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선황 이도엘과 클로드 그리고 아라티네 황후에 관해 가장 신빙성 있는 풍문은 아라티네와 클로 드가 이도엘이 죽기 전부터 불륜관계였다는 설이었다. 막연한 소문이라기엔 증인도 제법 되는지라, 현 사교계에서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숙부, 아버지를 배신하고 숙부와 간통한 어머니.
마테오에게는 7년째 아물지 못하고 피가 흐르는 깊은 상처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소년의 어조는 감정을 억누른 듯 담담했다.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릴리에도 그에 맞춰 과민 반응을 삼가고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서열이 뒤집힌 건 둘 중에서 보다 후안무치한 쪽이 레이첼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국이 개가에 자유롭다.
해도 전 남편을 죽인 거나 다름없는 시동생과 합가하는 꼴까지 용납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후는 반발을 피해 조용히 칩거하는 쪽을 택했다.
레이첼 부인은 공석이 된 존귀한 여인의 자리를 얌전히 비워 둘 정도로 염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레이첼 부인은 황제의 총비인 동시에 지략가였다. 빼어난 미모와 말솜씨를 타고난 데다 혈통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녀는 공식 정부로 인정받자마자 거침없이 사교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정치와 전쟁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그 남자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각자의 부인이었다. 레이첼 부인은 마치 여왕벌처럼 귀부인들을 다스렸고 클로드의 치세를 안정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직접 부인을 만나 본 마테오는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폭풍의 의핵 같은 여자였다. 뒤에서는 모두가 그 여자를 욕했지만 막상 레이첼의 앞에서 한마디라도 냉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짓밟힐 겁니다.”
약간 놀란 듯하던 릴리엔은 이 내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저를 가족으로 여겨 주고 계시는군요.”
턱 숨이 막혔다.
“그건…….”
“저를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차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태자는 망연하게 깨달았다. 그는 의심받을 입장조차 아니었다.
조카의 입장에서 숙모를 걱정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모린 부인도 그가 직접 릴리에에게 초대장을 전달하고 상황을 파악해 보겠다는 말에 안심해서, 부탁드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슴 속에 작게 자리 잡은 헛되고 삿된 마음을 들키지는 않아서다행이었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태자는 침울해졌다.
이 마음을 들키느니 죽고 싶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게…….
'아파.’
아프다고 하면 그가 정말 미친 걸까.
태자가 입술 끝을 작게 깨물었다. 릴리엔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뒤늦게 모든게 두려워 책임을 피하고 있는 그녀를 이 예의바르고 성숙한 태자는 벌써부터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릴리엔 역시 원래부터 마테오에게 적잖이 마음이 가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드릭 오라버니를 닮았단 말이지.'
생김새가 닮았다는 말은 물론 아니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빙하처럼 연푸른 눈동자를 한 세드릭은 무인치고는 선이 몹시 날렵한 편이었다.
반면에 마테오 황태자는 태양의 정수 같은 짙은 금발에 대해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벌써부터 어깨며 뼈대가 성숙했다.
그대로만 자란다면 삼촌의 체격을 얼추 따라잡을 수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완벽 주의자라서 잔격.
정이 많은 성격이 꼭 닮았는걸.'
릴리엔의 입가에 조금 웃음이 번졌다.
그래, 그러고 보면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언제까지 두렵다는 이유로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칩거한 사이에도 레이첼부인은 움직이지 않았는가.
여전히 두렵지만 다미언과의 결혼을 선택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책임을 져야만 했다. 직무 유기는 이만하면 되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이만 털고 일어나야겠어요.”
“편지에는 답장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죠?”
쉽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수도 사교계는 레이첼 부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결혼식 때와 같은 대처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틈을 보이면 바로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직언에 기분 상하는 성격이 아닌 릴리엔이 웃었다.
“그러게요. 선물 한두 가지로 레이첼 부인의 영향력을 이길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죠.”
황도는 황제와 레이첼 부인의 영역이다. 게다가 레이첼 부인은 여인들의 세계를 휘어잡은 사람이었다.
그런 곳에서 릴리엔이 대뜸 선물 공세를 하거나 호의를 내비치면 받지 않을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결혼식 때 무리를 한 거랍니다.”
