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오랫동안 봐 와서 저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 줄 이미 다 아는 아이반마저 깜빡 속을 만큼 부드러운 미소였다.
“이리 앉으세요.”
릴리에이 자기 옆에 놓인 의자를 툭툭 쳤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다미언이 자리를 잡자 릴리엔은 다시 한번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나저나 아이반 경.”
“아, 넵.”
“그동안 상황이 다소 두서없군요. 노고가 많으셨겠어요.”
“……예?”
아이반이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사람이 칭찬을 못 받다 보면 이 꼴이 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다미언의 표정이 아주 웃긴다는 투로 변했다. 아이반은 얼기설기 변명을 시도했다.
“아니…… 그…. 비전하께서 알아 주실 줄은 몰라서……. 그러니까 그게.”
“장부 보는 법 정도는 익혀 두었답니다. 안주인이 되어야 하니.
까요.”
릴리에이 장부를 파악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노고를 알아봐 줘서 놀란 거였지만 아이반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다미언의 눈총이 무서웠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기류가 오가는지 당연히 릴리엔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릴리에도 아이 반처럼 일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아이반이 일이 밀리는 걸 참지 못하는 것과 다르게 릴리엔은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기력이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전체적인 상황을 좀 파악하는 게 좋겠군요. 총관과 하녀장을 좀 만나 봐도 될까요?”
대대적인 사열식이 실패로 돌아가고 대공비가 칩거에 들어간 뒤로 모린 부인은 이제나저제나 비전하께서 자신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다.
“비전하, 들겠습니다.”
하녀장으로서 앞으로 모실 분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시급한 건 사실 실무적인 부분이었다.
저택 내 고용인들의 인원수와 급여로 지급되는 금액을 보고, 그 외 관리비와 난방비로 매달나가는 필수적인 지출 등 보고해야 할 것이 많았다. 월동 준비와 화의 기간 중 손님을 맞을 물자를 비축하는 일도 여주인의 허가를 빼놓고 진행할 순 없었다.
“몸이 아프다니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순 없겠죠?”
“오늘은 인살 드리는 걸로 만족합시다.”
총관의 말에 불안한 표정으로 모린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노크를 하고 입실을 허락받은 총관이 문을 연 순간…….
“……어머나?”
의외의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은 테이블 위를 서류의 산이 점령하고 있었다. 대공비는 실내복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상한 점은 안경을 쓰고 펜을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놀라서 문 앞에 멈춰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릴리에이 빙긋 웃었다.
“어서 들어와요.”
“아, 예…….”
얼떨떨한 기분으로 총관과 모린 부인이 대공비 앞에 섰다.
모린 부인은 재빨리 대공비를 살펴보았다. 과연 얼굴이 창백하고 손목이 겨울 나뭇가지처럼 마른 게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하지만 각오했던 신경질적인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의 대공비는 아파 보였지만 그만큼 유순하고 선해 보였다.
인사를 받으려는지 릴리에이 펜을 내려놓았다. 보던 서류는 옆에 앉아 있던 대공이 넘겨받아 한쪽에 정리해 두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멍하니 서 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총관 쪽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전하. 미력 하게나마 대공가의 가정 사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편하게 엘런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쪽은하녀장인 모린 부인입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비전하.
모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모실 수 있게 되어 광영입니다.”
"환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고 여러 모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한데 이 사람의 몸이 편치 못해 이제까지 제대로 인사도 받지 못했군요.”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망극, 그러니까 황송한 말씀을……"
모린 부인이 횡설수설하며 손을 내저었다.
“갑작스럽게 대공가에 합류하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보셨다시피 강건한 사람도 아니라 중임을 감당하려면 두 사람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부디 잘 부탁드릴게요.”
중임을 감당하겠다니. 이것도 저것도 못 하겠다며 신경질을 내거나 울상을 짓거나, 그도 아니면 무관심하게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는 모습을 상상했던 모린 부인은 말을 잃었다. 뜻밖에 몹시 감격한 탓이었다.
엘런 총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약간 먹먹했다.
“미력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군요. 그럼 사양치 않고 도움을 받아 볼까요.”
“예?”
벌써?
