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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78화 (78/155)

78화.

다미언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세가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아이반은 이 상황이 정말로 장난이 아님을 눈치챘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짓을 애초에 왜 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

처음에는 화가 났다. 하지만 곧 복잡한 감정이 차례대로 밀어 닥쳤다.

그를 신뢰하지도 않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릴리엔은 왜 이렇게 그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걸까.

총관도, 모린 부인도,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새로 오신 비전하께 죄다 마음을 빼앗겼다.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곁을 허락하는 것만 빼고 다 잘하는 완벽한 아내였다.

미치고 팔짝 뛰고 싶다가도 다 미언 보라고 예쁘게 정리해 둔 결재 서류를 보면 기특하고 예뻤다.

겉만 내주면, 곁만 내주면 좋겠는데.

왜 딱 하나 못하는 게 그거일까.

안 되겠다. 곁도 안 내주면 일도 못하게 해야겠다.

“전하? 여긴 어쩐…….”

"어쩐 일이긴요.”

이젠 이 정도 물음에는 크게 상처도 안 받는다. 젠장.

“비께서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불철주야 노력하시는데, 남편 된 도리로서 이런 모습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리 찾아왔답니다.”

“예?”

다미언이 씩 웃었다. 릴리에이 불길함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일단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다미언이 죽 릴리엔의 책상에 놓여 있는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다 옮겨라, 내 집무실로.”

“예, 알겠습니다.”

“네? 잠깐, 전하!

“저는 강압적인 남편보다 비를 존중하며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남편이 되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제 비께서 너무 기특하신 나머지 제게 할 말이 없으시다면, 글쎄요.”

다미언이 방긋 웃었다.

…… 어딘지 열 받은 티가 팍팍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저로서도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전쟁귀 시절 다미언은 상식을 뛰어넘는 전략으로도 유명했다.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들어간 사람들을 상대할 때, 그 바로 옆에 높은 산만큼 인공 둔덕을 쌓아서 다리를 놓고 성으로 직접 들어간다는 미친 짓을 감행해서 승리를 얻어낸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전하. 솔직히 제게 이러시는 것,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공가의 안주인이며 전하의 비입니다.”

이길 자신이 있었는데…

“저는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하의 비로서 그 책임을 다하게 해 주세요”

있었는데………, 제기랄.

릴리엔의 간절한 눈빛, 그리고

‘전하의 비로서 그 책임을 다하게 해 주세요.' 라는 애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미언이 당장 릴리엔을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런 줄도 모르고 릴리엔은 절박했고 두려웠다.

튜린의 릴리엔이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가주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릴리엔은 이제 아이가 아니었고 동맹에 대한 담보로서 타지에서 온 신부였다.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해.'

전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미언이 이토록 쉽게 릴리에이 맡은 일을 가져가는 게 릴리에에게는 마치 그녀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까지 수고했지만 다미언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안 된 걸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일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해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제발. 빼앗지 말아 주세요, 제발.

릴리에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다미언의 철옹성 같은 입술도 통제를 벗어났다.

“……한 시간씩.”

“예?”

“매일 저에게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 이상 마력을 받는다는 조건을 수락하신다면 하루 두 시간 정도 일을 처리하실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

전혀 뜻밖의 조건에 릴리엔은 멍해졌다. 다미언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 마력을 따지자면 비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키는 가장 좋은 약아닙니까.”

맞는 말인데 그 약을 먹는 방식이 문제였다.

릴리엔의 흔들리는 눈빛을 무시하고 다미언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순순히 약을 드신다고 약조하신다면야 두 시간 정도 대외 활동을 허락해 드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릴리엔은 망설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녀에게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다미언은 지금 그녀의 건강을 위해 설득하고 있는 거였다. 릴리엔에게는 다미언의 마력이 꼭 필요했지만 다미언은 꼭 마력을 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설득하게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거절한다면 그거야말로 그를 귀찮게 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전하.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막다른 곳에 몰린 릴리엔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흐음.”

다미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가 “자.” 하고 두 팔을 벌렸다.

“?”

의아해하는 릴리에에게 다미언이 다시 한번 친절하게 설명했다.

“방금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을 잘 섭취해 주시겠다고요."

그 약이 본인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좀 민망하고 묘하게 들리는 어투였다.

“약속을 하셨다면 이행하셔야지요. 제 비께서는 착실하고 책임감 있는 어른이시지 않습니까.”

“저기…….”

아이 다루듯 하는 친절한 말투가 간지럽고 낯설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다미언은 절대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좀 놀리시는 것 같은…….’

다미언이 들었다면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릴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지. 그리고 다미언이 그녀를 놀리는 데서라도 재미를 느껴준다면 그 역시 릴리엔의 존재가치에 반영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릴리엔은 각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스스로 가서 안기는 건 좀…….’

아이 시절에도 몇 번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민망하고 곤란했다. 머뭇거리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요? 그렇다면 뭐…

“아, 아니. 아닙니다. 싫지 않아......!”

다급하게 대답했지만 쭈뼛거리는 건 여전했다. 다미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도 간당간 당 끊기려는 인내심을 꼭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릴리에이 미치겠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곧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다미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미언은 '기다려'를 들은 군견처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입에서 침이 고이는 것 같았고 마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먼저 릴리엔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렇게 기다린 보상일까.

소르르, 한숨을 쉬면서 릴리엔이 가벼운 몸으로 그에게 안겼다.

처음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 부끄러운 모양인지 릴리에은 고개를 다미언의 가슴에 아예 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온몸으로 안기지는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두 팔을 다미언의 팔 밑으로 넣어 너른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 했다.

아마도 그게 릴리엔의 최선인 모양이었다.

포옹 같지도 않은 포옹이었다.

어린아이를 안아 주는 게 차라리 더 격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미언은 잠시 굳어 버렸다.

'꿈은 아니지.’

어르고 달래고 약간 압박하고 재촉하면서도 설마하니 릴리에이 정말 시키는 대로 안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삐걱거리면서 그가 시선을 내려보았다. 릴리엔은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안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푹 고개를 숙인 릴리엔의 귀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짜네.’

우습게도 그 순간 다미언은 이게 꿈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신했다.

꿈속의 릴리엔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달콤하고 다정했다. 만약 이게 꿈이었다면 릴리 엔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주 웃으며 그를 좀 더 바짝 끌어안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정하고 상냥하며 그가 원하는 걸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살랑살랑 맞춰 주는 꿈속의 릴리엔보다….

현실의 뻣뻣하고 다소 눈치 없고 어린애도 안 할 포옹에 부끄러워하는 릴리엔이 훨씬 더 좋았다.

충격적일 만큼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까지 모든 스킨십은 다 다 미언이 주도한 거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돌아 버리게 좋았다.

과잉 축적된 마력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그를 괴롭혀 왔다.

평생을 고통에 절어 살아온 뇌는 릴리엔과 접촉할 때만 이때를 위해서 참아 왔다는 듯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뿜어냈다.

릴리에이 먼저 안겼다고 해서 더 큰 차원의 편안함과 쾌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벅차고 큰 만족감이 들었다.

이 순간을 따로 도려내어 기억속에 그대로 숨겨 두었다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꺼내 보고 싶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 억지로나마 이렇게 릴리엔이 스스로 안겨 준 것, 이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만약 릴리에이 다미언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접촉을 좋아해 준다면…….

릴리에 스스로가 원해서 그에게 안겨 들고, 다미언이 릴리엔에게 입을 맞출 때 느끼는 행복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느껴 준다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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