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85화 (85/155)

85화.

“글쎄다.”

“방법이 별로 좋지 못하잖아요.

대공비가 가는 곳마다 얼굴 도장을 찍으려는 건 그렇다고 쳐요.

근데 선황의 무덤까지 쫓아간 건 좀 과했다고요. 태자가 보자마자 벌컥 화를 내고 쫓아냈다는데, 그럼 좋은 인상을 주긴 다 틀린 거 아니에요?”

시녀가 대답하지 않는 레이첼을 한 번 더 채근했다.

“제 생각엔 다른 남자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마, 왜?”

레이첼이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소녀 같았지만 기이 하게 잘 어울렸다.

“방법이야 영리하지 못해도 블란쳇 소공작이 건실하게 잘 생겼잖아. 눈에 띄다 보면 대공비의 생각이 바뀔지 또 누가 아니? 멀쩡히 일 잘해 보려는 사람을 대뜸 갈아치우라니, 너 참 이상하구나.”

“아니, 그게…….”

블란쳇 소공작에게 마음이 있는 시녀의 속셈쯤이야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레이첼이 흐응 웃으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줄도 모르고 약게 머리를 굴리는 애들은 싫다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으면 귀엽게 여겨 달래 주고 보석이라도 몇 점 쥐여 주었을 것을.

자기 발로 행운을 걷어찬 줄도 모르는 시녀는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감히 불만을 가지기에 제 주인은 너무 무서운 여자였다.

'다 저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불똥은 엉뚱한 릴리에에게 튀고 말았다.

* * *

개회 하루 전.

다미언은 황제가 떠넘긴 경계 근무 건으로 바빠졌다.

아침 일찍 다미언이 황궁으로 이출근 아닌 출근을 한 후, 대공저에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오라버니!”

“릴리……!”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난 릴리에을 세드릭이 성큼 다가가 덥석끌어안았다.

“잘 지냈느냐? 별일은 없었고?

건강은?”

“잘 지냈어요. 별일은 없었고…… 다 괜찮아요.”

“네가 좀 마른 것 같은데."

“원래 그랬잖아요. 앉으세요."

“고생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네, 네.”

릴리에이 준비된 다구 앞에 앉았다. 모린 부인이 뜨거운 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자연스럽게 밀어 주자 릴리엔 역시 익숙하게 주전자를 받아 뜨거운 물로 잔을 데우기 시작했다.

시중 받고, 시중드는 데 서로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부인이 깍듯하고 살뜰하게 릴리엔을 보필하는 모습을 보니 세드릭으로서도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선황을 모셨던 충신들이 텃세를 부리며 어리고 미숙한 누이동생을 허수아비 취급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됐다.

그러던 중에 다미언으로부터 심란한 편지를 받기까지 했으니.

어쨌든 걱정과 달리 릴리엔은 심하게 아파 보이지도 않았고 가솔들도 그녀를 정중히 따르고 있었다. 염려하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릴리.”

안심이 되면서도 어딘지 인정하기 싫은 복잡한 기분이 든다.

“네, 보시다시피 그래요. 오라버니께서도 그러시죠?”

"나야 뭐…….”

“바쁜 시기에는 곧잘 밤을 새우시잖아요. 오라버니는 제가 직접 말려야 말을 들으시던 분이라 걱정이 된다고요. 알렌, 어땠나요?”

“안타깝게도 가주님께선 별로 잘 지내지 못하셨습니다. 아가씨가 안 계신 틈을 타 아주 멋대로 살고 계시거든요.”

세드릭이 이마를 짚었다.

“알렌 헤이워스…….”

“아가씨께서 하문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거짓을 아됩니까.”

오랜만에 봐도 알렌은 여전히 겁이 없었고 세드릭은 여전히 일중독을 고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하시네요. 심지어 제가 없어서 편하신 모양이고요. 그렇죠?”

“그래, 잔소리 심하던 여동생을 시집보내서 아주 살 만하다.”

말은 그렇게 밉게 하면서도 세드릭은 아주 섭섭한 표정이었다.

두 오누이를 바라보던 모린 부인 이 무릎을 굽히며 나섰다.

“이렇게 귀한 분을 품 안에서, 떠나보내신 심정이 어떠하실지 감히 여쭙지도 못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이니, 튜린 후께서 조금 이나마 마음을 놓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심정을 이해해 주니 고맙소.”

그 말에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도 사라졌다.

