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비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빈체로 자작 부인 안네쥬 오스본입니다. 화의 기간 중에 비전하의 의상을 담당하게 되어 감읍할 따름입니다. 고귀하신 비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미 결정된 일이므로 릴리에도 곤란한 기색을 지운 뒤였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는 바이네.
자작 부인의 명성이 황도 엑셀시어에 내에 자자하다고 들었는데, 여기 모린 부인 덕에 내게까지 차례가 돌아오게 되었군. 급하게 일정을 비우느라 폐가 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네.”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게다가…….”
안네쥬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실례하옵니다만 비전하, 이건 동방 기요문의 공작 실크 아닙니까? 세상에, 퇴팅겔의 레이스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것도 처음 보는군요.”
“비전하의 의상을 맞추기 위해 서라면 여기 있는 것 모두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네.”
“세상에.”
안네쥬 부인은 감탄했다. 이런 고급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쓸 수 있다니. 그녀 같은 재단사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럼 비전하, 당장 시작하죠!"
그렇게 인형 놀이가 시작되었다.
온갖 다채롭고 고운 원단들이 릴리엔의 턱 밑을 수차례 스쳐 지나갔다. 안네쥬 부인과 모린 부인은 보석을 몇 번이나 꺼내가며 색을 맞추고 디자인을 논의 했다.
다미언은 옆에서 “비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하라.”고 할 뿐이었다.
“하긴, 대공 전하께서는 될 걸쳐도 괜찮으실 테니까.”
굳이 어울리는 걸 찾을 필요도 없는 절세미인은 그렇게 소외되었다.
“좋아요! 이만하면 됐어요. 비전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끝난 건가요?”
“예. 제가 두 분께 정말 잘 어울리는 옷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내일쯤 가봉을 하고 그 뒤로 이틀이면 바로 옷은 완성될 겁니다.”
“그렇게 빨리?”
안네쥬 부인이 호호 웃었다.
“돈이 좋다는 게 뭐겠어요? 저는 많은 재봉사를 거느리고 있답니다.”
안네쥬 부인은 호언장담하며 돌아갔다.
* * *
그 다음날.
다미언은 황실로부터 한 가지 통보를 받았다.
“개회일에 기사단을 데리고 황궁 기사들과 함께 황궁 서쪽의 경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래도 폐하께서 제가 영 못미더우셨나 봅니다. 공을 들여 준비한 화려한 기념행사인데, 제가 반역이나 그에 준하는 이벤트라도 계획하지 않을까 불안하셨던 것 같군요.”
“하지만… 그날은 전하와 제가 부부가 된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 행사인데.”
어라. 이 사람이 지금 설마 아쉬워하나?
다미언은 기대감에 예민한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릴리엔은 걱정이라는 듯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날 같이 참석하지 않으면 저희 불화설이 날 텐데요. 아마도 그 부분도 노림수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기야 하겠죠.”
그럼 그렇지.
다미언은 불퉁해진 얼굴을 숨기려 입매를 손으로 매만지는 척 입가를 가렸다.
남편이 삐진 줄도 모르고 릴리 엔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
“좋은 생각이 났어요. 저희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라면 어떤…"
다미언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릴리엔을 향해 귀를 가까이 했다.
매일 마력 공여를 이유로 주기적인 접촉을 가진 덕에 몸의 거리감은 대폭 줄어든 두 사람이었다. 매일 그런 식으로 지분거리 는데 이런 식으로 거리가 좁아졌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이유가 없었다.
릴리엔은 거리낌 없이 웃으며 다미언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하는 척했다.
내용보다도 비의 숨결과 웃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감촉을 즐기던 다미언의 눈에도 서서히 이채가 떠올랐다.
“오호라.”
“……하면 어떨까요?"
“기발하고 탁월하십니다. 둘째 형님께서 아시면 뒷목을 잡고 넘어가실 만한 것이 참으로 딱 제 취향입니다.”
직설적인 다미언의 칭찬에 릴리 엔은 잠깐 놀랐다. 곧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밝아졌다.
“정말요?"
“정말이고말고요.”
아내의 얼굴이 밝아지자 다미언도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능글맞게 굴어 보였다.
“대체 어디서 이런 숙녀분께서 오셨지요? 제 마음을 읽는 것 같으시군요.”
“놀리지 마세요.”
