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72화 (72/155)

72화.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에 덜컥놀라고 만 다미언에게 릴리에이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금슬은 좋아 보이데 1년이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대부분 강건하신 전하보다는 그렇지 못한 제 쪽에 문제가 있다고 쉽게 추측할 거예요.”

“그렇…… 아이가……. 그러니까 그럴 수도…….”

“그러니 당분간은 '서로 싸우지 않는 걸로 보아 적당히 친해 보이기는 하는 정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사료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훼손되는 게 그의 명예가 아니라서 억지를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아 보이는 릴리엔의 태도가 못내 섭섭했다.

'먼저 반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바로 그때.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가 보다 조심스럽게 울렸다.

“전하 그리고 비전하."

엘런 총관이었다.

“이만 기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궁에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황궁에서 보낸 사자'라는 말에 다미언의 얼굴에서 대번에 표정이 사라졌다.

“전언이 있었나?”

문 뒤에서 잠깐 망설임 섞인 침묵이 흘렀다.

"폐하께서 비전하께 칙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관련하여 전할 물건도 있는 모양입니다.”

“비에게?”

고질병이 도지셨군.

다미언은 냉소했다. 그는 클로 드를 한 번도 황제로 존중해 준 적이 없었지만 끈질긴 클로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내가 황제이니 너는 내 신하다.'라는 걸 주입시키려고 했다.

별 같잖은…….

“전하, 제가 나가 보아야…….”

"아닙니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을 채워 줄 의리는 없었다. 게다가 지목한 상대가 그도 아니고 릴리엔이라니.

'절대 안 돼. 누가 용납할 줄 알고.'

그때였다.

“전하.”

릴리엔의 손이 다미언의 팔에와 닿았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황명이라고 왔는데 나가서 직접 듣기는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릴리엔이 자분자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향후 폐하께서 이 일을 어떤 식으로든 트집 잡으면 귀찮아지는 건 저희입니다. 게다가 총관에게 황제의 사자를 내쫓으라는 것도 받들기 어려운 분부일 테고요.”

"......"

같은 말을 아이반이 했다면 컸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는 릴리엔이었다. 게다가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일어난 상황이 아닌가.

겪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지만 이런 게 바로 지극히 평범한 부부다운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위, 곁에 앉아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내의 설득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할 게 뭐 있나요? 전하께서 옆에 계셔 주실 텐데요.”

릴리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 제일의 무장이시고 이 집은 전하의 영역인 걸요. 해코지 당할 걱정을 한다.

면 그게 더 웃기는 일이 아닐까요?”

다미언은 순간적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심 없는 신뢰에 조금 전 섭섭했던 마음이 깡그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욱신거리던 심장이 풀어지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기분이 희망을 품고 허공으로 날개를 파닥였다.

"비께서는 사람을 농락하는 재주가 있으세요.”

“……네?”

“바람둥이가 될 소질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사심 없이 사람 마음을 이렇게까지 휘저어 놓을 수 있다니.

“반칙 같은 사람.”

다미언이 쉰 목소리로 달콤하게 중얼거리며 릴리에의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그때였다.

“……큼, 큼.”

총관이 문밖에서 점잖게 헛기침소리를 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전하, 죄송합니다만 시급히 답을 주셔야겠습니다. 어찌할까요?”

다미언이 말릴 새도 없이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릴리에의 어깨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쪼아 놓고 일어섰다.

"준비를 하고 나갈 테니 기다리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곧 앨런이 방문 앞에서 떠나갔다. 다미언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릴리엔에게 씩 하고 웃으며 물었다.

“저 방금 잘했지요?”

훌쩍 큰 성인 남성 주제에 응석을 부리는 듯한 태도였다. 릴리 엔의 입가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가 떠오르고 말았다.

"예, 잘하셨습니다.”

“칭찬은 안 해 주시나요?”

“잘하셨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로만?"

그럼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난감해하던 릴리에이 고민 끝에 손을 들어 다미언을 얕게 토닥였다.

