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65화 (65/155)

65화.

인의예지는 멀고 칼은 가까웠다. ‘친형제를 죽인 황제와 시동생과 재혼한 황후'라는 주제를 공공연히 올릴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레이 첼 부인이 황제의 공식 정부로서 화려하게 부상했다.

금발에 가까운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날마다 다른 모양으로 구불거리고 열 폭이 넘는 붉은 비단 치마를 휘날리며 사치 행각을 전염병처럼 성행시키는 여자.

레이첼의 미모와 사치와 교활함은 금세 만인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이 몰린 덕분에 황제와 황후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레이첼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황제가 거하는 내실 앞에서 시종이 조심스럽게 말을 올리면서 레이첼을 흘끔거렸다.

레이첼은 사뿐하게 치맛자락을 감아쥐고 서 있었다. 적잖이 많은 나이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는데도 그런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 기이한 미인이었다.

세월을 담뿍 머금은 눈빛이 농염하고 깊었다. 뽀얗게 오른 살집은 크림처럼 달콤해 보여서 군침이 돌았다.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자신을 훔쳐보는 시종에게 레이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허락의 의미로 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레이첼 부인 이 방으로 들어섰다.

"폐하?”

커튼을 반쯤 친 방은 어두웠다.

초가 방금 꺼졌는지 약간 연기 냄새가 났다.

새 황제는 창가 옆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얼굴의 반이 그늘에 잠긴 채였다.

“여기 혼자서 무얼 하고 계셨어요?”

"레이첼.”

황제의 푸른 눈이 총비를 바라보았다.

“넌 처음에 다미언이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

레이첼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보아하니 오늘 그녀의 황제는 애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책사로서 그녀를 추궁할 요량인 듯했다.

총비의 입가에 붉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제가 그랬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들이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말했다.”

“맞아요.”

날아갈 듯이 그러나 나비처럼 사뿐히, 레이첼이 황제가 앉은 안락의자 옆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팔걸이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제가 그랬어요. 그 어리고 고지식한 튜린 선제후가 간악한 잔머리로 저를 이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노래하듯이 고운 목소리에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첩은 팔걸이에 늘어진 황제의 손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경건히 입을 맞췄다.

“하지만 폐하, 걱정할 일도 아니랍니다. 고작해야 한순간의 결혼에 기댄 정략이잖아요.”

“......."

클로드의 손이 레이첼의 턱을 휘감았다.

“폐하…… 악!”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인두로 만 머리카락을 예쁘게 고정했던 핀이 떨어지며 이마를 긁었다. 하지만 옆으로 쓰러졌던 레이첼은 개의치 않고 다급히 몸을 일으켜 클로드의 다리를 부여 잡았다.

"폐하, 폐하!"

“얼굴을 대라.”

레이첼이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고개를 들자 클로드의 손이 다시 한번 크게 움직였다.

짝, 짝.

거친 손길에 여린 뺨은 금세 부어오르고 입술에서는 피가 터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레이첼이 악 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서야 폭력이 멈췄다.

“그까짓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도 잘났다고 주둥이를 놀려?”

어느새 숨이 씨근씨근해진 황제가 매섭게 추궁했다. 그러나 총 비는 오히려 이것이 용서받을 타이밍임을 눈치챘다.

"폐하, 폐하아…….”

뺨을 때린 손에 무조건적으로 주인을 신뢰하는 개처럼 얼굴을 비비며 헐떡이는 목소리로 레이 첼이 말했다.

“이 레이첼이 잘못했어요, 폐하.

잘못했어요.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자신 있어요!"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이자 황제의 손이 애처롭게 구는 정부의 턱을 아프게 틀어쥐었다.

“자신이 있어서 뭘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봐라.”

“단순히 동맹이 깨졌을 땐 다시 손을 잡을 여지가 있지만 이상하게 결혼이 깨지면 서로 간에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려요. 심약한 계집애를 구워삶아 첫날밤조차 보내지 못했을 얄팍한 부부 관계를 깨 버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레이첼은 할 수 있어요, 폐하도 아시잖아요!"

“필사적으로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빈정대면서도 황제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레이첼은 감사하다고 흐느끼며 자신을 때린 손에 입을 맞췄다.

쯧. 황제는 인상을 쓰며 손에 묻은 정부의 붉은 입술연지를 흰얼굴에 비벼 지워 버렸다.

