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전하?”
말없이 전율하느라 멈춰 있는 다미언이 이상했는지, 부끄러워하던 릴리엔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게 아닌가요? 아, 혹시 제가 전하의 뜻을 잘못 착각하고
“아니요, 아주 잘 하셨어요.”
아주 잘.
다미언은 도로 떨어져 나가려는 릴리엔을 꼭 안았다. 상황 파악이 안 돼 물음표만 띄우고 있던 릴리엔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다미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자아, 나의 비. 약을 드셔 주실 시간이에요.”
“전하, 그 말투는 좀…….”
“왜요? 제 비유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다미언이 순수한 척 눈을 깜빡였다. 릴리엔은 “전하…….”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린 거 아닌데.”
“놀리셨잖습니까.”
“좋아서 그래요.”
으응, 하고 평소처럼 파고들었던 다미언이 아앙 하고 릴리엔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전하……!”
“이대로 살살 씹어서 다 녹여 먹고 싶어요.”
평소 같은 어조로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의 기저에는 농도 짙은 진심이 깔려 있었다.
릴리엔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미언이 흘긋 눈을 들어 야살스럽게 릴리엔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비에게 약을 먹여야 하는 건 저인데, 별소리를 다 했다. 그렇죠?”
“전하, 그건, 으음………."
다미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이 평소보다 느리고 가볍게 닿았다.
다미언은 이쯤에서 늘 다급하게 굴었으므로 릴리엔은 벅찬 입맞춤에 대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촉.
가볍게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다미언이 웃고 있었다.
"......?”
다미언이 다시 고개를 비틀어 촉, 하고 입술을 맞물렸다. 열린 입술이 순식간에 알맞게 딱 닿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새가 쪼듯, 아기가 젖병을 빨다.
배가 불러 장난질을 하듯.
가볍고 간지러운 감촉이었다.
릴리엔은 허리 아래가 오싹하고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
스륵, 힘이 빠져 무릎이 휘청대는 걸 다미언이 요령 좋게 받아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바로 다음 순간 릴리엔은 다미언과 함께 소파에 엉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자, 다시 한번.."
“흡…"
입술이 천천히 다시 한번 닿았다. 순식간에 입맞춤을 할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세세한 간지러움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다미언이 혀로 릴리엔의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평소보다 훨씬 여유가 있는 탓인지 천천히 나는 젖은 소리가 죄다 생생하게 인식 되었다.
“응, 전하, 이거…….”
“쉬…… 괜찮아요. 착하지. 약을 잘 먹어야 착한 어른이죠?”
약속했잖아요, 라고 하면서 다 미언이 달콤하고 느리고 얕은 입맞춤을 계속했다. 한 손가락이 릴리엔의 뒷덜미를 파고들어 잔머리 사이를 간지럽혔다.
오싹한 느낌이 허리로부터 뒷목까지를 쫙 긁어내렸다.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흡, 하고 숨을 참았다.
다미언이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릴리엔은 소파에 반쯤 누워 다미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물게 눈이 웃고 있질 않았다.
“……나도 해 줘요."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다미언의 목에 얹었다. 그리고 서툴지만 손가락을 움직여 다미언의 짧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하…….”
다미언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렸다. 그 얼굴은 평소처럼 몹시 아름다웠지만 좀 더 위험하고 농염했다.
혹시 다미언도 조금 전 그녀가 느꼈던 오싹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좀 좀 더 해 주고 싶었다. 릴리엔은 좀 더 손을 움직여 다미언의 목덜미에서 예쁜 귀 뒤쪽과 귓불을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앗.”
다미언이 잽싸게 귀에서 떨어진 손을 낚아채더니 앙 하고 물었다.
“참으로 겁도 없으세요, 비전하.”
“전하께서 하라고, 읍!"
그 뒤로는 다시 평소와 같은 페이스로 돌아갔다. 다미언은 약속대로 한 시간을 꽉 채워 착실하게, 양껏 릴리엔을 괴롭혔다.
* * *
최근 들어 사교계에는 은밀한 유행이 하나 생겼다.
“그거 아세요? 레이디 A께서 약혼을 하셨는데 상대가 B후작가의 후계자인 C자작이래요!"
“어머, 부인도 보셨군요!”
“레이디 A는 당연히 ……양일테고 후작가의 후계자인 자작이라면, 설마?”
바로 가십지였다.
