴을 보며, 며칠 전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째서 예에 계십니까?”
"그야 전하와 제가 부부가 되었으니까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고 원래 그가 각오했던 것도 이거였다. 그런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가진 적이 없는데도 빼앗긴 것만 같았다.
"…비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차한 줄 알면서도 다미언은 매달리듯 말해 보았다. 그의 릴리엔은 불치병 환자고 그가 전해주는 마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까 진찰을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당분간은 마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거짓말이다. 다미언은 평소보다 덜 차분하고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릴리에의 태도에서 그 사실을 날카롭게 간파해 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오늘은 편히 주무셔도 될 것 같아요.”
릴리엔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를 피하고 싶어 한다.
이 이상 매달려 봤자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생으로 뽑힌 심장이 바싹 마른 뜨거운 모래 위를 구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죽을 만큼 아팠다.
* * *
선황제 이도엘은 유독 부드러운 봄날의 태양 같은 황제였다. 치세 기간에 유별난 업적은 없었으나 평화로웠다.
과도한 분쟁을 종식시킨 비결은다름 아닌 다미언 루펜바인 대공의 존재였다.
제국군 편제에 비수처럼 등장해서 최단 시간에 총사령관이 된 대공의 압도적인 신위는 황제의 치세를 가장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무력이었다. 다미언이 있는 한 누구도 황제의 온유함에 덤빌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황제의 번견으로 유명세를 떨친 막냇동생에 비해 클로드루펜바인은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적었다.
그랬기 때문에 선황이 서거하고 클로드가 황위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사실, 사람들이 의심한 건 다미언이었다.
"전쟁에 미친 척하는 거야.”
"그렇게나 피를 봤는데 조카를 쓱싹하는 것쯤이야 일이겠나?”
반역을 일으켜도 사형을 면할 수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폐하께서는 동생을 너무 믿으신다니까.”
만연한 중론을 뒤엎고 클로드는 보위를 찬탈했다. 놀라지 않은 건 헤멘린나 대제후뿐이었다.
대제후는 죽은 선황의 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멍청한 놈. 원래 루펜바인 황가에는 한 세대 걸러 하나씩 그렇게 개잡종 같은 패륜아가 튀어 나온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된통 당하기 전에 정신 차리라는 외조부의 경고에 “형제끼리 상잔할 순 없다.”며 웃기만 하던 황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딸도 잃고, 손주도 보냈구나.
다 물러 터진 네 놈 덕분이다.
어서 죽어야지 거 보라며 네놈을 닦달이나 하겠구나.”
어쨌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클로드의 반역은 너무도 예상외의 일이었다. 거기다 형수, 선황의 황후와 결혼하는 경악할 짓까지 저질러 버렸다.
"아니, 재혼을 한대도 정도가 있지. 둘 다 미치셨답니까?”
"그러고 보니 선황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두 사람이 심상치 않았다던 소문이 있었는데…"
“귀를 씻고 싶군요.”
즉위는 했다지만 만인의 분노앞에 노출된 새 황제는 서둘러 선제후 중 셋을 포섭하고 하나를 죽였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