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성에서 '릴리엔’이라는 이름은 모든 금기를 무력화시키는 만능열쇠와 같았다.
누이를 지나치게 사랑하시는 오라버니께서 또 한 번 전대미문의 파격을 저질렀다는 소식에 순간적으로 그리움이 울컥 올라왔다.
릴리엔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쇼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전에 가주님께서 이샤렐 안에서 약연을 찾아 비전하께 하사하신 뒤로 계속 생각했습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안에 병세에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 데…….”
쇼가 말끝을 흐렸다. 릴리엔은 직감했다.
“무언가를 알아내셨군요.”
“예.”
쇼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가주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 상황이 중대하여 제 오라 버니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힐 만한 것이군요.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릴리엔은 조금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참고한 건 고대의 문헌입니다. 문헌에 따르자면 아가씨의 체질을 항구적으로 개선할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마력을 불어 넣는 것도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 합니다.”
의사로서의 선고였다.
“상성이 맞는 마력 공여자를 찾은 사례는 극히 일부라도 마력이 있는 경우에 한 해 도움이 됩니다. 아가씨처럼 마력이 전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는 생명력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언제고 오고야 말 겁니다. 그때는…….”
쇼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을 보고 진단하고 확정한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릴리엔이 말을 받았다.
“죽겠군요.”
“예.”
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동요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 릴리엔과 겨우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릴리엔의 눈빛을 조심스럽게 가늠했다.
절망했나?
아니었다.
그럼 상심했나?
그건 잘 모르겠다.
릴리엔은 조금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엄청난 사실을 부담스럽게 털어 놓은 쇼를 동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
쇼는 의아했다. 죽음 앞에서 태연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지금 릴리엔은 마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예상한 사람 같았다.
"알아내느라고 고생하셨어요.”
부정도 분노도 타협도 우울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다 겪어 본 사람 같기도 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릴게요. 오라버니께는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릴 테니 일단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 두시면 안될까요?”
음.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릴리에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비밀로 하시는 건…….”
릴리에이 뜬금없이 픽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비전하.”
“선생님, 저는 이제 튜린의 아가씨가 아니에요. 저는 루펜바인의 대공비고 튜린과 황태자 전하의 동맹을 대변하는 증인이자 인질입니다.”
".......”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할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직은 밝혀져선 안 돼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쇼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아주 낡은 책과 종이 뭉치를 주섬주섬꺼내 놓았다.
“보고 안에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보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바로 튜린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예, 가주님께서도 곧 그리로 오실 테고 관리인 분들도 계시니까요.”
가방을 챙기던 쇼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의사로서 자신이 끔찍하게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 넘게 릴리엔의 주치의랍시고 선생님 소리를 들어온 게 부끄럽기까지했다.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쇼가 떠난 뒤.
릴리엔은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가.
두려웠다. 하지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마음이 그저 고요히 침잠했다. 릴리엔은 두려웠지만 납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렇게 될 것 같았어..'
아주 약간 미래를 바꿔 보았을 뿐인데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너무 좋게 풀렸다.
자신의 인생에 할당된 행운의 총량을 생각할 때 이 상황이 계속될 것 같진 않았다.
그게 정답이었다.
이렇게 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 삶의 희비가 균형을 맞추게 될까 고민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졌다.
“숨어 도사린 함정보다 얼굴을 맞댄 적이 낫다.”
릴리엔은 오래된 제국의 격언을 읊조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손의 떨림은 잠시 후 가라앉았다.
떨림이 가라앉은 걸 확인하고 릴리엔은 리타를 돌아보았다.
“비전하.”
“가서 아이반 경을 좀 불러 주겠니?”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 * *
대공비가 칩거를 깼다.
일전에 보았던 서류를 다 가지고 올라오라는 말에 아이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지시에 따랐다.
자신 없이는 말도 걸지 말라던 다미언이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천생 행정직으로 일처리 밀리는 걸 제일 싫어하는 아이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에라, 인생 한 번 사는 거. 설마 죽이겠어?’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완벽하게 모순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반이 비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릴리엔은 테이블 하나를 비워 놓고 펜과 잉크 세트를 가지런히 준비한 채였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오래 뺏기가 죄송하군요. 전에 못들은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아! 예, 물론입니다.”
