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73화 (73/155)

73화.

'젠장.’

못 보일 꼴을 보였다. 소년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저, 저런!”

타우린 백작이 응접실을 떠나는 마테오를 보며 기가 막혀 했다.

"황제의 칙명 앞에서 무례하시군요! 대체 태자 전하를 어떻게 교육하고 계시길래…….”

“자네는 교육을 잘 받아서 나와 내 비를 연놈으로 싸잡았나?”

"윽.”

지은 죄를 깜빡 잊었던 타우린 백작은 다시 찔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쨌든 잊을 뻔했던 얼굴을 다 보여 주시고, 둘째 형님께서 세심하시군.”

"전하, 칙명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 피차 껄끄러우니 빨리하지.”

에단 슈미트가 타우린 백작에게 눈치를 주자 타우린 백작이 허겁지겁 금빛 두루마리를 펼쳤다.

“비전하께서는 이리로 오십시오.”

다미언의 뺨이 순간 불쾌한 듯 꿈틀거렸지만 릴리에이 그의 팔꿈치를 잠깐 잡자 곧 얌전해졌다.

릴리엔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 루펜바인의 금빛 광휘, 존귀한 자이며 만인을 다스리는 권리가 있는 나 클로드 글라디올 에젝 로가디스 루펜바인 1세는 튜린의 릴리엔을 발미에라를 다스리는 대공 다미언의 적법한 부인으로 인지하여 선황의 유지에 따라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칭호를 인정하는 바이다.”

타우린 백작이 두루마리를 도로 말았다. 그리고 극도로 긴장해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비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받으시지요.”

붉은 비로드 쿠션에 받쳐 온 하사품은 티아라였다. 진주로 된 띠에 첨탑 같은 다섯 봉우리가 있고 그 위에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오각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결혼을 축하하며 '공주의 별'을 보내셨습니다."

황제국에서 황태자보다 높은 의전 서열을 가진 그녀에게 굳이 공주관(Princess's Tiara)을 보냈다.

클로드 1세는 선황 암살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였으며 자신은 언제까지나 선황의 유지를 받들 신성한 의무감을 느껴 황위를 이어 받은 거라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황이 각종 공문서로 보증한 임페라트릭스 칭호를 안 주겠다고 뻐길 수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거였다.

하지만 릴리엔은 딱히 무섭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그저 클로드 1세는 불쾌감을 표현하는데도 이런 거금을 쓰는구나, 하고 납득할 뿐이었다.

“성은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대공비가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태연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타우린 백작은 약간 놀랐다.

오히려 하사품을 건네는 에단 슈미트의 표정이 훨씬 불편해 보였다.

릴리에도 의아함을 느꼈다.

'왜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언뜻 화난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눈빛이 조금 슬퍼 보였다.

다미언이 물었다.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건가?”

“……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다들 썩 물러가게.

이대로 있다가는 교육을 잘못 받은 태자 전하께서 에단 슈미트경의 얼굴에 주먹을 먹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순간 에단의 표정에 욱신 하고 괴로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기분이 상한 타우린 백작이 “실례했습니다. 가자!" 하고 외친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대화의 개회 날짜가 선포되었다.

이미 수도에 올라와 있던 각 가정에 다시 한번 정식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황도 동쪽 지구에 빈민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한 시적으로 세워졌고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황제의 마차가 대로를 다니며 기념주화를 뿌렸다.

물론 마차만 황제의 소유였고 그 안에는 동전을 뿌리는 역할을 맡은 시종들뿐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반응은 진짜 황제를 알현한 것처럼 열광적이었다.

화의 참석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 역시 거의 수도에 도착했다.

릴리엔은 〈은방울꽃 소로리티〉동기들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도 하니 동기들을 초대하고 싶었어요. 결혼식 때 참석해 준 답례도 해야 하고.”

무릎 사이에 릴리엔을 앉힌 다 미언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야지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본격적으로 안주인 노릇을 시작한 릴리엔은 대단히 바빠졌다. 게다가……

'요즘 들어 묘하게 나를 피하고 있지.’

