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날 이후 다미언은 아무리 바빠도, 릴리엔이 곤란해해도 봐주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마력을 퍼부어 주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본격적으로 마력을 전달하기 전에, 그녀를 지분거리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다.
물론 느리게, 치근치근하는 손길에도 마력은 확실히 전해지니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느리게, 마치 배움이 서툰 아이에게 걸음마라도 가르치는 것처럼 다미언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릴리엔에게 공을 들였다.
오로지 느린 키스와 간질거리는 접촉만으로 사람을 얼굴이 터질만큼 부끄러워 끙끙댈 때까지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통에 몹시 곤란했다.
“우리 비전하, 착하기도 하시지.
이렇게 약도 잘 먹고…….”
게다가 꼭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칭찬까지 하는 통에 딱 죽을 노릇이었다.
어떻게 된 남자가 지치지도 않는지. 릴리엔은 그에게 안겨 있을 때마다 마르지 않는 마력으로 샤워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마른 사막 같던 몸이 비를 잔뜩 머금어 부들부들한 흙처럼 촉촉해지고 나서야 놓여나기를 3일째.
머리부터 발끝까지 녹진녹진해질 정도로 공들여 돌봄을 받은 효과는 대단했다. 덕분에 요즘그녀는 유달리 컨디션이 좋았고, 주어진 두 시간 안에 바짝 밀린 일을 다 처리해 두기로 결심한 차였다.
릴리엔은 두 충신들이 열심히 열을 올리게 놔두고 서류에 골몰했다.
‘발미에라 본성의 방한 공사가 시급하다니 서둘러야겠지만, 실제로 가 보질 않아서인지 소요되는 예산 규모가 감이 잘 안 잡히네…….’
일복을 타고난 핏줄답게 빨려 들어가듯 집중했던 릴리엔은
“바로 그겁니다! 역시 탁월하군요! 대공비 전하!"
“……네, 네?”
다급하게 고개를 드느라 무거운 안경이 코에서 약간 미끄러졌다.
“좋은 해결책이 생각났습니다.”
“일단 축하합니다만, 대체 무슨……?”
“이런 얼토당토않은 헛소문 때문에 비전하께서 주눅이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대공가가 처한 입장상, 비전하에 대한 공격이 이 외에도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모린 부인의 안경이 번뜩이는 것처럼 보인 건 단순히 착각일까?
“비전하께는 최고의 방어구가 필요합니다.”
대체 무슨 말이지. 릴리엔은 난 감했다.
“갑옷이라도 입고 데뷔하라는 뜻은 아니죠?”
“귀부인의 갑옷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설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의 마담을 개인적으로 압니다.
십여 년 전쯤에 제 휘하에 시녀로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은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죠. 제가 부탁하면이 제국 끝이라도 달려와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부인.”
리타가 맞장구를 쳤다. 모린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비전하의 건강이 염려되어 무리한 일정을 추가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지만 최근들어 컨디션이 많이 좋아지셨으니까요.”
“사실입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비전하께 필요한 건 최고의 전투복입니다!”
“옳습니다.”
리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짝, 짝, 짝 하고 박수를 쳤다.
릴리엔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무슨 핑계를 대지?
'아.’
“하지만 내 옷을 새로 지으려면 파트너이신 전하의 의상도 손을 보아야 할 텐데. 그래서 서로 있는 옷을 입고 장신구의 색상만 맞추기로 합의를……….”
“그것이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전하. 이 모린이 반드시 대공 전하의 허락을 구해 오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다가, 릴리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대화의에 부부로 참석하는 게 결정된 게 한 달 전쯤의 일인지라, 파트너로서 의상에 신경을 쓸 겨를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폐회식을 위해서 한 벌정도는 세트로 맞춰 볼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내내 따로 놀면 뜬금없이 불화설이 돌 수도 있으니까.
'그래 뭐, 이참에 폐회식 의상을 맞추는 셈 치지.’
이로부터 바로 하루 뒤에, 릴리 엔은 이때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닫게 된다.
* * *
루펜바인의 귀족 여성들이 소로 리티 데뷔와 사교계 데뷔를 거쳐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면, 남성들은 모두 군 경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젊은 시절 헤멘린나 대제후는 헤멘린나 공작령의 앞바다인 알트 해를 주름잡는 해군 함장이었다…… 고 말하면 굉장히 우아하게 포장된 표현이고, 실제로 대제후는 국가로부터 공인 허가장을 받아 적국의 물류 보급선을 나포하고 다녔다.
사략 함대를 끌고 다니는 국가 공인 해적이었다는 말이다.
사략 함대 함장 시절 대제후의 주요 먹잇감은 동방 식민지를 보유한 루펜바인의 이웃 알토니아왕국이었다.
잊을 만하면 식민지에서 올라온 물자를 털리거나, 주요 요인을 인질로 잡혀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해상 통행세를 기존의 세 배로 올려 주거나.
