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성묘를 마친 다미언 일행은 다시 대공 사저로 돌아왔다.
황태자와 다미언, 릴리엔이 상석에 앉자 하인들이 가신들에게 조그마한 은잔을 돌렸다. 진한 포도주가 조금씩 담겨 있었다.
모두가 잔을 받았다. 릴리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미언이 릴리에 쪽 팔걸이로 몸을 살짝 기울여 속삭였다.
“마시는 척만 해요.”
그리고 태연하게 잔을 들어 보이며 선창했다.
“선황 폐하를 위하여.”
“선황 폐하를 위하여!"
모두가 경건하게 복창하고 술을 홀짝 마셨다.
추도식의 술이라 릴리엔은 도무지 마시는 척만 할 수가 없었다.
혀끝을 축이는 정도만이라도 맛을 보려는데…….
'세다!'
증류주가 아니라 방심했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굉장히 도수가 높았다.
다미언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혀를 끌끌 찼다.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예의가…… 아닌지라.”
그 몇 마디를 하는데 입에서 코로 숙성된 포도향이 훅 솟구쳤다. 농후하고 달고 뜨거운 향기.
취기가 부쩍 오르는 느낌이었다.
고작 몇 방울뿐이었는데. 어쩐지 억울했다. 릴리에이 쌕쌕거리기 시작하자 마테오도 놀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릴리엔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일수 있었다. 마침 가신들 중 누군가가 마테오에게 선황과 관련된 덕담을 하는 바람에 마테오는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려야 했다.
다미언이 나지막이 달랬다.
“숨을 얕게 쉬지 말아요.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어 봐요. 깊게.”
“후우으으…….”
“옳지, 착해요.”
눈치 빠른 총관이 같은 은잔에 물을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릴리에이 술을 마시는 걸로 보일 것이다.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입을 헹구고, 삼키지 말고 도로 뱉어요.”
릴리엔은 시키는 대로 했다. 입에 고였던 술을 씻어 내니 아까 보단 나아졌다.
“견딜 수 있겠어요?”
“……네.”
조금 진정이 되자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는 그녀가 대공비로서 첫 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몇 방울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다미언은 이럴 때 릴리엔을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술이 워낙 독해요. 취기가 오른 건 실례가 아니라 불가피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기대요.”
어지간하면 괜찮다고 하겠지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기대지 않으면 더 꼴사납게 휘청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릴리엔은 다 미언의 어깨를 빌렸다.
그 모습을 보고 가신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이거, 술이 비전하께는 꽤 독했나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얼큰한 빛이 돌고 있다. 다들 웃으면서도 내심 이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사내놈들도 주량이 약하면 한 잔에 나자빠지는 술인데.’
'정신을 차리고 계신 것만도 용하시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황에 대한 충심이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릴리엔은 첫 공식 일정으로 성묘와 추도식을 계획한 일로 가신들에게서 이미 인망이 높아져 있었다. 엘런 총관과 모린 부인이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다니는 것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래서 대공비가 취기가 올라 어쩔 줄 모르는 게 꼴사납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연치 어려 갓 스물도 되지 못하신 분 아닙니까. 듣자 하니 손님을 대접할 때도 술이 아니라 차라는 걸 즐기신다더군요.”
“그렇게 술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이 마시는 척만 하지 않고 마신 게 오히려 기특하십니다.”
“암요, 기특하고말고요. 선황께서도 보셨다면 칭찬하셨을 겁니다.”
모두들 어린 대공비를 흐뭇하게 칭찬했다.
'?'
술에 취한 상태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갑자기 자기를 흐뭇하게 쳐다보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릴리에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이쿠, 졸리신 모양입니다.”
“여인네들 치장이 복잡하니 아침나절부터 고생하셨겠지요.”
"얼른 자리를 비켜 드립시다."
사람들은 대공비를 위해 평소보다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다들 삼삼오오 의논했다.
“그러고 보니 비전하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이거 뭐 예물이라도 각자 조금씩 드릴걸 그랬습니다.”
“저런, 생각을 못했군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릴리엔을 걱정하던 마테오와 취한 대공비를 살뜰히 어루만지던 대공을 떠올렸다.
“음…….”
사람들의 머리가 바쁘게 굴렀다.