“한 달 안에 그 둘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로 만들어 보여라.”

머리는 헝클어지고 뺨에는 입술연지가 번진 기괴한 꼴로도 아름다운 레이첼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애하는 폐하. 이 레이첼을 믿으세요. 반드시 기대에 부응할게요.”

* * *

쓰러진 채로 대공저에 입성한 첫날 이후로 릴리엔은 계속 칩거했다. 총관과 하녀장의 인사를 받는 것도 미룬 채였다.

굉장히 릴리엔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저기압인 것 같은 다미언이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으므로 마테오는 구태여 나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결국 오늘 다미언이 저택을 비운 사이에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릴리엔의 방문 앞에서 마테오는 붉은 색 편지 봉투를 가슴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의외로 곧바로 입실 허가가 떨어졌다.

“태자 전하.”

안색이 새하얘진 릴리엔을 보자마자 마테오는 대번 표정이 굳어졌다. 화가 나서라기보다 덜컥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무리하신 모양이군요.”

보통 결혼식의 실무는 신부의 어머니나 가까운 친척 부인이 맡아 보는 법이다. 그러나 그럴 만한 사람도 시간도 없었던 릴리엔은 거의 모든 결정을 혼자서 다해야 했다. 가솔들이 협조적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촉박한 시간 내에 답례품을 준비해서 들려 보내고 친필 메시지까지 동봉했다는 소리에 마테오는 사실 기가 막혔었다.

거기다 곧바로 황도까지 원행을 나섰으니 사람이 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하녀가 피에 젖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음…….”

그렇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릴리엔은 난감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실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제가요?"

“결혼식 말입니다.”

“아하, 네. 그건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네요.”

듣는 사람 재량에 따라 무례하게도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릴리엔은 웃는 낯으로 순순히 긍정할 뿐이었다.

그 유순한 얼굴을 보며 태자는 반사적으로 존경하는 선황 폐하이자 사랑하는 아바마마, 이도엘을 떠올리고 말았다.

유모에게 릴리엔이 황후 폐하보다 선황 폐하를 닮았다고 말할 때는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오늘 이렇게 보니 왜 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생김새가 닮은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는데도 무심코 떠올릴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표정이 닮아 있었다.

릴리에이 상아색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마시며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지요.”

입술로 연기를 뱉을 때마다 릴리엔은 꼭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까는 버릇이 있었다.

고작 그 정도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열다섯 소년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네 개의 손톱자국이 붉게 남을 때까지.

“전하?”

“아, 아. 네.”

마테오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생각했다. 나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나?

…아니면 그저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나?

이런 번민이 들 적마다 정신이 아뜩해지게 두려웠다.

‘이래서는 안 돼.'

이래서는 안 된다. 릴리에 이슬라르는 이제 릴리에 루펜바인이 되었다. 그의 숙모였다. 약간의 번민조차 죄였다.

양심의 가책에 압도된 태자는 예의상의 사담마저 과감히 생략해 버렸다.

“먼저 이걸 받아 주십시오. 비전하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릴리엔은 태자가 내민 붉은 봉투를 받았다. 제지 기술이 시원찮은 이 세계에서 이렇게 매끄러운데다 선명한 붉은 빛을 띠는 종이는 대단히 비쌌다.

"레이첼 부인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오래 전부터 릴리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고 따지자면 인연이 있는 사이니 앞으로 교분을 이어 나가자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경고장이군요.”

황도에 올 때부터, 아니 다미언과 결혼하기 전부터 레이첼 부인과 대척하게 되는 건 이미 계산안에 있었다. 릴리엔은 대수롭지 않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편지를 받고 놀라는 모습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 거지요?”

"감사를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황도사교계 판도에 대해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데뷔도 하기 전이라 문외한인 부분이 많아요. 마음을 써 주셔서 기쁘네요.”

마테오의 설명에 따르자면 클로 드 황제에게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첫 번째로는 제국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황제를 남편으로 둔 황후, 카스타나의 아라티네.

“아라티네 황후 폐하께서는 명목상으로는 내궁과 귀족 여인들의 통솔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실권을 휘두르는 사람은 레이첼 우드 부인입니다.”

자기 어머니에 관해 말하는 것 치고는 대단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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