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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74화 (74/155)

74화.

* * *

의표를 찔려 버린 릴리엔은 결국 남은 시간 동안 다미언의 품에 안겨 그가 주는 대로 함빡 마력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잔뜩 물을 줘서 축축한 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잎이며 꽃잎이 잔뜩 젖어 녹진해진 꽃 같은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요즘은 마력을 받는 데도 익숙해져서, 나른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몸 상태가 즉각 좋아지기는 했지만…….

전달받는 동안 계속적으로 스킨 십이 이뤄져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이 시간이 싫지는 않았지만 벅찼다.

언젠가는 멍하니 안겨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이 될 수도 있겠구나.'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가끔씩은 그게 기다려질 때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난감해하면서도 다미언이 다가올 때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발끝이 찌릿했다.

마지못해 안기면서도 사실은 기대고 싶었다.

내가 미쳤지. 릴리엔은 고개를 저어 불순한 기대감을 털어 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치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래도 다미언에게는 이 과정이 스킨십 이전에 인명 구조 활동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다행히 지금은 정신을 딴 데로 돌릴 수 있었다. 릴리엔은 최대한 빠른 발걸음으로 손님들이 모여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비전하!”

“모두 오랜만이에요. 제가 늦었지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서

“어머, 괜찮아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저희가 눈치가 없었는걸요.”

"......?"

릴리엔은 어리둥절해져서 키득거리는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남을 비웃거나 괴롭히는 걸 싫어하는 소피아마저도 얼굴이 붉어진채 릴리엔을 흘긋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금슬이 좋으시다니 저희도 참기쁘지 뭐예요.”

아.

릴리엔은 그제야 이 사람들이 무슨 오해들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가씨들

"아니시라고요?”

뤼슬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추궁했다.

“숨기지 마세요, 비전하. 저희는 이미 들었답니다. 시녀장께서 분명 ‘비전하께서는 지금 대공 전하께 잠시 붙잡혀 계십니다. 죄송합니다만 양해를 구할게요.'라고......."

“예?”

“어머, 설마 시녀장께서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대공 전하께서 이 한창 바쁠낮 시간에 굳이 집에 계신 것도, 비전하께서는 그런 대공 전하께 ‘붙잡혀’ 계시다 오신 것도 사실인 거지요?”

'붙잡혀’라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강세가 들어가 있는 게 찝찝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건…… 맞지만…….”

“꺄아악! 그것 봐요!"

“세상에, 어쩜 좋아!"

어쩜 좋을 게 뭐란 말인가. 릴리엔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다들 꺅꺅거리며 즐겁게 비명을 지르느라 릴리엔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일라시아도 미소를 지으며 너그러운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착한 소피아만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정말 잘 됐어요, 비전하. 대공전하께서 비전하를 아끼신다니 제 마음도 흔흔하네요."

“부러워요, 비전하."

“저희 시샘이나 놀림 정도는 좀 받아 주세요.”

“그래요, 한창 때의 아가씨들이라 다들 이런 데 관심이 아주 지대하답니다.”

너무 빨리 아이가 생기면 자주 얼굴을 못 본다며 삐죽대던 솔라 리아마저도 이렇게 말했다.

"이왕 결혼을 하셨다면 사랑을 받는 게 좋긴 하죠. 뭐, 우리 비전하께서는 사랑받으실 만한 분이니 당연하기도 하고요.”

“아니…….”

이런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어 당황한 릴리에만 빼놓고 아주 즐겁고 신이 나서 난리들이 아니었다.

“일단 다들 진정하세요. 차를 올릴게요.”

릴리엔은 분위기 전환이 되길 바라며 설렁줄을 당겼다. 곧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준비된 차와 간식거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와아.”

"티 파티라더니, 이건 간식 파티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허약한 대공비가 과일과 간식이라면 그래도 좀 먹는다는 걸 터득한 뒤로, 저택의 요리사는 디저트 만드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오늘은 딸기와 잼, 크림을 겹겹이 올린 스펀지케이크가 메인이었다. 거기에 박하 잎을 넣은 레몬에이드, 달걀을 넣은 부드러운 샌드위치, 잼을 넣은 쿠키와 초콜릿까지.

“세상에, 확실히 알트 해의 여주인께서 내주시는 초콜릿은 질이 다르네요.”

