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레이첼 부인의 저택은 온통 연한 조개 같은 핑크빛으로 칠해져 아주 예뻤다.
응접실 역시 대단히 화려했는데, 무작정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적절하게 미적 감각을 발휘한 태가 났다.
“부인께서는 지금 막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채비를 하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네.”
혼자 남은 마리앤은 황홀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노랑으로 벽을 칠한 거실은 장식용 소품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 구경할 거리가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마리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벽에 걸려 있는 부채였다.
살대를 레이스 모양으로 정교하게 깎아 내고 투명하게 비치는 아주 얇은 모슬린을 붙였다.
그 위에 금분으로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천사의 두 눈은 터키석이었고 산호로 만든 리라를 들고 있었다.
마리앤은 순식간에 넋을 잃었다.
저 아름다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대화를 나누면 아주 우아해 보일 것 같았다.
딱 한 번만 들어 보면 안 될까?
딱 한 번만 들고 정말 내가 우아해 보이는지 확인만 해 보면 되잖아…….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 부채가 마음에 드나 봐요, 레이디 마리앤.”
"!"
화들짝 놀란 마리앤이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어느새 레이첼부인이 시녀와 함께 서 있었다.
마리앤은 황급히 무릎을 굽혔다.
“브, 블란쳇 공가의 딸 마리앤이 미스트리스 레이첼을 뵙습니다.”
"으응, 너무 놀라신다.”
애교 있는 말투로 씩 웃으며 부인이 하늘하늘 몸을 움직여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부인의 새하얀 뺨과 이마에 작은 거즈가 붙어 있었다. 분을 발랐는데도 광대 위로 멍이 희미하게 비치는 걸로 봐서 제법 큰 상처인 모양이었다.
“저 그…….”
자기도 모르게 그 상처는 뭐냐고 물으려던 마리앤의 머릿속에 <피오니아 소로리티〉 선배가 해준 경고가 간신히 떠올랐다.
"절대, 레이첼 부인의 몸이나 얼굴에 어떤 상처나 멍이 있더라도 절대 물어봐선 안 돼.”
마리앤은 당연히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그것까지 알려 줄 순없다며 딱 선을 그었다.
“그걸 알아내는 건 네 몫이야.
있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기도 할 거고, 어쨌든 상처에 대해 질문하지 말아야 하는 건 물론, 아예 상처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네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하란 말이야. 알겠어?”
경고를 떠올린 마리앤이 덜컥입을 다물자 레이첼 부인은 큰 눈을 똑바로 뜬 채 붉은 입술로만 미소를 지었다.
“앉아요.”
“감사합니다, 부인.”
“내가 오늘 이렇게 레이디 마리 앤을 부른 건 레이디 마리앤의 행동에 대해 해 줄 말이 있어서예요.”
“제….행동이요?”
결코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다. 마리앤은 불안해졌다.
“듣자 하니 레이디 마리앤이 요즘 새로 황실의 일원이 되신 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다니신다면서요?”
“그, 그건…….”
마리앤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곧 의아해졌다.
정황상 레이첼 부인은 릴리엔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이렇게 혼내듯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앤은 혼란스러웠다. 레이첼부인은 황제의 공식 정부다. 황제가 다미언 루펜바인 대공을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마리앤도 이정도 정세는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마리앤은 레이첼 부인과 황제폐하의 편으로서 대공비를 지탄한 건데 어째서 레이첼 부인이 화를 내는 걸까?
“혼란스러운 모양이군요."
"저…….”
“나는 황제 폐하와 황가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여성이에요.
그런 내가 황실의 명예를 훼손하는 짓을 묵인한다면, 그것도 내가 관리하는 소로리티의 아가씨에 대해서 라면…… 내 입장이 어떻겠어요?”
“자, 잘못했습니다, 부인.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어요."
레이첼 부인이 주눅이 들어 사과하는 마리앤을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아하하하!”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우셔라. 겁을 먹으니 아주 귀여워요, 레이디 마리앤."
“예, 예?”
“설마 지금 내가 한 말을 믿은 거예요?”
그제야 마리앤은 레이첼 부인이장난쳤다는 걸 눈치챘다.
깜빡 속은 셈이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난을 눈치채지 못한 탓에 보다 재치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부인, 정말 놀랐어요.”
“그래 보이더군요. 하지만 내 말을 다 장난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아무리 나를 위하는 좋은 마음에서라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대공비를 비난하면 누군가는 레이디 마리앤을 안 좋게 볼 수도 있잖아요?"
적당히만 즐기다가 발을 빼라는 충고구나.
마리앤은 돌려 말하기를 이해한 자신이 기특하고 뿌듯했다.
“유익한 충고에 감사드려요, 부인.”
“별말씀을요. 나야말로 이렇게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아가씨를 만나서 기분이 좋네요. 술은 좀 즐길 줄 알아요?"
“저어, 약간은 마실 줄 알아요."
"베티!”
“네, 미스트리스.”
귀족 출신일 시녀를 마치 하녀처럼 다루는 모습에 마리앤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공식 정부의 권세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레이첼이 굉장히 안하무인이라고 생각하고 질려 했겠지만 마리앤의 관점은 보통과 좀 달랐다.
시녀가 아름다운 컵에 술을 따라 마리앤에게 건넸다. 마리앤이 조금 마셔 보니 향이 좋은 데 반해 상당히 독했다.
“못 마시겠어요? 이 정도는 마셔야 사교계 생활을 할 텐데.”
“아, 아니에요. 향이 너무 좋아요.”