한 신문사에서 줄어드는 구독량을 보다 못해 고육지책으로 마지막 페이지에 사교계의 한담들을 모아 게재한 데서 시작한 가십지는 3개월 만에 황도 엑셀시어를 강타해 버렸다.
그 첫 회의 마지막 페이지 번호를 따라 《페이지 식스》라고 불리게 된 사교계 가십란은 의외로 귀족들 사이에서보다 귀족의 세계를 궁금해하고 대리 만족을 느끼기 원하는 평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도에선 각종 《페이지 식스》 를 모아 책처럼 만들어 대여해 주는 서비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길 정도였다.
그에 반해 귀족들은 《페이지식스》를 즐기는 취미를 천박하고 무례한 호기심의 발로라며 업신여겼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다.
는 뜻이다. 뒤로는 보지 않는 사람이 더 드물었다.
《페이지 식스》의 침투력은 아주 대단했다. 한때는 황궁 시녀장이었고 현재는 대공가의 시녀장인, 엄격하고 고상한 모린 부인 역시 아침마다 대공비로부터 선물 받은 차 한 잔과 함께 《페이지 식스》를 읽는 은밀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오늘도 모린 부인은 부엌 옆에 딸린 상급 사용인 전용 작은 부엌에서 차 한 잔을 끓였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경건하고도 재빠른 손길로 가십지를 펼쳤다.
'오늘은 또 어떤 흥미진진한 기사가 실렸을까.'
저번 주에 이어 레이디 A의 약혼에 대한 후속 기사가 실렸기를 바라며 부인은 메인 기사의 타이틀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나, 이렇게 무례한, 아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빳빳하게 다린 귀중한 《페이지식스》가 부인의 손 안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루펜바인의 새 대공비: 칠삭둥이를 낳을 것인가, 팔삭둥이를 낳을 것인가?]
* * *
《페이지 식스》에 올라온 모욕적인 기사에 대한 릴리에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알고 있어요.”
“네?”
모린 부인의 깡마르고 엄격한 얼굴에 드물게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니, 그렇지만 비전하, 이건 굉장히 모욕적이고…….”
“모욕적인 거짓말이죠. 어차피 7개월, 아니 그렇게까지 갈 필요도 없겠네요. 3개월만 지나도 사라질 헛소문인데. 진지하게 대응해 봤자 대공가의 꼴만 우습게 될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맞는 말이지만 모린 부인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화가 나셨나 보군요.”
“그렇고말고요!”
모린 부인이 씩씩거렸다. 릴리 엔은 자부심이 강한 부인이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했다. 대공가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하지만…….
“비전하께서 데뷔도 하지 못하신 상태로 다급하게 혼례를 치르신 건 다 우리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 그리고 비전하의 가문을 위해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네?”
“그런 고귀한 희생의 내막을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칠삭둥이니 팔삭둥이니 떠들어대다니! 데뷔도 하지 않은 아가씨에게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인지!”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전 이제 아가씨가 아니라 부인이지만요.”
모린 부인이 화를 내는 이유가 예상 밖이라 릴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딴지를 걸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린 부인은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방자한 자들을 죄다 황족모욕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집행권만 주어진다면 당장 사형이라도 집행할 기세였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달랬다.
“그렇게 하면 대공가의 꼴이 우스워진다니까요. 다들 이렇게 말할 거예요. '어마나아, 삼류 잡지의 한담까지 찾아보고 이리 법석을 떠시다니. 저희는 그런 저급한 소문이 도는 줄은 저언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라고요.”
“......."
귀부인들의 고상한 콧소리를 흉내 내는 희극적인 솜씨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비전하……?”
여태 알던 릴리에이 아닌 것 같았다. 릴리에이 킥킥 웃었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다가 누군가 내 앞에서 이 얘길 꺼내면 그때 대응하는 게 나아요. 그치, 리타?”
“비전하의 말씀이 타당합니다만……."
리타의 무표정한 눈썹이 꿈틀했다.
“이대로 참고 넘어가야 한다니 몹시 분하군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모린 부인이 얼른 동의하고 나섰다.
“저는 비전하께서 개회연에 참석해 두각을 드러내실 일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시작도 전에 이런 몹쓸 소문이 초를 치다니…….”
“참을 수 없습니다.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니까요."
“비전하, 죄송합니다만 조용히 좀 해 주시겠습니까?”
어이쿠. 릴리엔은 찔끔해서 고개를 젓고 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