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 *
대공 사저의 모린 부인은 최근들어 기분이 몹시 좋았다.
“안녕하세요, 부인…… 앗!”
이른 아침, 어린 메이드가 석탄이 든 양동이를 들고 가다가 부인의 앞치마에 검댕을 묻혔을 때도.
“조심을 해야지. 그러다 넘어질라.”
혀를 쯧쯧 차며 응접실에 가서는 실수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타이를 뿐이었다.
"웬일이야, 저 깐깐한 부인께서?”
평소 모린 부인이 나쁜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다만 원래 황궁에서 황족을 시중들던 사람이다.
보니 기준이 원체 높았다.
게다가 사저에 안주인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부담감을 느꼈다. 자존심 높은 부인은 '역시 안주인이 없어서 그런지 소홀하고 엉망이다.'는 말을 들을까봐 매사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실수에도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그것도다 옛말이다.
“왜겠니. 부인이 맨날 노래를 부르던 그 안주인님이 오셨잖아.”
“대체 상전이 생기는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성가시기만 한데.”
“윗사람이 생기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긴 하지.”
“뭐?”
“책임질 일이 적다는 거?"
하녀들끼리 까불거리며 떠들어도, 기분이 좋은 모린 부인은 그저 떠들게 내버려 두었다.
모린 부인은 사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난방과 청소 상태를 점검했다.
그 와중에 응접실 커튼의 리본이 하나 풀린 것을 발견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경을 치는 대신 조용히 묶어 두고 자리를 떠났다.
집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부인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세실리아!”
소리 높여 저택의 요리사를 부르며 모린 부인이 물었다.
“비전하의 아침 식사는 다 준비됐나?”
“거기!”
깨끗하게 정리된 작업대에 다리를 펼 수 있는 넓은 쟁반이 놓여 있었다.
총관이 평소보다 심혈을 기울여 닦았는지, 은쟁반은 거의 수은을 바른 거울만큼이나 반짝반짝했다.
빵은 버터를 듬뿍 넣어 고소하면서도 쉽게 부스러지는 빵과 계란물을 입혀 구운 토스트, 두 가지를 준비했다. 베이컨과 양송이를 넣은 오믈렛에 라즈베리 잼, 그리고 신선한 오렌지 주스까지.
모린 부인은 고개를 끄덕여 흡족하게 합격점을 매겼다. 아침 식사를 배달할 시간이었다.
**
그 시각 릴리에의 침실.
남은 목숨이 5년 남짓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릴리엔의 일상은 별로 변한 부분이 없었다.
릴리엔은 최대한 의연하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허둥지둥하거나 슬퍼하다가 귀중 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부터 병을 앓아왔다. 5년씩이나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 주어져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변 사람들에게는 당분간 숨기기로 결정했으니 최대한 종전과 비슷한 생활 패턴을 유지 해야 했다.
계절은 성큼 겨울에 가까워졌고 슬슬 아침 해가 늦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든 사이 체온이 떨어지는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뜰때가 되면 제법 추위가 느껴졌다.
릴리엔은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깬 상태로 무심결에 몸을 말았다. 그런 그녀의 등 뒤를 타인의 체온이 감쌌다. 포근하고 따뜻해서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끙 하고 등을 기댔다.
잠깐, 타인의 체온?
그런 게 이 이불 안에 존재하면 안 되지 않나?
릴리엔은 잠시 인상을 썼다. 조금씩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옆에서 내쉬는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보나마나 범인은 뻔했다. 그래도 예의상 릴리엔은 최대한 몸을 돌려 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정말로 법적 남편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반짝이는 백금발, 햇살과 그늘이 완벽한 조형의 골격 위에서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전하.”
다미언은 대답 대신 목 안쪽으로만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릴리에에게 엉겨 붙는 모양이 정말로 잠투정인 것처럼 보였지만…….
“안 주무시고 계신 것 다 압니다.”
다미언은 콧잔등을 약간 움찔했지만 잘 버텼다. 인내심 깊은 릴리엔이 다시금 달랬다.
“혼내지 않을 테니 그만 일어나세요.”
"약속하신 겁니다.”
다미언이 살그머니 눈을 뜨고 릴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밤마다 제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침대에 올라오는 건 곤란하다.
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희는 부부고……."