마리앤은 홀짝홀짝 열심히 술을 마셨다. 마시다 보니 제법 향이 좋았다. 정신을 차린 건 꽤 많은 양을 들이킨 뒤였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마리앤을 보며 레이첼 부인이 씩 웃었다.
“한데 내가 듣자 하니 레이디마리앤은 본디 대공비 전하와 같은 소로리티 출신이라면서?”
“그건 이제 부끄러운 과거일 뿐입니다. 저는 그곳보다 부인께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피오니아〉가…….”
"하아암.”
레이첼 부인이 부러 크게 하품을 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뭐 그렇게 따분하고 당연한 얘기를 앵무새처럼 해요? 지루하니까 내가 묻는 이야기나 해 봐요. 재미있게.”
"네? 네에…….”
지루하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마리앤은 〈은방울꽃 소로리티〉에서 릴리엔과 있었던 일을 재치 있게 이야기해 보려고 애썼다.
술김이기도 하다 보니 이야기는 점점 더 과장되었다.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마음에 릴리엔의 행동에도 나쁘게 살이 붙었다.
레이첼 부인은 그다지 흥미로운 기색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중간에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부당하게 쫓겨 난 저를 천만 다행으로 부인께서 구명해 주셔서 이렇게 훌륭한 소로리티에…….”
“아, 그만, 그만. 거기부터는 나도 아는 이야기니까 됐어요.”
손을 저어 이야기를 끊은 레이 첼 부인은 홀짝홀짝 남은 술을 마셨다. 그동안 마리앤은 머쓱하게 옷자락만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마리앤, 저 부채가 마음에 드는 것 같던데.”
“그건…….”
“마음에 들면 가져요. 선물로 줄 테니.”
"네? 정말인가요?"
“어마, 그럼 내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요?”
마리앤은 그런 뜻이 아니라며 황급히 해명했지만 레이첼 부인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 눈치였다.
"무료한 사람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으니 상을 줘야죠.”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부인!"
레이첼의 시녀가 벽으로 다가가 부채를 내려 왔다.
“자요. 받으세요.”
시녀는 값비싼 물건을 건네는 게 싫었는지 퉁명스러운 태도였지만 부채를 받은 기쁨에 찬 마리앤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침내 손에 쥐어 보니 부채는 정말 예뻤다. 손이 더 희고 고와 보이는 것 같았다.
황홀해하는 마리앤을 지켜보던 레이첼이 하품을 했다.
“자, 그럼 이만 가 볼래요? 나는 이제 다시 좀 자야겠으니까.”
“아, 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부인. 소중히 간직할게요!”
다소 무례한 축객령이었지만 마리앤도 얼른 집에 가서 새 부채를 얼굴에 대 보고 싶었기에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오늘 이야기 아주 흥미로웠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레이디마리앤?”
부채를 쥔 채 마리앤은 계산했다.
저 말은 즉, 릴리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또 이런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명심할게요, 부인.”
레이첼의 미소가 깊어졌다.
“부채, 잘 쓰도록 해요.”
* * *
마리앤이 기분 좋게 돌아간 뒤.
"아아, 정말이지.”
긴 소파에 드러눕듯 기댄 레이 첼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도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어서 하찮구나. 게다가 눈치가 없어서 하나하나 다 떠먹이듯 말해 줘야 사람 말뜻을 알아듣는다니! 저런 자의식 과잉에 아둔한 계집아이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도 왜 저 연주하는 천사 부채를 주신 거예요? 무척 아끼셨잖아요.”
“그래도 대공비에 대한 열렬한 적의 만큼은 쓸 만해 보이지 않니?”
“잘 모르겠어요.”
시녀는 퉁명스러웠다. 심복인 자기도 탐냈지만 만져 보지도 못한 부채를 남이 가져가서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뭐, 욕심이 많은 건 좋다. 이용하기 편하니까.
“또 누가 아니, 저러다 홧김에 대공비를 발코니에서 밀어 버리는 사고라도 쳐 줄지.”
“......."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저깟 부채는 얼마든지 선물해 주지. 이미 처형당해서 관 속에 같이 묻어 주기나 해야 할 테지만 말이야.”
섬뜩한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는 레이첼의 모습은 마리앤보다 소녀다운 데가 있었다.
"어디 보자, 사랑스러운 대공전하 부부께는 일단 각자 애인 후보나 붙여 줘 볼까?”
“서로 좋아서 결혼할 것도 아닌데 각자에게 애인을 만들어 주는 게 과연 방해가 될까요?”
“어마, 너 그동안 내 옆에서 뭘 봤니?”
레이첼 부인이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중얼거렸다.
“결혼이라는 게 묘한 데가 있어, 얘. 서로 별 감정이 없다가도 일단 남편과 아내라는 허울이 한 꺼풀 쓰이면 이상하게 특별해진다니까? 내 전남편 좀 보렴. 데 면데면하던 사람이 내가 밀회를 시작하니까 벌컥 화를 냈잖니?”
“음...”
“모름지기 남녀 관계만큼 불화가 끼어들기 좋은 곳이 없단다.
잘 모르겠거들랑 어디 한번 지켜보렴.”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흔한 스캔들 하나 없으셨잖아요. 어떤 여자를 붙여 준대도 가능성이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연애는 안 해도 돼. 적당히 의심스러운 장면을 대공비가 보기만 하면 그만이지. 아마 속이 적잖이 뒤집어질걸?"
자신 있게 미소를 지으며 레이 첼 부인이 흥얼거렸다.
“자아, 그럼 어떤 사람들을 붙여 줘 볼까…….”
불화를 꿈꾸는 뺨이 소녀처럼 발그레하게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