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75화 (75/155)

즐거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소로리티 동기들이 돌아간 후 릴리엔은 다시 서재로 향했다.

화의를 치를 준비와 월동 준비로 아주 바빴다. 다행히 모린 부인이 아주 협조적이었고 릴리에은 이런 일을 처음 해 본 사람 같지 않았던 덕에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필요한 물건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군요.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 조달하면 될 것 같아요.”

"예, 그렇습니다.”

온갖 피륙과 식료품을 그득하게 쌓아 놓은 창고를 떠올리며 모린 부인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찾으셨던 사용인 명부입니다.”

“아, 고마워요.”

사용인들의 업무 분담과 고용 내용은 집안마다 각자의 규칙이 존재한다.

모린 부인은 약간 긴장한 태도로 현재의 운영 상황, 고용 규모와 업무 분장에 대해 정직하게 보고를 올렸다.

"내용 자체는 전에 말씀드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비전하께서 보시기에 비합리적이거나 씀씀이가 허황된 부분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곧장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마음이야 고맙지만 릴리엔은 자기한테 그럴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길어야 5년 안에 손을 뗄 살림에 이것저것 손을 대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부인의 일처리가 원만해서 언뜻 보기에 손 댈 부분이 없는 걸요. 다만…….”

다만? 모린 부인은 지시사항을 귀담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사용인들에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지 파악해서 신경을 좀 써 주는 게 좋겠어요.”

“비전하."

모린 부인이 순간적으로 난색을 표했다.

“비전하께서는 이미 너그러운 주인이십니다. 이 이상 온정을 베푸시는 것도 제가 보기엔 약간 도를 지나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온정이 아니에요. 알다시피 지금은 시기가 좋질 못하잖아요.”

"......”

“믿을 만한 사람도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쉽게 믿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돼요.

제 말은 취약한 부분을 미리 파악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예방하자는 차원이니까, 그렇게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모린 부인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릴리에이 이 저택에 도착한 첫날 몹시 실망했던 기억은 이미 오래전에 잊혀졌다.

'우리 태자께서 헛말을 하실 분은 아니신데. 기대하라는 말씀을 믿어 볼 걸 그랬어.'

그 순간 부인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비전하, 오늘은 이 모린이 전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무언가요?”

모린 부인이 내민 것은 열쇠 꾸러미였다. 동그란 고리에 각 실의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그동안은 불가피하게 제가 보관해 두고 있었지만 사실은 원래 집 안의 열쇠는 안주인의 수중에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아니요, 제 생각에는 부인께서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가주의 방이나 안주인의 방, 금고 열쇠나 마스터키 같은 중요한 열쇠는 다미언이나 총관에게 있을 터였다.

그래도 저 열쇠 꾸러미의 행방은 가내 살림의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베테랑 시녀장과 타지에서 시집 온 새신부가 열쇠를 두고기싸움을 하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걸 먼저 양보하려는 모린 부인의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릴리엔은 스스로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도 잘 보관해서 써야 할 때에만 사용해 주셨으니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믿어요.”

“비전하…….”

모린 부인이 감동을 받은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입술을 꾹 오므렸다.

릴리엔은 일부러 서류 쪽으로 시선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몸이 약해서, 요. 그런 무거운 걸 들고 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예, 예.”

모린 부인이 훌쩍이며 눈가를 훔치고 대답했다.

“그러시다면야 이 모린이 기꺼이 전하의 신뢰에 부응해야지요.”

바로 그때였다. 가지런한 노크소리가 입실을 알렸다.

“비전하, 엘런입니다.”

“들어오세요.”

총관이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모린 부인이 기겁했다.

“세상에나, 엘런! 대체 그 꼴이다 뭐예요!”

매일 칼 같이 정장을 갖춰 입던 노신사가 소매를 둘둘 걷은 셔츠차림에 두꺼운 광목으로 만든 앞치마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 깃털은 뭐예요! 어디서 닭이라도 잡으셨어요? 잠깐, 비전하께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리 말 안 해도 안 들어가요.

그리고 잡은 건 닭이 아니라 오리요.”

“네?”

“겨울이 오니 비전하께서 영 맥을 못 추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

그제야 모린 부인은 총관이 굳이 저런 모습으로 릴리엔을 찾아온 이유를 눈치챘다.

