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처음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릴리 엔이 외조부가 안배한 결혼 증서를 꺼내 보였을 때였다.
저 자리에 릴리엔과 다미언, 두 사람의 서명만 들어가면 완벽하게 법적 효력이 발휘되어 두 사람은 부부로 묶인다.
충격적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이 어찌 대단하지 않은가.
다미언은 그동안 이 세상의 일처리 방식에 연연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그에게 이 세상은 그저 종이쪽이었다.
찢어 버리고 불태워 버리고 칼로 찔러 쪼개서 없애 버릴 수 있는 것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다미언을 구속할 수 없었다. 원한다면 당장 황궁에 들어가서 클로드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이도에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죽어 가면서까지 형제끼리 상잔은 하지 말자고 고집을 부렸던 이도엘. 그 착한 큰 형.
큰형의 유언은 죽어서도 그에게 효력을 발휘했다. 달리 말해 다 미언을 붙잡고 있는 건 고작 죽은 사람의 유언이란 뜻이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어겨 버릴 수 있는 것.
인의예지, 도덕, 권력, 재물, 심지어 혈연까지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이 괴물을 묶는 사슬이 될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외조부가 '주인 잃은 사냥개’니 '인간 백정'이니 대놓고 혹평을 했겠는가.
하지만 거기에 릴리에이 끼어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다미언은 그들 사이에 복잡한 계약 관계가 지저분하게 얽히는 느낌이 소름끼치게 좋았다.
영악한 다미언은 배웠다. 그에게는 의미 없고 그저 복잡하기만한 이런 것들이 바로 저 올곧고 우직하고 도덕적인 릴리엔 이슬라르, 세상의 관습과 법과 도덕을 존중하는 그의 비를 가장 효과적으로 얽어매는 수단이었다.
'환상적이야…….’
미친 생각이겠지만 그랬다.
릴리에이 그를 밀어냈던 건 아직도 죽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이 한 번에 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다 잊어버렸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릴리에.”
“네.”
“고마워요.”
다미언은 부러 힘없이 착한 얼굴을 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눈앞의 릴리엔을 흉내 낸다고 생각하고 표정을 만들면 그럭저럭 통했다.
과연 릴리에이 곧바로 미안한 눈빛을 했다.
“전하, 저는…….”
“쉿."
그는 내면을 빠듯하게 채우는 충족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에게 성큼 다가가서 입을 맞췄다.
릴리엔은 당혹한 듯 했지만 지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탓인지 얌전히 그 입맞춤에 수긍해 주었다.
다미언의 계산 대로였다.
목마른 입술이 갈구하듯 릴리엔의 입술을 취했다. 다소 급박하고 벅찬 입맞춤에도 릴리엔은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다미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사랑스러운 사람. 이 착한 사람을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다.
다미언은 처음으로 이 종이쪽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다미언에게서 이 사람을 앗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에 릴리엔은 생각하고 있었다.
때 이른 죽음으로 내려놓게 될 것이라면 잠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사람도, 이 사람이 주는 것도 내 것은 아냐.'
어차피 내 것이 아닐 것,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들.
잠시 맡아 두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입술을 맞대고 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다미언은 릴리엔을 조금씩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릴리엔 이슬라르는 오래지 않아 죽는다.
그때, 다미언은 몰랐다.
10. 폭풍전야.
블란쳇 공작의 영애 마리앤 슈미트는 최근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되돌아보자면 튜린의 릴리에 이슬라르와의 마찰로 은방울꽃 소로리티에서 쫓겨났을 때가 그녀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사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억울할 따름이다.
그녀가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다. 마리앤은 릴리엔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 다퉜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리앤은 그때 어렸다. 감정적으로 행동해도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하는 나이였다.
하지만 소로리티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대로 마리앤을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마리앤의 억울함, 마리앤의 두려 움, 마리앤의 이야기를 들어 주려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먼저 소로리티에 데뷔한 것도마리앤이고, 헤멘린나 대제후와 더 오래 연을 맺어 온 것도 마리 앤이었다.
편을 들어도 마리앤의 편을 들어 주어야 마땅했고, 다미언 루펜바인 대공의 약혼녀를 구한대도 먼저 마리앤을 떠올려야 응당옳았다.
하지만 누구도 마리앤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나마 다행인 건 가족들, 정확히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리 앤이 당한 일에 크게 분노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튜린 선제후의 맹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을 지켜 주었다.
“애들 싸움에 본데없이!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일의 경중도 구분할 줄 모르고 창피한 줄도 모르는군! 그 아비인 선대 튜린 선제후부터가 매번 잘난 척콧대를 세우고 다니더니 자식 교육은 아주 엉망으로 해 놨어!”