“이 차 너무 맛있어요!”

시녀인 리타로부터 릴리에이 차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린 부인은 몇몇 사용인들에게 맛있게 차를 내리도록 특훈을 시켰다.

맛은 뭐 당연히, 릴리에이 내려준 차를 먹어 본 사람이라면 감격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맛이 났다.

상황은 릴리에이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아가씨들은 올망졸망한 간식에 곧바로 마음을 빼앗겼다.

“티 파티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네요.”

“저도 집에서 차하고 과자를 같이 먹은 적은 있지만 다 같이 모여서 간식을 많이 차려 놓고 있으니까 기분이 정말 달라요. 정말 딱 저희만의 파티잖아요.”

“그러게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적령기 아가씨들 사이에 신혼인 새 신부가 끼어 있는 만큼 대화는 다시 결혼에 대한 주제로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소피아, 결국 그 백작님과 약혼을 하셨다고요.”

“아, 아직 약혼을 한 건 아니에요.”

“어머, 하지만 허혼서를 보내셨다면서요. 그럼 결정이 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백작님이 잘해 주세요?”

“청혼 받으셨을 땐 어땠어요?

자세히 얘기 좀 해 주세요.”

릴리엔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저도 듣고 싶네요. 아시다시피 그날 제가 좀 바빴잖아요.”

결국 소피아는 재촉을 이기다 못해 털어놓았다.

“별,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연회장에서 누군가 술을 주셔서 마셨는데…… 속이 좀 안 좋아서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백작님하고 마주쳤어요.”

"어머 세상에, 정원에서 단둘이요?”

"아, 아니, 그런 상황은 아니었어요! 단둘도 아니었고요."

“단둘이 아니었다고요?"

뤼슬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소피아가 귀여워서 더 그런다는 걸 소피아만 빼고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나온 지얼마 안 돼서 다른 분들이 오셨는데…… 저기 그분들이 좀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고 계셨는 데…… 저희가 먼저 와 있다는 걸 못 보시는 바람에…….”

꺄악! 아가씨들 사이에 다시 한번 비명 같은 환호성이 일었다.

"어머! 어쩜 좋아. 밀회 중이셨나 봐!”

“혹시 누군지 보셨어요?”

“누, 누군지는 못 봤어요! 봐서도 안 되고요!”

소피아가 울상을 지으며 설명했다. 일라시아가 “자, 자” 하고 분위기를 정리했다.

“다들 조용히 하기로 해요. 연회장에서 밀회하는 커플 한두 번 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요, 지금은 소피아 커플의 이야기가 중요하죠.”

다시 소피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백작님하고 둘이서 숨어 있었어요. 그냥 그랬을 뿐인데 갑자기 다음날 청혼을 하셔서 저도 사실 너무 놀랐어요.”

소피아만 빼고 다들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소피아가 얼마나 귀여워 보였을까.

“백작님의 결단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저라도 마음이 급했을 것 같아요.”

“그래요, 누가 채가기 전에 내가 낚아채야죠.”

“어머, 재빨리 낚아챈다고 하면 사실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잖아요?”

"어째서 또 얘기가 그 쪽으로 가나요…….”

릴리에이 난감해하자 아가씨들이 까르르 웃었다.

“너무 보기 좋아서 그렇죠, 뭐.”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비전하."

모임에서 솔라리아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아가씨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은 혹시 처음부터 연인 사이셨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연인이 아니라는 말은다들 안 들어줄 태세였다.

옆에서 뤼슬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셨어요?”

“사실 저희 어머니께서 늘 그러셨거든요. 정략결혼을 해도 충분히 좋은 부부가 될 수도 있다고요.”

“아, 그거.”

“많이 듣죠, 그런 이야기.”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정략결혼을 한 상태로 뒤늦게 사랑에 빠진다.

귀족 아가씨들에게는 거지 소녀와 왕자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보다 이쪽이 훨씬 더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내 사촌의 친구가 말인데.” 하고 언젠가 일어났던 이야기로 전해지는 법 아니던가.

워낙 재혼에 불륜에 파혼이 성행하는 세상이다 보니 아가씨들은 더욱 더 그런 이야기에 목말라했다.

“비전하나 소피아가 부러워요."

“그러게요.”

릴리엔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서 웃기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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