놀리지 말라고 하면서도 릴리엔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 정도로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엔이 다미언으로부터 '뭔가를 잘했다는 칭찬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릴리에이 자부심을 가지고 수행하던 일거리를 빼앗아 가려고 했었다. 건강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때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일 뒤로는 섭섭함이 생겼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문득문득 우울해질 때가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해 봤자 그에게는 큰 도움도 안 되는 모양인데.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잘하는 건 고작 이런 일뿐인데, 다미언은 그녀의 특기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섭섭했다.
그래서일까, 이렇게나마 인정을 받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했다.
"전하께 도움이 되어 기뻐요. 진심이에요.”
푸르고 다정한 눈가에 걸쳐진 미소. 정말로 기쁜지 수줍게까지 보였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그 표정이 다미언의 마음으로 예고 없이 짓쳐들어왔다. 거대한 망치처럼 다미언의 심장 한가운데를 후려치고 말았다.
그 순간 다미언은 멍하니 확신했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사랑을 잃으면 죽게 될 거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확신이었다.
* * *
현 루펜바인의 대공비, 소싯적에는 튜린 선제후의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으로 지엽적인 명성을 소소하게 떨쳤던 릴리에 이슬라르는 데뷔도 하기 전에 결혼을 함으로써 황도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렸다.
모두들 대공비가 이번 대화의 개회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첫 공식 일정을 수행할 거라고 추측했다.
대화의 개회 전에는 다들 준비에 치중하느라 사교 모임이나 파티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그 중에서 '대공비의 데뷔’라는 전무후무한 상황을 감당할 만큼 격이 있는 모임은 없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해 클로드 1세가 무지막지하게 쏟아붓고 있는 막대한 금전도 그렇고, 여러 모로 참으로 기대할 만한 행사가 되겠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대공 부부의 새로운 행보가 알려졌다.
“루펜바인의 대공 전하 부부께서는 첫 공식 일정으로 엘레한 교회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엘레한이라면 선황 폐하께서 영면해 계신 곳이 아닌가.”
“첫 공식 일정이 성묘라니…….”
“가까운 친인들과 엘레한을 방문한 뒤 작은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하네요.”
공식 행보를 가지고 작게나마 모임을 연다. 한 가문의 안주인다운 데뷔 절차였다.
"하긴, 이미 대공비인데 결혼도안한 처녀 아이들 틈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며 데뷔하긴 좀 그렇지요.”
“하지만 이번 대화의는 클로드 1세 폐하의 7년을 기리는 아주 중요한 행사인데 거기서 데뷔하지 않겠다는 건 좀…….”
다들 당혹스러운 반응을 공유했다. 뜻하는 바가 모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노골적일 만큼 분명해서 문제였다.
안 그래도 선황의 황태자를 보호하고 있는 대공가다. 그리고 대공비는 클로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튜린 사람이다.
그 고지식하고 완고한 튜린 사람 말이다.
클로드가 심혈을 기울인 행사를 걷어차고 조용히 선황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강직함을 보아하니…….
“이런 말씀 드리기 참으로 망극하지만, 대공비 전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튜린 꼴통이신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어떻게 기선 제압을 할까 벼르고 있었을 텐데. 저쪽에서 먼저 주먹을 날린 셈이잖아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덕분에 오랜만에 흥미진진하겠어요.”
대공비의 초강경 행보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히 마테오 황태자였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전하."
대공비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릴리에에게서 예전에 도서관 구석에서 담요를 펴고 바닥에 앉아 있던 격의 없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사람은 여전히 소탈하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한량 같아 보였다면 지금은 대공비의 서재에 주인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맞춘 옷처럼 잘 어울렸다.
“엘레한에 방문하기로 결정하신게 비전하라고 들었습니다.”
모린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전해 준 소식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비전하께서 이렇게 선황 폐하를 생각해 주시니……. 따지고 보면 비전하의 아버님께서는 선황 폐하를 지지하다 돌아가신 셈인데 말이에요.”
동감이었다. 하지만 얼른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일은 분명히 클로드와 레이 첼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다. 클로드는 고대하던 행사를 앞두고 찬물을 끼얹은 릴리엔을 유념해둘 것이고, 레이첼 역시 공들여 준비한 연회를 걷어차인 꼴이니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게 아닐 텐데도 릴리엔은 태연했다.
“예, 맞아요. 제가 전하께 엘레한에 가자고 먼저 말씀드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