어디 내 딸을 무시하고 이따위 짓거리를 벌이냐며 큰소리를 내던 아버지는 몹시 든든했다. 어머니는 마리앤이 들어갈 만한 더 좋은 소로리티를 구해 보겠다고 눈물로 약속했다.
하지만 소로리티를 구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은방울꽃 소로리티〉처럼 수차례 황후를 배출한 유서 깊은 소로리티에서 쫓겨난 마리앤을 받아 주려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엾은 마리앤은 두려움에 떨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제대로 된 소로리티에 소속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한번 쫓겨났던 전력은 더 큰 문제가 됐다.
소로리티에서 쫓겨났다는 건 그만큼 문제 행동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리앤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차가운 시선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리앤은 사교계 데뷔는 몰라도 제대로 된 배우자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지참금을 올려도 백작 이하의 집안, 운이 나쁘면 대귀족가에 편입되길 원하는 준남작이나 훈작사와 결혼하게 될 수도 있었다.
릴리에 이슬라르, 그 얄미운 계집애는 대공비가 될 텐데 자신은 고작 준남작 부인이 된다니!
어떻게 해서든 그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마리앤은 매일 눈물로 호소했다.
다행히 시간은 좀 걸렸지만 어머니는 약속을 지켰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현재 마리앤은 사교계에서 가장 유력한 레이첼 부인의 소로리티에 소속되어 있었다.
블란쳇 대공이 오랫동안 신세를진 헤멘린나 대제후를 배신하다시피 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 한 대가였지만 마리앤은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레이첼 부인의 <피오니 아 소로리티는 사교계에서 대단히 위세를 부리고는 있으나 거기에 어떤 위엄이나 명예는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마리앤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은방울꽃 소로리티는 역사가 깊어. 그건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그럼 뭐 해? 지금은 레이첼부인의 세력이 훨씬 더 막강한 걸.’
사교계에서 뒷배가 되어 줄 사람으로는 라니스터 후작 부인이나 대부인보다는 황후나 다름없는 레이첼 부인이 훨씬 나았다.
〈피오니아 소로리티〉 선배의 젠체하는 말을 마리앤은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더 고소한 일은 최근에 일어났다.
얼마 전 릴리에 이슬라르는 결혼을 했다.
뺨을 갈겨도 시원찮을 그 애가기어이 대공비가 되고 말았다는 소식에 마리앤은 너무 분했던 나머지 아버지가 선물해 준 귀한 도자기 인형을 열 개나 박살내고 말았다.
물론 한 시간 뒤에는 “튜린의 릴리에 때문에 인형이 다 부서졌다.”며 엉엉 울었지만.
하지만 다음날부터 사교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다 나이도 어린 아가씨께서 데뷔도 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된 거래요?”
“낸들 아나요. 하루라도 빨리 대공비가 되어 루펜바인 성을 달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만하면 다행이게요. 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마, 더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설마……?”
"참 궁금하네요. 대공비 전하께서는 과연 팔삭둥이를 낳으실까, 아니면 칠삭둥이를 낳으실까?”
이런 악의적인 소문은 레이첼부인의 소로리티인 피오니아 소로리티를 중심으로 점차 퍼져 수도 사교계를 널리 잠식했다.
“은방울꽃 소로리티에서는 별말 없어요? 이 정도면 소로리티에서 당장 쫓아내야 할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소로리티의 일원이 그런 큰 사고를 쳤으면 같이 명예가 곤두박질을 치고 말텐데, 아마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겠죠.”
"세상에. 이렇게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도요?”
부인들의 깔깔깔 웃는 소리에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른다.
릴리에 이슬라르, 그 고고한 척하던 애가 어떻게! 결혼도 안 한 처녀인 주제에 그런 대담한 짓을 해서 명예를 망칠 수가 있지?
한동안 마리앤은 릴리에의 이름만 들렸다 하면 굳이 끼어들어 험담을 주도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지저분한 소문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의 체면도 깎인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말을 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입에 올리는 사람들도 큰 악의 없이 적당히 가십으로 남의 이야기를 즐길 뿐이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은 너무나 열성적으로 험담에 임하는 마리 앤을 불편하고 괴이쩍게 여겼다.
그러나 마리앤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첼 부인이마리앤에게 개인적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은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마리앤, 정말 잘 됐구나! 황후나 다름없으신 분이 초대장을 보내시다니. 분명 피오니아 소로리티에서 네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단 걸 전해 들으신게 분명해.”
“정말 그럴까요?"
“그럼! 내가 듣자니 레이첼 부인께서는 피오니아 소로리티〉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더구나.”
마리앤은 너무 기뻐서 하늘을 둥둥 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자기가 고작 〈은방울꽃 소로리티〉 따위에서 쫓겨나 엉엉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 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마리앤은 당당하게 초대장을 챙겨 레이첼 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