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다미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생각보다 제대로 된, 아니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예전의 릴리에 이슬라르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열병을 앓은 후 릴리엔은 변했다. 튜린의 딸로서, 대공의 정혼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보였다. 아프고 모자란 몸을 이끌어 죽음의 위기를 뚫고 다미언을 구해 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세드릭은 그녀를 끔찍할 정도로 귀애한다.
하지만 과연 릴리에이 변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였다면 어땠을까?
다미언 루펜바인은 릴리엔을 대공비로서 대우한다. 무관심하기 는커녕 그녀에게 치대는 횟수가 늘어 곤란할 지경이었다.
사랑까지는 아니겠지만 아내로서 릴리에에게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릴리에도 솔직히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하기로한 남자가 잘해 주는 걸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릴리에이 지금 하고 있는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무기력하게 아프기만 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시험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릴리엔은 그 결과를 미리 들여다보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끝까지 쓸모 있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다가 죽고 싶어.'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왠지 머릿속에 이상하게 다미언만이 떠올랐다.
다정한 손길과 나른하게 내쉬던 한숨, 비밀스럽게 빛나던 보랏빛 눈동자 같은 것들이.
소로리티 동기들이 한참 동안 즐겁게 나누었던 “내 지인의 지인들이 행복한 정략결혼을 한 이야기.”가 동시에 떠올랐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사랑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그래, 이런 식으로도 사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작 5년짜리 시한부. 릴리엔은 누군가와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주고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잠시만, 아주 조금만 내가 있을 자리를 허락해 줘.
사랑하거나 사랑받지는 않을게.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사람, 그 정도만 차지하다 얌전히 죽을 테니까.
그것만은 빼앗아 가지 마.
‘달라졌다고, 달라질 거라고 다 짐했는데. 여전히 지독하게 이기적이구나, 나는.'
생명력을 잃어 가는 몸은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것처럼 서서히 움츠러들고 있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토해 내니 자연 먹는 양이 줄었다.
그런 상태에서 툭하면 피를 흘리니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자연스럽게 잠이 늘었다. 눈이 가물가물하게 감기기 시작했다.
"아가씨?”
조금만 쉴게.”
릴리엔은 지금 이 순간, 아주 잠시만 괴로운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잠들면 아무도 들여서는 안 돼…….”
아주 잠시만.
* * *
아주 잠시만 쉬겠다는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릴리엔은 결국 저녁 식사 자리에 불참하고 말았다.
비어 있는 자리 앞의 스튜가 싸늘히 식어 갔다. 그때 릴리엔의상태를 물어보러 갔던 시종이 돌아왔다.
다미언이 물었다.
“비는 어떤가?”
“저어, 깊게 잠드셔서 내일까지 내쳐 주무실 것 같다고 하십니다.”
“....."
다미언이 느리게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요리에 손도 대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한술이라도 드시라고 권하기도 어려운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다미언이 마침내 무릎 위의 냅킨을 걷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에게 가 보아야겠다.”
그러나 다미언의 방문은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지금은 비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리타라고 했었나. 붉은 머리의 시녀가 그의 비에게 몹시 충성스럽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헤이워스 양, 나는 내 비의 남편인데.”
“비께서는 '아무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비께서 결혼 증서에 서명하고 남은 평생을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한 남편도 그 '아무도'에 속한다고 말했나?"
그렇게 적시하셨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아무도라고 말하실 때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다미언은 고작 그까짓 말에 싸잡히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몹시 서운했다.
“그건 헤이워스 양의 생각이지.
내가 직접 비에게 물어볼 테니 비켜라.”
“대답하실 상태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봐야지.
나는 비의 남편이다. 잠시 낮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식사를 거르고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할 상태인데 나를 '아무나'라고 막아?”
“비에게는 내가 필요해.”
다미언 루펜바인이 매달릴 수 있는 건 그 사실뿐이었다.
밀어내고 거부하고, 릴리에이 그를 싫어하더라도 그는 릴리에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그 사실 하나가 다미언을 지탱하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고지식한 리타도 그 말에는 납득했는지 옆으로 비켜섰다.
다미언은 문고리를 잡았다. 성질 같아서는 벌컥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그 안에는 그의 비가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도를 낮춘 어둑어둑한 방안에 희미한 약초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다미언은 릴리엔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줄을 당기니 반투명한 커튼이 사락 하고 걷혔다.
릴리엔은 모로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봤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그토록 화가 났던 마음이 금세 누그러졌다.
“릴리…….”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릴리엔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응…….”
릴리에이 예민하게 눈을 떴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작은 일도 힘에 겨운지 표정이 괴로워 보였다.
애가 끓었다. 안타깝고 답답하고 사랑스럽고 속이 상해서 다미언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릴리에의 뺨에 안타깝게 입술을 댔다.
“……전하?”
익숙하게 밀려오는 마력에 릴리 엔이 약간 기력을 차렸다.
릴리에의 눈에 빛이 돌아온 걸 확인한 다미언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눈이 마주쳤다. 다미언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릴리엔의 손을 끌어당겨 도드라진 손등 뼈 위로 잘게 입을 맞췄다.
요동치는 감정에 날뛰던 마력이 안정을 찾았다. 죄듯 아프던 두통과 홧홧한 작열감이 사그라들었다.
다미언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마른 손에 뺨을 비비자 릴리에이 무심결인 듯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정신이 좀 들어요?”
“네, 지금 몇 시…….”
중얼거리던 릴리에이 화들짝 놀랐다.
“전하, 여길 어떻게…….”
다미언은 담담히 웃었다. 그 역시 '아무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확인이다. 마음이 시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저는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왔습니다.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 좀 지났어요.”
“아…….”
릴리엔이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보다 눈빛이 더 명료해져 있었다.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 느낌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기력을 조금이나마 되찾는 모습을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원망 섞인 투정에 릴리에이 약간 웃었다.
“죄송해요. 그나저나 총관에게 오리 고기를 꼭 먹겠다고 약속했는데…….”
일어나려는 릴리엔을 제지하던 다미언은 그녀가 며칠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음식은 준비되었어요. 여기서라도 먹겠다고 하면 총관이 좋아할 것 같긴 한데.”
현기증을 견디느라 눈을 꾹 감고 있던 릴리에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타를 불러 주시겠어요?”
또 안 예쁜 소리. 예쁜 입술이 정신만 차렸다 하면 저렇게 곱지 않은 말만 한다.
“가끔은 시녀에게도 휴가를 좀 줘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섬기며 다미언이 릴리에의 허리 아래 베개를 받쳐 주었다.
남 시중드는 거라곤 조금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릴리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어느새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
“고맙습니다, 전하."
“뭘요…….”
사사건건 너무 감사하지 말라고 하려던 다미언의 눈에 릴리엔의 소매에 묻은 자국이 보였다.
방 안이 어두워 검게 보이는 갈색 얼룩.
언뜻 보면 잉크가 묻었겠구나 싶게 아주 작은 얼룩이었지만 전장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던 다미언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피.’
핏자국이다. 그것도 묻은 지 얼마 안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