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82화 (82/155)

82화.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단순히 좋은 마음에서 제 부황께 인사를 드리시려는 거라면 차라리 다른 시기를 골라 주십시오. 이 일은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요…….”

“앞으로 이 일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마찰을 겪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클로드의 심기를 거스른건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클로드가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릴리엔은 아직 열아홉 살, 게다가 손아랫사람이었다.

황제에게 자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나서면 황제로서 체면이 구겨진다는 뜻이다.

클로드는 황제로서의 위엄이 손상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달랐다. 레이 첼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부' 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멋대로 구는 게 허용되었다.

사교계를 움켜쥐고 있는 레이첼은 부인회니 오찬이니 하는 수많은 행사에서 원치 않아도 릴리에과 마주치게 될 게 뻔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릴리 엔을 괴롭힐 수 있고, 그런다고 해서 별다른 지탄을 받지도 않을 거다.

다들 “황제 폐하의 정부는 정말 어쩔 수 없네요, 못 말린다니까요.”라고 하며 혀만 찰 뿐이리라.

“아시겠지만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부황께 경의를 표해 주시려는 마음이 감사합니다. 하지만…….”

감정이 격양된 나머지 마테오는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그대로 말해 버릴 뻔했다.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조카로서 얼마든지 숙모를 걱정할 수 있었다. 아마 그에게 삿된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당하게 걱정이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심이 있었다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다행히 릴리엔은 소년이 갑작스레 침묵한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분히 설명을 시작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저의 입장상 딱히 모나지 않더라도 정은 맞게 돼 있어요.”

“아니…….”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치고 맞는 쪽이 덜 억울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소년은 결국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몰라요.”

몇 살 나이 차이가 나지도 않는데 이미 한참 어른인 릴리에이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전하를 앞에다 모셔다 놓고 그때 말리실 때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푸념하게 될지도 몰라요.”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짓을 하십니까?”

“왜냐면 이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요.”

릴리엔이 단정적으로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옳은 일을 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옳은 일을 하고 후회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 순간 마테오는 어린 시절 간혹 보았던 전대 튜린 선제후를 떠올렸다.

눈매가 날카롭고 깡마른데다 키가 큰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이 어린 태자를 귀여워하며 다소 무례하게 굴 때도 있는 반면에 그 남자는 항상 “태자 전하” 라고 말을 높이며 시종일관 깍듯 했었다.

그 사람도 아마 지금 릴리에 같은 생각을 하고 죽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팔짱을 낀 소년이 단정한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비전하께서는 정말 부정할 수 없는 튜린 사람이십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아, 그나저나 그럼 개회식 때 제 파트너가 되어 주셔야 한다는 것도 들으셨나요?”

"예?”

한숨을 쉬던 소년이 얼음이 된 것처럼 꽁꽁 굳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파트너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머, 못 들으셨나 보네요, 아직.”

“금시초문입니다. 대체 어째서…….”

마테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릴리 엔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대공 전하께서 개회 당일에 황궁 서쪽의 경비를 맡게 되셨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테오는 솔직히 클로드가 미쳤는가 생각했다. 그라면 다미언에게 경비를 맡기느니 길바닥에 금화를 떨어트리고 다음날 같은 자리에서 되찾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클로드에게도 나름의 이유 비슷한 것은 있었다. 다미언이 한창 황궁의 괴물로 악명을 떨칠 때 그는 장성한 황자로서 이미 출궁해 독립한 상태였다. 그가다미언에 대해 아는 것은 먼발치에서 듣는 소문 정도가 다였다.

사실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클로드 황제가 연상한 건 흉측한 외모였지 강한 무력 따위가 아니었다.

클로드는 군역 역시 수도 경비대에서 2년 정도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머무른 정도가 다였으므로 전쟁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다미언의 강함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 좀 반반하고 허우대 멀쩡한 것 빼고는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 휘하에 부관들을 잘 둔 탓인지 항상 공적을 세워 온다.