대공비 자체도 마음에 든다.
대공비에게 잘하면 두 분전하께서도 좋게 봐 주실 것 같아 더욱 마음에 든다.
눈치를 보던 가신들 중 하나가 손을 들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급한 일이 있어 그만 좀…….”
“어이쿠, 생각해 보니 저도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허허, 다들 비슷한 볼일이 생긴 것 같군요. 이만 찢어지십시다.”
* * *
모두가 물러간 뒤.
“자요.”
다미언은 직접 취한 릴리에의 시중을 들었다.
침실까지는 제 발로 올라왔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매달고 있었던 장신구와 불편하고 예쁜 옷을 벗자마자, 릴리엔은 최소한의 긴장마저 놓아 버린 눈치였다.
"네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격적인 술주정을 하지는 않았다. 평소성격대로 릴리엔은 술에 취해서도 몹시 얌전했다.
편한 실내복에 가운을 느슨하게 걸쳐 입고 꼬박꼬박 졸다가 이름을 부르면 느리게 눈을 뜬다. 말이 늘어졌고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다.
물 컵을 잡으려는 손이 헛돈다.
두꺼운 크리스털 잔을 쥐여 주면 놓칠 것 같아서 다미언은 옆에 앉아 직접 잔을 입가에 대 주었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난감해하며 괜찮다고 사양했을 텐데 시키는 대로 꼴딱꼴딱 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이…….
'음.…항시 반듯하고 단정하던 사람이 최소한의 자기 방어마저 내려 버리면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다미언은 이 귀중한 정보를 마음 깊이 새겨 두기로 했다. 릴리 엔이 파티장에서 술을 입에 대지 못하도록 엄금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물론이다.
취한 모습이 너무 무방비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까 그거…….’
다미언은 그가 넘겨받았던 릴리 엔의 은잔을 떠올렸다. 술은 거의 줄어 있지 않았다.
반 모금이나 마셨을까. 아무리 독한 술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이렇게까지 취하는 건 이상했다. 단순히 주량이 약하다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릴리엔에게는 술은 독약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
생각에 잠긴 다미언과 눈이 마주치자 릴리엔이 또 배시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발그레한 뺨, 뜨거운 숨. 릴리엔은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 못하면서도 중얼거렸다.
“아직은 괜찮아요, 전하. 아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툭 릴리에의 고개가 기울었다.
완전히 잠이 든 모양인지 새근새근하는 평화로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다미언의 표정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방금 뭐라고…….’
순간적으로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할 뻔했다. 아니면 미쳤거나.
하지만 티어 인피니티, 극한의 마력으로 매번 한계를 시험당하며 단련된 육체의 청력이 잘못들을 리는 없었다.
미치지도 않았고 잘못 듣지도 않았다. 릴리엔은 방금 분명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하.
아직은 괜찮아요, 전하.
아직은…….
죽지 않아요.
* * *
그날 석간에는 대공 부부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레이첼 부인은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세 종류 이상의 신문을 읽었다. 양질의 기사가 실려 있는 괜찮은 일간지부터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문이라면 뭐든 싣고 보는 이니셜투성이 타블로이드까지.
오늘은 그 모든 신문의 표제 기사가 대공 부부의 이야기였다.
심지어 비슷하게 호의적인 논조였다.
혹여나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게 될까. 시녀는 조심스럽게 안락의자에 앉은 부인의 근처에 신문을 올렸다. 그리고 붉게 칠한 손톱을 한 손이 신문을 헤집는 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신문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레이 첼의 시선이 보도화가가 그린 대공비의 초상화에 오래 머물렀다.
보도화가가 특유의 빠른 손놀림으로 대강 묘사한 연필 초상화였다. 인쇄 품질마저 좋지 못해 간신히 이목구비만 알아볼 수 있었지만 릴리엔의 날씬한 옆모습과 특유의 표정이 어느 정도 담겨 있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 첼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생겼구나.”
"미모가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네요. 부인께 비할 바가 아닌걸요.”
시녀가 주인의 기분을 좋게 해보려고 얼른 말참견했다. 레이첼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구나.”
“그렇죠?”
자신감을 얻은 시녀가 눈치를 보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에단 슈미트 경에게 일을 맡긴 게 정말 잘한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