어설픈 손놀림이었는데도 다미언은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가 꽁꽁 언 몸을 녹이는 사람처럼 낮은 신음을 흘렸다.

“멈추지 말고 계속 토닥여 주세요. 이대로 잠깐만 더.”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릴리엔이 몇 번 더 그를 토닥이자 다미언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샜다.

그가 중얼거렸다.

“……고작 이것만으로 기뻐서 착하고 얌전하게 굴고 있다니.

나도 참 갈 데까지 갔네요."

“?”

“못 들으셨으면 됐어요.”

* * *

보통 황제의 칙령을 받잡기 전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사자가 찾아왔고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릴리엔은 평상복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는 선에서 치장을 마쳤다.

다미언은 정도가 더 심했다. 그는 잠옷 위에 그대로 가운을 걸치고 발에는 슬리퍼를 꿴 차림이었다.

절대 침실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꼴로 황제의 사자를 맞이하러 나가고 있는 셈이었지만 릴리엔은 의외로 태평했다.

“괜찮지 않을까요. 당사자도 아니신데.”

너무 곱게 말을 들으면 이쪽을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저 정도 반항은 하는 게 괜찮을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두 사람이 상반된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안쪽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테오였다.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마테오는 일단 릴리에에게 목례로 알은척을 했다. 그리고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다미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존모하옵는 이 제국의 대공 전하이자 친애하는 제 삼촌께서는 대체 지금 이게 무슨 꼴이시랍니까?”

“황제의 칙사를 맞이하러 가는 중이다.”

"예? 칙사요?”

“네, 제게 황명이 하달되었다고 합니다.”

릴리에에게 황명이 하달되었다.

는 말에 대번 마테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도 가겠습니다.”

다미언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세 사람은 곧이어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응접실 앞에서 있던 엘런 총관이 이쪽, 정확히는 마테오를 발견하고는 몹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 전하께서도 오십니까.”

“안에 누가 있나?”

“타우린 백작이 와 있습니다.

저.."

그때 응접실 안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에잇! 건방진 연놈 같으니!

대체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칙사인 나를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 둘 셈이란 말인가!”

허?

다미언의 입가에 비딱한 미소가지어졌다. 그가 총관에게 고갯짓으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총관은 망설이는 눈치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건방진 놈이 납셨느니라.”

“…… 으허어억!”

황제 직속 수도 방위 기사단의 정복을 차려 입은 기사 둘과 칙사가 있었다.

칙사, 타우린 백작은 화려한 옷을 입고 금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 저, 저, 전, 전하?”

“인사 안 하는가? 여기 내 비와 태자 전하도 와 있는데?”

"타, 타우린의 백작 슈미트가지엄하신 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와 비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방금 들으신 말은 정말 다 오해입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건방진 연놈'이라는 건 내 비와 나를 싸잡아서 이른 말인가?”

타우린 백작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때 뒤에서 존재감 없이 서 있던 기사가 나섰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하지만 타우린 백작은 칙사 자격으로 오신 겁니다.”

더티 블론드에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다 미언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좁혔다. 이것 봐라?

“오랜만이군?”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러게. 경의 집안 전체가 배신자가 된 이후로 거의 처음인 것 같군, 블란쳇 소공작.”

다미언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릴리엔은 조금 놀랐다.

'블란쳇이라면……. 레이디 마리 앤의 오라버니인가.'

예의 소로리티 사건 이후 블란 쳇 공작가는 황제파로 돌아섰다.

선제후의 위상이 높아지는 걸 경계하고 있는 황제는 몇몇 공작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블란쳇 공작이었다.

바로 그때.

“에단 슈미트, 네가 여길 어떻게?”

마테오의 두 눈이 분노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왔냐고 방법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냐는 추궁이었다.

“전하, 저는…….”

“하!”

에단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마테오는 크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우연히 예상 밖의 분위기에 약간 놀란 릴리엔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