“예?”
“제 결혼식장이잖아요. 거긴 제 영역이었거든요.”
요는 아주 작은 마음의 빚을 지워 두는 거다. 선물을 받았으니 내심으로라도 릴리엔을 좋게 생각해서 말 한마디 아껴 주는 것도 좋고 아니면 선물을 받은 것이 켕겨서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못하게 되어도 좋다.
그도 저도 아니면 무서울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란 걸 알려 주는 정도라도 족하다.
릴리에이 교활한 속내를 깨끗하고 덤덤하게 풀어 놓았다.
"아…… 그런.”
마테오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교활한 속셈을 너무 다 알려 줬나?'
릴리엔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
“물론 꼭 그래서만은 아니에요.
내 사정에 맞춰 바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내가 튜린의 릴리에이고 상대는 대공 전하이시니 당신이 우리 결혼식에 오는 건 당연하다.'고 오만하게 굴기 싫었던 것도 있어요.”
“그러셨군요…….”
마테오는 문득 울고 싶었다. 실제로 울지는 않겠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선황 폐하께서도 꼭 저렇게 주도면밀하실 때가 있었는데……….’
형제끼리 상잔하지 않는다. 이 도엘은 자기 신념을 목숨처럼 지켰다.
그러면서도 대비했다. 혹시나 암살당할 때를 대비해 믿을 수 있는 다미언에게 마테오를 보호할 만한 힘을 주었다.
선하면서도 계산이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 릴리에, 연모, 그리움, 죄책감.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색으로 뒤섞여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씨줄 하나 함부로 분리해 낼 수 없는 정교한 태피스트리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걱정을 덜겠습니다."
첫사랑은 자각하자마자 박살이 났다. 그리고 이번 일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깊어져 버렸다.
“그럼 휴식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마테오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남겨진 릴리에이 홀로 중얼거렸다.
“으음…… 내가 너무 갑자기 친한 척을 했나?”
순식간에 중병이 된 상사의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소년이 들었다면 가슴을 칠 그런 말이었다.
* * *
마테오가 돌아간 뒤 교대라도 하듯 곧바로 리타가 들어왔다.
“비전하.”
“무슨 일이니?”
“윈스턴 씨께서 오셨습니다.”
"뭐?"
며칠 전에 튜린으로 내려간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는 말에 릴리 엔은 조금 놀랐다.
“어서 모셔 오렴.”
“네.”
뒤이어 쇼가 들어왔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금방 만나게 될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 금방 다시 만났네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오늘 방문의 목적이 의례적인 진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의사의 행색이 좀 말이 아니었다.
‘잠을 못 잤나?'
눈 밑이 휑한 데다 얼굴이 해쓱했다. 자세마저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일단 앉으세요. 차를 좀 드릴까요?”
“죄송하지만 한 잔 마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릴리에이 리타를 한 번 쳐다보자 리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끓인 물과 다구와 찻잎 그리고 약간의 요깃거리까지 완벽하게 챙겨 들어왔다. 그리고 사안이 중대할 것임을 알아서 짐작하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릴리엔은 손수 차를 내렸다. 그랬다고 해 봤자 다 준비된 것에 물을 부은 정도였지만 어쨌든 쇼는 고맙다고 하고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요?”
“실은 가주님께서 제게 이샤렐의 출입권을 주셨습니다.”
“이샤렐의?”
이샤렐.
그 유명한 3중문을 가진 이슬라 르의 보고였다.
이슬라르는 도난의 위험을 우려 해서 이 안에 들어 있는 소장품의 목록조차 작성하지 않았고 드나들 수 있는 자격 역시 가주에게만 한정되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 이샤렐에 있는 건 그저 번쩍번쩍하는 돌멩이 정도가 아닙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아주 오래되고 값어치 있는 것들입니다.”
쇼는 기록물 중에 점토판에 쐐기 문자로 기록된 것도 있다고 전했다.
“돌아가자마자 가주님께 출입 권한을 요청했습니다.”
“네?”
일개 가신이 요청한다고 허가될 일이 아니었다.
“허락하시던가요?"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바로 허락하시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