덕분에 즉위 초기부터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는 알토니아 국왕은 대제후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신이여, 공정하신 판결에 감사드립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대제후의 후계자가 제국의 공성 병기, 피에 목마른 미친 살인귀 다미언루펜바인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아 신이여, 제게 어째서 이런 시련을!' 하고 절규하며 감사 기도를 5초 만에 철회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육로가 사막으로 막힌 탓에 알트 해는 현재 유일한 동방 무역로였다. 황실에 대한 쥐꼬리만한 납세 의무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징수된 해상 관세와 통행세거의 대부분이 알트 해의 대선장소유가 되었다.
굳이 노략질을 안 해도 자자손손 놀고먹을 수 있는 황금이 무상으로 굴러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 거부의 아내가 된 릴리엔은 현재…
“……이게 다 무언가요?”
“비전하와 대공 전하의 전투복.
을 준비하기 위한 물품들입니다.”
음. 릴리엔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색의 비단, 모슬린, 레이스, 견사에 금사, 은사, 무슨 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요정의 머리털처럼 오색으로 빛나는 실들…….
한쪽에는 릴리에이 소유한 - 그러나 대관절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한 번도 확인해 보지 못한 보석 상자들이 오랜만에 세상 빛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물건이 많은지, 아예 음악회를 여는 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홀을 싹 비우고 간이 의상실로 탈바꿈을 해 놓았다.
“음악홀을 대청소하겠다더니."
“호호, 하는 김에 청소도 했답니다.”
릴리에이 한숨을 쉬었다.
"부인, 아시다시피 전 바빠요. 그리고 입을 만한 옷도 이미 충분하게 있고요. 그러니 폐회식 의상을 한 벌 맞추는 걸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시간적으로도 여의치 않을 거고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네쥬 부인이 무조건 가능하다.
고 했으니까요.”
모린 부인은 릴리에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터라 거침없이 대답했다. 한때 황궁 시녀장이었던 그녀는 능숙하게 깡마른 어깨를 늘어뜨리고 호소했다.
“게다가 비전하, 비전하와 대공 전하의 옷차림은 대공가의 위신과도 관련됩니다.”
“저기 있는 히스토릭 주얼리 세트만 돌아가며 착용해도 감히 나를 얕잡아 볼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릴리엔은 영광의 정수라고 불리는 9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왕관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저런 걸 머리에 얹고 나가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보이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논리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모린 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안네쥬 부인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네쥬 리아파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인이 비전하를 위해 이미 일정을 비워 두었는데, 만약 비전하께서 거절하시면 중간에서 이 모린의 입장이 어찌나 난처하게 될는지…….”
바짝 머리를 틀어 올린 노부인 이 안경 밑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척했다. 감정에 호소해 보겠다는 작전이었다.
“부인.…."
물론 릴리엔은 속지 않았지만, 경력 출중하고 나이까지 든 시녀장이 저렇게 나오는 데 끝까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군.
릴리엔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모린 부인, 지금 내 비를 협박하고 있나?”
다미언이 나타났다.
“전하.”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제비께서 곤란을 겪고 계신 듯하여.”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모린 부인은 저를 생각해 주신 건데요.”
“하지만 난처한 것도 사실이셨지요?”
능숙하게 다가와 릴리엔을 위하는 다미언의 모습에 모린 부인은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이 정도로 규모를 키운 건 자기면서……!’
모린 부인이 허락을 구하자마자 흔쾌히 허락하고 대공가의 금고를 털어 쓰고 싶은 건 다 내가라고 했던 장본인이 이제 와서 자기는 아닌 척 발을 빼고 있는 것이다!
“저야 비께서 사치하시는 것이 당연히 기껍습니다만 몸도 약하신 분이 무리하시게 될까 걱정입니다.”
“전하…….”
아니나 다를까 다미언의 교활한 속삭임에 릴리엔은 적잖게 감동한 눈치였다.
“사정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왕 모린 부인이 성의껏 마련한 자리이니, 그 성의를 즐기는 것도 제가 할 역할이 아닌가 해요.”
“비께서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시다면야 처벌은 거 두도록 하지요.”
그렇게 대답한 다미언이 부쪽을 돌아보며 흐흥 웃었다. 부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저, 저 교활한! 목적은 같았으면서. 비전하를 이해해 드리는 척 점수까지 얻다니……!
그제야 이도엘이 생존하던 시절, 저 대공 전하가 다루기 힘든 성질 머리와 교활함으로 황궁 시중인들을 여럿 골탕 먹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 앞에서는 슬쩍 슬쩍 불쌍한 척을 하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영악하고 얄밉게 굴었던가!!
모린 부인은 애써 참으며 대기 중이던 안네쥬 부인을 불렀다.
지금은 비전하의 일이 무엇보다시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