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77화 (77/155)

77화.

숨을 잠시 멈췄다. 다미언은 순간적으로 릴리에의 손가락을 살폈다.

사무 일을 보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다치는 게 손이었다. 사실 그밖에 다칠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입도 맞춰 본 릴리엔의 손은 아주 깨끗했다.

페이퍼 나이프에 베이거나 날카로운 펜촉에 찔린 자국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피는……

“전하?”

릴리엔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미언은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엘런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올 테니까.”

“좋은 소식까지는……."

"다시 잠들면 안 돼요.”

릴리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선 다미언의 입가에는 느슨하게 맺혔던 미소가 사라졌다.

아까 느꼈던 불길한 기시감이 종처럼 머리를 울렸다.

릴리엔은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저 핏자국은 그 비밀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엘런, 비께서 식사를 하신다고 하니 스튜를 데워서 올려라. 그리고…….”

"네, 전하.”

“……비의 오라비에게 편지를 해야겠다.”

릴리에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다미언을 ‘아무나’로 취급하며 방에 들어오는 것까지 막는 이유라면…….

다미언은 알아야 했다.

* * *

다미언 루펜바인은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비가 내게 비밀로 할 만한 사항이라면 건강 문제 정도가 아닐까. 그 사람 성격에.’

병이 있고, 그 병을 옮기거나 들키게 될까 봐 나를 밀어 내는 게 아닐까.

한번 위화감을 자각하자마자 그는 단숨에 여기까지 추측해 냈다.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아예 병을 숨기려고 하는 거라면…….’

아니, 아닐 거다. 다미언은 불길한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치료를 안 받고 있다는 건 비약이다. 릴리엔은 난감해하긴 했지만 다미언이 마력을 준다고 할 때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올 때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의사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 의사가 돌아가기 전에 비를 한 번 진료하고 약을 처방했다고 했다. 아마 세드릭이 화의에 올라올 때 신뢰받는 주치의인 의사도 황도에 함께 올 것이다.

몸이 아프다는 걸 밝히지 않은 건, 그냥 그를 신뢰하지 못해서 그런 걸 거다. 그래서 그에게 알리지 않고, 더 신뢰하는 친정 가문의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는 것일 거다.

다미언은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인 설명을 짜 맞춰 봐도 마음을 불쑥불쑥 자극하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다미언은 일필휘지로 편지를 휘갈겼다.

비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 기특한 성격인 비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한다. 아마 친정에도 알리지 않았을 듯하여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오는 일정을 앞당겨 비가 신뢰하는 의사를 좀 더 빨리 데리고와 줄 수 없는지 그리고 비의 건강을 위해 마력을 공여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남을 배려할 줄밖에 모르는 비를 대신해서 알려 주시길 바란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완성하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마음이 급하던지. 다미언은 봉랍을 열이 오른 엄지로 눌러 직접 녹였다. 급하게 인장을 찍자마자 왁스가 마르기도 전에 아이반에게 건네주었다.

“인편으로 보내지 말고 매를 날려라.”

“알겠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열이 오른 손가락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릴리에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으켜서 앉혀 줄 때, 불안해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난처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빨리 나가 주지 않으려나, 기대하던 푸른 눈동자.

아마 지금 가도 반겨 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거다. 뭔가를 숨기고 있으니 다미언의 존재를 부담스럽게만 여길 가능성이 컸다.

다미언도 사람인지라 거절이 아팠다. 물론 다른 사람이 그를 거절하는 건 전혀 간지럽지도 않았지만 그런 만큼 릴리에의 거절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치명적이었다.

뼈가 꺾이는 듯 아팠다.

좀 더 착하고 정상적인 남자였다면 이쯤에서 릴리엔을 자유롭고 편하게 놓아 줬을지도 모른다.

미안하게도 다미언 루펜바인은 그런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

* * *

다음날 저녁, 세드릭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글씨는 아름다웠지만 성정을 드러내듯 날카롭고 폭이 좁았다.

세드릭은 “성급한 결혼의 폐해” 라는 말로 시작해서 릴리엔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다미언을 질책했다.