하긴 그러고 보면 쌓여 있는 서류도 그렇고 그들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펜을 잡고 있었던 걸 보면 일을 하고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사실 오자마자 인사를 받고 상황을 파악했어야 하는데 좀 늦었습니다.”
꿀꺽. 대비되지 않은 상황에 총관과 모린 부인이 나란히 침을 삼켰다.
릴리엔은 저택 내 유지 보수 상황, 고용인의 숫자와 전반적인 운영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보고하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 있었던 모린 부인이 척척 대답을 하자 서류에 대부분 머물러 있던 릴리엔의 눈이 빙그레미소를 지었다. 모린 부인은 자기가 새 안주인을 만족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잘 알았습니다. 어쨌든 올해가 넉 달 남짓 남은 지금 이 시점에서 내외 살림을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건 어렵겠군요. 관련 작업을 할 인력도 부족할 거고요.”
“마, 맞습니다. 지금 그 일을 시작하면 과로사 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대공령의 관료 체계는 튜린의 것보다 훨씬 열악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안살림의 실무적인 부분은 다 제 쪽으로 넘기세요. 따로 예산을 편성할 것 없이 일단은 제 쪽으로 배정된 예산을 쓰겠습니다. 관련 서류나 회계 처리는 과동하는 동안에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듬해 회계 연도부터 분리해서 운영을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군요."
줄줄줄, 합리적인 지시 사항이 쏟아졌다.
“아, 그 참에 뒤섞여 있는 장부도 정리를 좀 하고요. …괜찮을까요?”
괜찮으냐고?
주인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열악한 환경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비운의 심복 아이반 그리고 총관과 모린 부인, 세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유순해 보이는 대공비 전하에게 예상보다 훨씬 더 충성을 다하게 될 거란걸 직감하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동의합니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앞다퉈 동의를 표하자 고개를 끄덕인 릴리에이 다미언을 돌아보았다.
“전하 생각은 어떠세요?”
내정에 무관심한 다미언은 둘이 하는 이야기의 맥락만 대강 파악했다.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도 그가 할 대답은 같을 것이다.
“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하, 저 청개구리 온순한 것 좀보소.
간만에 말 통하는 사람을 만나 막혔던 속이 뚫린 듯 개운했던 아이반이 감탄했다. 너무 감탄한 나머지 그의 생살여탈권을 쥔 주군의 뒤통수를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 협조적으로 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릴리엔이 안경을 벗었다.
“따로 특별히 건의하실 사항 있으신가요?”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랜만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사실 어쩌다 보니 그런 건 아니고 다미언이 안 나간 거였다.
“전하, 혹시 바쁘시진 않으세요?”
저건 돌려 말한 축객령일까, 아니면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일까? 불쑥 “제가 나갔으면 합니까?”하고 뾰족하게 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다미언은 간신히 참았다.
“특별히 남은 일정은 없습니다.”
쫓아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자존심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절당하면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 엔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못되게 굴기 전에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다시 애교를 부려 볼까, 아니면 궤변으로 설득을 시도해야 하나.
다미언이 잔머리를 굴리려는데, 릴리엔이 뜻밖에 반가운 얼굴을 했다.
“특별히 바쁘지 않으시다니 잘됐네요.”
“……예?”
잘못 들었나?
그때 릴리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 칭호가 담긴 예의 그 하얀 상자였다.
“시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예부에 처리를 부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불안해하며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 다미언이 말없이 기다려 줘서 고맙고 미안했다.
'왜 이러는지 영문도 모르셨을 텐데.'
심경을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순없겠지만 그래도 이걸로 반성한다는 뜻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다미언은 일단 말없이 상자를 받았다.
사실 다미언이 릴리엔에게 과할 정도로 이것저것 얹어 주는 건 단순히 릴리에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만은 아니었다.
사랑스럽고 행복한 마음으로 상대가 기쁘기를 바라며 안겨 주는 선물?
미안하지만 다미언 루펜바인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못 됐다.
'언젠가 내 비밀을 알게 됐을 때 돈으로라도 위로를 받길 바란다. 그건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남편이 인간이 아닌데, 돈과 권력이 위로가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릴리엔은 청렴결백해서 재물에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내 욕심이지.’
다미언은 그저 그들 사이를 묶는 서류가 많아지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