일처리를 하겠다는 의사 표시에 아이반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임페라트릭스 칭호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지요.”
턱 서류 케이스를 한쪽에 올려놓자 릴리엔의 손이 케이스를 끌어당겼다.
“서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요. 예의는 아니겠지만 하면서 듣도록 하지요."
자세가 충격적일 정도로 시원시원하고 빨랐다. 예의고 나발이고, 본인부터가 예의 없는 사람인지라 아이반은 그저 신이 나기 시작했다.
“예, 그럼 이건 이 앞에 쌓아 두겠습니다.”
서류 더미가 앞에 얹혔다. 릴리 엔은 대모갑 케이스를 열고 안경을 꺼내 썼다. 그리고 리타가 닦아 준 펜촉을 펜대에 끼우고 잉크웰에 담가 잉크를 찍었다.
펜 끝으로 슬쩍 안경을 밀어 고쳐 쓴 릴리에이 서명을 남기기 시작했다. 자주 해 본 듯 익숙하고 거침없는 솜씨였다.
“이쪽이 대공 전하 소유인 칸타쿤 별장 양도 절차에 관련된 것인데, 아시다시피 칸타쿤은 황실에 예속된 부동산으로서 토지와 건물에 대한 임대 절차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먼저 보셔야 할 것은 이것, 이것 그리고 이거…….”
척척척, 분류된 서류가 쌓였다.
그새 일필휘지로 “루펜바인의 대공비, 릴리에 마리에스타드 이슬라르 루펜바인”이라고 서명을 마친 릴리에이 곧바로 아이반이 내미는 새 계약서 한 부를 받아 들었다.
10년 정도 같이 지낸 주종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 부분이 좀 복잡한데, 여기 이 부분은 반드시 살펴보시고 서 명을 해 주셔야 궁내부에 토지 양도에 대한 허가 신청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처리하는 덴 3개월 정도 걸립니다만 궁내부 쪽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시기가 늦춰질 수 있는 점 미리 양해 드립니다.”
“으음.”
정리해 둔 순서가 일목요연하고 필요한 곳마다 주석을 붙여 둔솜씨가 깔끔했다. 매년 나가는 관리 비용을 표로 정리한 데서는 눈을 비빌 뻔했다.
‘공문서를 다루는 기술은 튜린 것보다 훨씬 낫긴 한데.'
그랬다. 아이반 아이작은 할 때는 하는 남자였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다소 부족하고 되는 대로 입을 놀리는 습관이 있음에도 중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그가 첩보전 및 행정 계열의 귀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일차적으로 걸러 준 것임에도 워낙 서류가 많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문서를 들춰 보았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무렵 릴리 엔이 툭 말했다.
“총체적으로 보니 아무래도 그동안은 대공령의 살림이 안살림과 바깥살림을 구분하지 않고 운영된 것 같군요.”
"!”
예상외의 말에 아이반은 깜짝놀라 얼떨떨하게 긍정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아해하는 아이반에게 릴리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조금 보다 보니 보이던데요.”
정확했다. 그동안 대공가에는 안주인이 부재중이었던 데다 최종 결정권자인 다미언마저 무관심했다.
하는 수 없이 심복이라는 이유로 아이반이 이것저것 결정권을 행사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그럭저럭 돌아가던 게 최근에 다미언이 헤멘린나 선제후로 상속을 받으면서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인세에 행정 지옥을 불러내고 말았다.
질서를 세우고 담당자를 정할 틈이 없었다. 모두가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아이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전에 없이 서늘해 보이는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릴리엔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두통이 온다는 신호였다.
릴리에이 리타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누군가의 행동이 민첩했다.
“자요.”
입가에 담뱃대가 와 닿았다. 다 미언이었다.
전하?”
“일처리를 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자, 여기요."
"아, 네…….”
서로 아직 어색하고 마음의 거리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3일간의 신방 생활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몇 가지 친숙한 습관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가까워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릴리엔은 일단 사양하지 않고 다미언이 받쳐 주는 담뱃대 부리를 물고 연기를 마셨다. 뿌옇게 연기가 번졌다.
“언제 오셨나요?"
“조금 전에요. 방해가 되었나요?”
나긋나긋한 말에 뼈가 있었다.
아이반은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 릴리엔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전하께서 여기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다미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천천히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