"아이고, 점잖으신 양반께서 그런 꼴로 오리까지 직접 잡으셨는 데, 암요. 당연히 비전하께서도 성의를 봐 주시겠죠. 뭘 그런 걱정을 다 하고 그러세요.”

“허허, 나이가 드니 괜한 걱정이 늘어서 말이지요.”

다미언과 동침 아닌 동침을 들킨 이후로, 릴리엔의 예상대로 두 사람의 기대치와 상상력은 후 계자 생산에 대한 사안으로까지 넘어간 것 같았다.

다만, 릴리엔이 병약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중한 두 사람은 섣불리 말로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릴리엔의 건강을 극진하게 보필하기 시작했다.

'난감하군.'

호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릴리엔이 어떻게 해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은 5년. 어쩌면 그 안에 릴리엔과 다미언의 사이가 보다 부부다워져서 아이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과연 생명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몸으로 임신이 가능할지.

원래도 난산으로 어렵게 아들 하나만 낳을 수 있었던 몸이었다. 릴리엔은 추측했다.

'지금은 아무래도 불임에 가깝지 않을까.'

릴리엔은 최대 5년짜리 시한부대공비였다. 그들이 기대하는 후계자를 낳아 줄 가능성도 거의 없는.

그게 현재 릴리엔의 현실이었다.

"정성은 고맙습니다만….”

입을 연 순간, 릴리엔은 갑자기 코 안쪽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요 며칠간 익숙해진 코피의 전조였다. 릴리에이 리타를 쳐다보았다.

“비전하, 낮잠 주무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눈치 빠른 리타가 끼어들자 총관과 모린 부인이 피곤하신데 오래 붙잡았다며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릴리엔은 코 아래쪽을 얼른 싸쥐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뜨끈한 피가 흘러내렸다.

“아가씨, 여기.”

정신없이 코 밑에 수건을 댔다.

리타가 지혈을 시도했다.

“아프구나.”

"피가 잘 멎지 않아서요."

30분이 넘게 수건 두 장을 얼룩덜룩 적시고 나서야 간신히 상황이 끝났다. 릴리엔은 기진맥진해서 의자에 쓰러져 있다시피 했다.

리타가 약연을 물려 주기는 했지만 호흡을 깊이 하기 힘들어 제대로 피우지도 못했다.

"아가씨, 제가 보기엔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냥 세드릭 님께 알리시는 게.”

고개를 저을 기력도 없는 릴리 엔은 잠자코 인상만 찌푸렸다.

“아니면 차라리 일의 양이라도 줄이시죠.”

대공비이자 안주인으로서 릴리 엔이 떠맡고 있는 일의 양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다미언은 대공이자 선제후였다.

발미에라와 헤멘린나와 팔미앵의 영주인 동시에 알트 해의 해군함대와 무역선까지 그의 책임하에 놓여 있었다.

다미언이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본인 재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뭐든지 대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머리와 일 욕심을 둘 다 갖춘 대공비가 나타났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럴 만한 지식이 있지도 않았다.

릴리엔은 그저 아이반을 필두로한 가신들이 안쓰러워 한두 번 옆에서 조언을 하거나 그들 대신 다미언의 결정을 촉구해 주었을 뿐이다. 정 시간이 없을 때는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다 보니 어느새 다미언 휘하 각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열화와 같은 성원은 더 많은 일거리가 되어 돌아왔다. 리타는 생각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데?’

그러고 보면 스스로 불러들인 일거리에 둘러싸여 압사하기 직전이 됐던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 사람도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하, 세상에. 어쩜 저렇게 오누이가 똑같을 수가.

“아가씨는 정말 세드릭 님의 동생이 확실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너와 알렌 경을 보면서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내게 하는구나.”

“그런 끔찍한 소리는 제발."

릴리엔은 작게 웃으며 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세드릭의 판박이. 다만 릴리엔에게는 그녀를 말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릴리에도 알고는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맹의 증거이자 인질로서 살아간다면 편하기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총관과 모린 부인도 그녀에게 실망하고 관심을 거둘지도 모른다.

겨우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정이 들 대로 드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릴리엔은 도무지 완전히 포기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어?'

남겨진 시간이 적은 만큼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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