[그 아이의 기특한 성정을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하늘에서 이 사람을 가엾게 여겨 보낸 선물 같았던 아이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자기 몸만은 돌볼 줄 모르는 그 아이를 귀중하게 아꼈습니다.]

넌 왜 알아서 그렇게 못하고 편지질이냐는 질책이었다. 그 뒤로는 다섯 줄 정도 릴리에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구절절 써 보냈다.

[……제가 전하께 이런 사실까지 죄다 알려 드려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통탄스럽기 그지없으나 내 병약한 누이의 평안함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네가 멍청해서 내 사랑하는 가엾고 기특한 누이가 행복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기세가 문자 하나하나에서 뚝뚝 떨어졌다.

다미언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접었다. 참고할 내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릴리엔의사소한 호불호, 예를 들어 그녀가 키위를 싫어한다는 것 같은 정보는 아주 유용해 보였으므로 그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없었다.

'답장의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자기 누이가 뭘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이군.'

우월감이 가슴을 스쳤지만 잠시였다. 세드릭보다 한 발 앞서 있긴 했지만 딱 그 한 발 뿐이지 않은가.

어쩌면 세드릭이 수도로 올라오면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숨기고 있는 그 비밀을 곧장 털어 놓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한 발 앞서 있는 것쯤이야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리겠지.

삐죽한 감정이 치솟았다.

전날 밤, 릴리엔은 과연 곤란한 얼굴로 다미언을 맞이했다. 다미언은 뻔뻔하게 굴며 릴리에에게 직접 스튜를 먹여 주려고 했다.

덕분에 릴리엔은 알아서 먹겠다고 한사코 거절한 게 미안해서 그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다미언의 계획 대로였으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전하!”

스튜 몇 술을 먹자마자 릴리에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뜨거운 걸 먹어서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여유를 가장하는 것마저 집어치우고 다미언은 곧장 릴리에에게 다가갔다.

고작해야 코피다. 피곤하면 쉽게 피를 흘릴 수 있다.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된 것만 같았고, 릴리에이 코피를 시작으로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공포가 덮쳐 올뿐이었다.

"비, 릴리, 잠시만, 제가……."

더듬거리면서도 다행히 다미언의 손은 착실히 응급조치를 시행했다. 릴리엔의 뒷목을 잡아 고개를 뒤로 꺾지 못하게 했고 코를 강한 힘으로 압박해 지혈을 시도했다.

다행히 피는 금방 멎긴 했다.

피에 젖은 수건을 리타에게 돌려주면서 다미언은 맥이 탁 풀려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전하, 전하?”

"……아. 예?”

다미언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릴리에이 멋쩍어하며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다미언은 좀 울고 싶었다, 그때.

"비, 그건 비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 됐습니다. 그저 대답해 주십시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서 이러는 겁니까?”

"날씨가 건조하면 자주 이래요.”

다미언의 날카로운 예감이 속삭였다. 저건 거짓말이야.

다미언은 누구보다도 릴리에의

“이렇게 놀라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 세드릭의 답장을 믿고 싶었다. 릴리에의 거절에 상처받고 예민해진 그가 과민 반응을 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릴리엔이 그를 거절하는 이유와 그녀의 건강 상태는 연관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도 별로 생각하고 싶은 가능성은 아니지만, 건강상태와는 별개로 그냥 그가 싫고 불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군.'

하지만 오늘도 다미언의 발걸음은 릴리엔의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도 이 성실한 사람이 또 서재로 나와서 일을 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렇게 할 일이 많으냐는 말에 아이반이 눈치를 보다 질끈 눈을 감고 아뢰었다.

“최근 전하 앞에 올라오는 서류가 묘하게 보기 편해지지 않았습니까?”

“......"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거 비전하께서 가르쳐 주신 겁니다.”

“뭐?”

“그것뿐만 아니라 장부 쓰는 법도 새로 다 가르쳐 주셨어요. 이미 기존 장부를 통합해서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 중입니다."

"아이반 아이작.”

“비전하께서 미력한 솜씨가 부끄럽다고 전하께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하더라도 비전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

“그래서 그 말을 들었나? 내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