지금까지도 클로드는 사람 좋은 선황 이도엘이 다미언을 편애했다고 믿었다. 이도엘이 신신당부한 ‘형제간에 상잔하지 말라.'는 부탁 그리고 다미언의 열의 없고 설렁설렁한 성격이 오늘까지 자기 목숨을 지켜 줬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이유로 클로 드는 다미언을 개회식에 불참시키기 위해 황궁 서쪽 경비 책임자 자리를 떠맡겼다. 실무 인원은 전부 황궁 기사단으로 채웠으니 안전할 거라고 믿으면서.

“사실 저희가 첫 공식 일정을 알레한 방문으로 잡은 건 개회식 날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도 있어요.”

"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공비로서 데뷔하는데 옆에 대공이 없으면 모양이 상당히 이상해진다.

“대공 전하를 제외하고 파트너가 되어 주실 분은 태자 전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테오는 뜨끔했다. 왜 그를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까? 설마 남몰래 숨긴 마음을 들켰나? 여태까지 티가 날 만한 행동이라면 도서관에서 릴리엔이 보던 책을 몇 권 뒤따라서 빌려 본 정도가 다인데….....

'………아니, 진정하자.'

삿된 마음을 들켰다면 오히려 릴리에 쪽에서 마테오를 피했지, 이렇게 어린 남동생 대하듯 상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맞다. 이건 명백한 어린 남동생 취급이다.

섭섭하고 삐죽한 기분이 솟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불쑥 나왔다.

"그렇다면 저 말고도 비전하의 오라버니이신 튜린 선제후께서도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예, 말씀하신 대로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이번에는 황족으로서, 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서의 저를 보여 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해서요.”

릴리엔이 살짝 난감하게 웃었다.

“하지만 만약 전하께서 곤란하시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부탁할 사람을 찾아볼게요.

제 오라버니나, 아니면 소로리티동기들의 오라버니라도……….”

"...는 없습니다.”

“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키지 않아서 여쭤본 게 아닙니다.”

"정말이신가요?”

“네.”

그래, 릴리엔의 입장에서는 그가 어린 남동생으로 보이는 게 사실 당연하기도 했다.

십대 시절의 1년은 크다. 그와 릴리엔은 한두 해 차이도 아니고 네 살이나 나이차가 벌어졌다.

그를 마냥 귀엽게 보고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섭섭해하는 자신이 미친 것이지 릴리엔에게는 죄가 없었다.

“파트너로 참석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폐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말인데요. 아시겠지만 저는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게 처음이라서요. 많은 도움받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착하게 대답한 마테오는 곱상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음걸이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주르륵.

'파트너라니.’

실 끊긴 인형처럼 닫힌 문에 기대 미끄러져 주저앉고 말았다.

마테오는 두 손바닥 안에 붉어진 얼굴과 소리 없는 비명을 묻었다.

그 시각 릴리엔은.

“태자 전하께 좀 죄송하기는 하지만 이게 최선인 것 같구나.”

“예 뭐…….”

리타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섬세하고 우울한 표정을 떠올려 보며 생각했다.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가 합리 성으로 무장한 릴리에의 주장에 미묘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상처받은 것 같던데.”

잠시 고민하던 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풋풋한 짝사랑 상대로 하필이면 릴리엔을 고른 건 좀 안 되긴 했다. 아마 리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마테오가 알면 고른게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며 크게 억울해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고생길이 훤한 태자를 위해 리타는 자체적으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 * *

며칠 뒤, 엘레한 교회를 방문하는 날이 밝았다.

“세상에, 비전하…….”

치장을 마친 릴리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린 부인이 탄성을 냈다.

“그 정도는 아닌데.”

릴리에이 멋쩍어하며 거울에서 시선을 피했다.

“아니긴요!”

모린 부인이 열심히 뒤따라가며 마지막까지 계속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었다. 릴리엔은 그만하면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방 밖으로 나섰다.

다미언은 층계참 옆 난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

난간 위로 의미 없이 굴리던 손가락이 우뚝 멎었다. 다미언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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