“대체 어느 귀족 부부가 날마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나요. 다들 남사스럽다고 할 거예요.”
“저희는 귀족이 아니라 황족인데.”
“전하.”
"잘못했습니다.”
다미언이 웅얼웅얼 사과하며 이불 속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몇 번 문지르는 동작이 아주 피곤해 보였다.
'음…….'
아침부터 좀 너무했나.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먹었던 릴리에의 마음이 약간 약해졌다.
"…피곤하신가요?”
“혼자 자는 버릇이 안 들어 있어서요.”
십대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구른다미언은 혼자 잠을 자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장교로 가기엔 제 나이가 너무 어렸어요. 하는 수 없이 신임 기사들 사이에 끼어서 공동생활을 했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았습니다. 습관이 되니까 고치기 어렵더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마지막 한 문장만.
다미언은 거짓말을 잘 하려면 다수의 사실에 거짓 한 가지를 섞으면 된다는 규칙을 충실히 애용했다.
마른세수를 마친 다미언이 피곤하고도 미안한 표정으로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전쟁터에서 든 습관이라 그런지 잘 고쳐지지가 않네요. 미안해요. 이제 언제든 찾아가서 같이 잠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도무지 참아지질 않아서…….”
다미언이 쓸쓸하게 말끝을 흐렸다. 릴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잠을 많이 못 주무시나요?”
“심할 때는 동이 트도록 잠들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심한 불면증을 연기하는 가련한 미인.
흡사 비 오는 날 처마 밑에서 떨고 있는 아기 고양이처럼 구슬프고 가여웠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 래도 그녀가 보기에 이 남자는…….
'생각보다도 스킨십을 좋아하신 단 말이야.'
딱히 그녀에 대한 불순한 속셈이나 정열로 불타는 마음이 있어 서라기보다 그저 사람에게 치대는 걸 몹시 좋아하는 것 같다…… 고, 릴리엔은 생각했다.
장렬한 착각이었다.
순전히 릴리엔의 탓만은 아니었다.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30cm 거리에서 속눈썹을 살살 깜빡이며 릴리엔의 착각을 부채질하는 이 남자의 탓이 가장 컸다.
“불편하시면 이제 앞으로는 정말 자제할게요.”
기가 팍 죽어 꼬리를 내리고 주의하겠다, 자제하겠다고 말하는 다미언은 몹시 처량해 보였다.
그쯤 되니 릴리엔은 슬슬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아닌가.
옆에 인기척이 없으면 잠을 못자서 휑해지는 사람이 망설이다.
망설인 끝에 부인의 침실을 찾아와서 얌전히 자리만 차지한 걸 계속 나무라는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좀 심했네요.”
잠이 안 오면 찾아오시라고 먼저 허락해 줄 수는 없지만 내일부터는 한 침대에서 눈을 뜨더라도 나무라지는 말아야겠다. 릴리 엔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였다.
“비전하, 모린 부인입니다.”
아차.
오늘 10시 정도에 아침을 먹겠다고 약속해 둔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릴리엔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차마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단정한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비전하?”
이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척을 하려는데…….
스윽 다미언이 일어났다. 190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남자가 일어나 앉으니 어깨가 마치 격벽 같았다.
“비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못하셨다. 잠시 물러가 있다가 오거라.”
"!”
릴리엔은 당황했다. 침실 문을 사이에 두고도 모린 부인이 당황한 기색이 정확히 느껴졌다.
"물러갑니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릴리엔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전하, 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하시다고요?"
다미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희가 얼마 전에 결혼한 신혼부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저택에 없습니다만."
“그렇기야 하지만 이래서는 저희가 금슬이 좋다고 소문이 나고 말 거예요.”
다미언이 빤히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문이 나면 안 되나요?”
진심으로 섭섭했던 나머지 꾸며 내지 않았는데도 목소리에 섭섭한 기색이 잔뜩 묻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단호했다.
“예, 곤란합니다.”
다미언은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다. '불쌍한 척’이 통하지 않았다.
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곤란하다'는 단어 선정에는 진심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머릿속에 댕댕 종이 울리듯 곤란…… 곤란…… 곤란…… 하고 메아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곤란하시다고요…….”
“전하, 부부 사이가 좋아 보이면 사람들은 으레 아이를 기대한답니다.”
"아.”
아이.
이건 천하의 다미언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