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호호, 말도 못하게 예쁘신가 보네요.”
부부 금슬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간 뒤였다. 모린 부인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용인들이며 가신들이 죄다 초승달처럼 눈을 가늘게 휘었다.
“부인…….”
“보기 좋아서 그러지요, 보기 좋아서.”
아암. 다들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난처하게 다미언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만 좀 쳐다보시라는 뜻이었는데 다미언의 시선은 뜻밖에 진지했다.
릴리엔은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둥근 인두로 솜씨 좋게 말아놓은 머리카락을 공을 들여 여러 가닥으로 땋은 다음, 뒤통수 약간 아래쪽에 예쁘게 모아 틀었다. 물방울 모양 진주를 엮은 장식이 목덜미 위로 대롱대롱 늘어졌다.
안네쥬 부인은 키가 크고 늘씬한 릴리엔을 위해 장식을 덜어내고 몸의 선을 드러낸 드레스를 만들었다. 남색 드레스에 약간씩만 어우러진 뽀얀 레이스가 수줍은 꽃처럼 예뻤다.
하지만 릴리엔을 홀린 듯 보고 있는 건 예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미언의 시선을 붙잡은 건…….
“제가 드린 예물을 착용해 주셨군요.”
“네.”
달빛을 가둔 것처럼 청백색을 띤 월장석과 짙푸른 사파이어를 메인으로 한 귀걸이였다. 하얀 파도 같은 세공이 마치 달이 뜬 밤바다 같았다.
이 귀걸이는 원래 다미언의 어머니 것으로, 손자며느리에게 주라며 이도엘에게 준 걸 이도엘이 다미언에게 하사한 것이다. 내력이 내력인지라 다미언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는 물건이었다.
제국 남성들은 결혼할 때 신부에게 예물을 주어야 했다. 그게 꼭 반지가 되는 법은 없었지만 어쨌든 평범한 사람들은 주로 반지 한 가지만을 선물했다.
평범하지 않은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준 예물은 과장 좀 보태 작은 보석 박물관 하나를 꾸릴 수도 있을 만큼의 양이었다. 가격을 떠나 역사적인 가치까지 더해져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물건들도 많았다.
그 수많은 귀금속들을 다미언도다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 월장석 귀걸이는 릴리에에게 줄 '예물'을 생각했을 때 다미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었다.
‘어머니의 물건이어서? 같은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면 주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어머니 이전에 이도엘이 준 것이었고…
무엇보다 이런저런 걸 다 떠나서 릴리에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달이 뜬 밤의 바다라니.’
하얗고 푸르고 검푸르다. 릴리 엔에게 있는 색채를 모아 둔 것 같지 않은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좀 머리가 돌아 버린 것 같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생각이었기에, 구태여 말로 내뱉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릴리에이 걸고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런 내심을 읽어 준 것 같아 기뻤다.
굳이 그녀에게 물어보면 아마
‘선황 폐하를 추모하러 가는 길이니 선황 폐하의 하사품을 패용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정 없는 대답만 돌아오겠지만.
영리하고 눈치 빠른 다미언은 정확하게 릴리엔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였다.
‘예쁜 사람이 예쁜 짓만 한다니.
까.’
퍼붓다시피 쏟아 준 예물이다.
워낙 많으니 귀하지 않게 취급할 수도 있는데, 그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 착용해 주지 않았는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예의도 릴리에이 하면 다르게 느껴졌다.
흐뭇해진 다미언이 모린 부인의 손에서 릴리엔의 털 망토를 받아들었다. 이 역시 다미언이 한랭지로 떠날 때 이도엘이 설표의 가죽을 어렵사리 구해 만들어 준 망토를 릴리엔의 것으로 다시 재봉한 물건이었다. 어차피 티어 인피니티인 다미언은 추위를 탈줄 몰랐다.
“전하.”
다미언이 직접 망토를 어깨에 걸쳐 주자 릴리엔은 난감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혼부부의 다정한 모습에 가솔들은 다들 흐뭇해서 좋아 죽으려고 했다.
"시간이 늦겠습니다.”
마테오가 툭 하고 끼어들었다.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릴리엔이 손을 들어 다미언의 손 위에 얹었다. 가볍게 떨리고 있는 손을 쥐며 다미언이 물었다.