사실 딱히 요즘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 릴리엔을 만나고 벼락 치듯 했던 청혼부터 시작해서 릴리에에게 치대고 매달리는 쪽은 언제나 다미언이었다.

매달리는 사람이 되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짓이었지만 재미있는 측면도 많았다.

릴리엔이 곤란해하거나 놀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거나 그에게 따라 주는 게 좋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하고 몰랐던 스스로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물론 아이반이 그걸 지적하거나 놀리는 건 참아 주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그를 봐 온 사람들, 엘런 총관과 모린 부인도 말했다.

“전하께서 저렇게 좋은 분을 만나신 걸 알면 선황 폐하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셨을 겁니다.”

“생전에 비전하를 만날 수 있었다면 아주 잘해 주셨을 거예요.”

다미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형이란 사람은 클로드 같은 작자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었으니까.

늘 훌쩍 떠날 것처럼 성기게 굴던 막냇동생이 데려온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릴리엔을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더 릴리엔에게 속수무책이고, 빤히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마음이 절절 끓고 그런 건 다 괜찮았다. 좋았다.

다미언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품 안에 반쯤 안기다시피한 상태로도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조금이라도 그와 떨어지려고 하는 릴리엔을 끌어당겼다.

“전하.”

아니나 다를까, 릴리에이 대번 난처한 기색을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잘 몰랐다. 그때는 사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릴리에 이슬라르가 너무 좋아서, 손만 닿아도 울 것 같아서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미언은 생각했다. 만약 릴리 엔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의 고통을 지워 줄 수 있었더라도 그렇게 좋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처음에는 릴리에이 그를 좀 피하거나, 접촉을 시도할 때 당황해 머뭇거려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아직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니 정숙한 아가씨로서는 당황스럽겠지.

게다가 사랑하는 오빠가 도끼눈을 뜨고 있으니 조심하려는 거겠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구슬리면 나아질 줄 알았다. 릴리엔은 진지한 성격이었고 다미언을 남편으로 받아들였으니, 결혼을 해서 공식적인 부부 사이가 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끌어당기는 대로 안겨서 얌전히 마력을 받고는 있지만 릴리엔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긴장한 사슴 같았다. 아마 다미언이 조금 틈이라도 주면 후다닥 달아나고 말 것이다.

젠장.

서운하고 섭섭했다.

마음의 크기가 다른 건 괜찮았다. 불공평한 관계도 괜찮다. 하지만 릴리엔이 그를 거절하거나 피하는 것만큼은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제 곧 손님들이 오실 거예요.”

알고 있다. 소로리티 이야기를 꺼낸 것도 다 저 말을 하기 위해서였겠지.

“조금만 더요.”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안 충분합니다. 요즘 들어 비께선 유독 몸이 안 좋아지셨잖습니까.”

릴리엔은 안 해도 되는 일을 끌어다가 하는 건 물론, 마테오에게도 충분히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

덕분에 다미언에게 할애할 시간이 줄어든 건 물론이요, 원체도 좋지 못한 건강 상태가 아슬아슬해지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기절해서 제 발로 이 저택에 입성하지도 못한 릴리엔과 첫 만남을 가진 모린 부인이나 총관 같은 경우는 릴리에이 그냥 원래 유약한가 보다, 하고 말았지만 다미언은 알 수 있었다.

밤에 몰래 침상에 숨어들어 껴안은 릴리엔의 유달리 뜨거운 체온과 숨결에서.

마력을 나눠준다는 핑계를 대야 겨우 잡아 볼 수 있는 손에 물든 잉크 자국에서.

틈을 노려 간신히 입을 맞출 때 느껴지는 까칠한 감촉에서.

단정한 얼굴로 잘 감추고 있지만 릴리엔은 한계에 몰리고 있었다.

“남편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

얼레?

가볍게 웃으면서 ‘그런 게 아니라.’든가 하여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릴리에이 의외로 얌전했다. 아니, 이상할 정도로 굳어져서 침묵하고 있었다.

“주의…… 하겠습니다, 전하."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간신히 되돌아왔다.

일단 내색하지 않고 릴리엔의 몸에 부드럽게 마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하얀 뒷목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상한데?'

날카로운 예감이 작동했다. 릴리엔은 그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