“긴장하셨나요?"
다미언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릴리에이 대답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아요.”
황도 사교계에 내딛는 첫 발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새 대공비를 평가할 것이다. 무던한 릴리에도 긴장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너무 긴장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제국과 인근 나라들 사이에서는 제가 좀 악명을 떨친 편이라.”
다미언은 전쟁 영웅임에도 존경보다도 두려움을 샀다. 크든 작는 마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가 티어 인피니티라는 걸 은연중에 알아보고 두려워하곤 했다.
“전하의 악명을 이용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제가 적장의 목을 베어 박제로 만드는 취미가 있단 소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하셔도 좋습니다.”
엄숙한 척하는 말에 결국 릴리 엔도 조금 웃고 말았다.
**
엘레한 교회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이름도 엘레한 지구에 있어 엘레한 교회였다.
사람들은 클로드가 형의 유해를 이름 없고 조그만 교회에 처박아놓기까지 한다며 치를 떨었지만 사실 이 교회는 선황이 유언으로 직접 지명한 곳이었다.
석벽 위로 담쟁이가 기어오르는 아담한 교회 지하에서 선황은 홀로 영면하는 중이었다. 릴리엔과다미언 일행은 교회 주변을 둘러싼 보도진을 통과하여 먼저 지하로 향했다.
석실에 놓인 선황의 관은 수도사들이 정성껏 돌보고 있었으므로 성묘객이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관 위에 꽃을 놓아두고 기도를 올리는 것 뿐.
릴리엔은 기도를 마치고 관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죽음을 누리러 떠나네.
남겨질 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며.]
단 두 줄짜리 문장이었는데도 릴리엔은 이도에 황제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렴풋이 알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 바람대로 여기 남겨진 사람들은 행복한가.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묵묵하게 관을 바라보던 소년이 뒤돌아섰다. 적막한 얼굴이었다.
"…올라갈까요.”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별다르지 않은지 일행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선황이 잠들어 있는 석실은 오로지 제한된 몇몇만 드나들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선한 황제를 기리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작은 정원을 꾸렸다.
일행은 이도에 황제가 가장 좋아했던 기도문과 비석이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비석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누가 먼저 다녀갔는지 붉은 꽃다발이 이슬에 젖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예상외의 사람도 있었다.
“저건…… 블란쳇 소공작이 아닙니까?”
훤칠한 뒷모습에 어두운 금발.
황제의 기사임을 상징하는 흰 제 복 대신 어두운 색 외투를 차려 입고 있었지만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블란쳇 소공작이라면…….’
릴리엔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그때였다.
“에단 슈미트?”
날선 목소리. 마테오였다.
어깨를 움찔한 남자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선하고 잘생긴 얼굴.
에단 슈미트가 맞았다. 사람들이 낮게 탄식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죄송합니다.”
“사과 따윌 하라는 게 아니라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어. 쥐새끼 블란쳇의 아들이, 왜, 여기!”
말을 이어 나갈수록 소년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끝엔 거의 고함이었다.
“무슨 낯짝으로 내 아버지의 비석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느냐고 물었다, 소공작.”
“저는…….”
에단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썩 꺼져. 다시 한번 내 눈에 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에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인사를 하려는 듯한 몸짓을 취했지만 태자는 그조차도 외면 하고 아버지의 비석 쪽으로 성큼가 버렸다.
에단은 허공에 대고 묵묵히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조용히 일행의 옆을 스쳐 빠져나갔다.
뒤에서 가솔들이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마음은 모르지 않지만 찾아오면 안 되는 곳인데…….”
“그것도 하필 지금…….”
껄끄러워 하면서도 어쩐지 안됐다는 투였다. 릴리엔은 마리앤과 닮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어딜 보시나요?”
불시에 다미언이 물었다. 릴리 엔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공작의 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남매가 별로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하."
다미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쩍 흘렸다. 릴리엔은 눈치는 없지만 넘치는 불길함은 간파했다.
“전하?”
“....."
다미언은 대답 대신 웃었지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최근 들어 아침저녁으로 같이 붙어 지낸 덕에 릴리엔은 다미언의 기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여전히 이유는 모른다는 점에서 갈 길은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