처음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를 맞이하던 총관의 지극히 깍듯한 태도에서부터 짐작을 하긴 했다.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릴리엔은 벌써 이 집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튜린이 아니라 이곳이 릴리에의 성이었고 집이었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잘 지내는 걸 보니 왜 이렇게 마음이 섭섭한지.

"…하기야, 너무 잘 지낸 나머지 개회연에 이 오라비도 참석한다는 걸 까맣게 잊은 모양이니.”

“?”

릴리엔은 이 속 좁은 오라버니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알렌이 풀어 설명했다.

“개회연에 아가씨께서 파트너로 불러 주시지 않아 몹시 섭섭해하셨습니다.”

"아.”

"......."

시선을 피하는 튜린 선제후의 나이, 이제 스물여덟. 가주로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관록이 붙었지만…… 그런 건 귀애하는 여동생에게 느낀 섭섭함 앞에서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 다미언, 그 얄미운 대공전하도 없겠다. 세드릭은 체면 차리지 않고 삐진 티를 열심히냈다.

릴리엔은 세드릭이 듣건 말건 마테오에게 했던 합리적인 설명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듯 세드릭 역시 감정적으로 삐져 버린 게 합리적인 설명으로 풀리지는 않았다.

릴리엔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안 듣는 척하는 오라버니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극약 처방 삼아 이렇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오라버니도 가정을 꾸리셔야죠.”

"윽, 릴리!”

그랬다. 세드릭의 동년배 중에서는 일찍 장가를 가서 벌써 애가 둘인 사람도 있었다.

헤이워스 부인은 이 문제로 벌써 3년 전부터 성화였고, 릴리엔이 결혼한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도 슬슬 ‘결혼은 언제쯤……….’ 이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세드릭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단칼에 잘랐다. 하지만…….

“일라시아와 솔라리아가 자랑을 해요. 조카가 너무 귀엽다고.”

“소로리티 동기들 중에서 아직 조카가 없는 건 저랑 뤼슬 뿐이에요.”

뤼슬은 남동생이 다섯 살이니 때가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지만 릴리에에게는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오라버니가 있었다.

“릴리, 아직은 좀…….”

세드릭은 릴리에의 섭섭한 낯을 보며 생각했다.

‘삐진 오라비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결혼 얘기를 꺼낸 줄 알았더니만 정말로 조카를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네.’

사실 조카보다도 릴리엔은 세드릭이 걱정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결혼해서 떠나온 뒤로 오라버니는 튜린 성에 홀로 남아버렸다.

스물여덟 살이면 귀족 남성의 나이로는 한창 결혼 적령기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아직 약혼조차 고려하지 않는 눈치였다.

준비가 안 된 건 아니었다. 릴리엔이 보기에 세드릭은 가족이 생기면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질 사람이었다. 당장 릴리엔에게 끔찍하게 잘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게다가 튜린 선제후는 돈도 권력도 많았다.

못 하는 게 아니다. 안 하고 있는 거다. 릴리엔은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 보았다.

'아직 두려우신 게 아닐까.'

세드릭은 양친을 각각 다른 시기에 잃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것,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자립하여 당당히 뒤를 이을 준비를 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은 것.

두 번의 상실은 세드릭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인 릴리엔을 끔찍하게 아끼며 과하다 싶게 염려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클로드 1세는 건재하다. 릴리에은 세드릭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상대로 또 다른 약점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정확히 사실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 강요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오라버니께 저 말고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드릭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릴리엔이 보기에 세드릭은 지켜야 할 가족이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이 옆에서 챙겨 주어야 마음의 쉼을 얻고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게 자책하지 않음으로서 더 잘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드릭에게는 가족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유일한 가족인 네가 내 파트너가 되어 주었어야지.”

“오라버니.”

릴리엔이 난감하게 웃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안다, 릴리. 나를 걱정하는 거지.”

“오라버니께선 너무 고집이 세요.”

"너답지 않게 2절이 있구나. 조카가 그렇게나 가지고 싶은 건지…….”

핀잔이라기보다 신기하다는 투였다. 릴리엔은 “오라버니께서 싫다시면 어쩔 수야 없지만요.”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생각했다.

'들킨 건 아니겠지.'

세드릭에게 가족이 필요하다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낸건 그녀가 튜린 성을 떠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릴리엔은 이제 오래지 않아 죽는다.

릴리엔은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여동생을 잃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누이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애하는 아이가 생겨 릴리엔이 세 번째로 밀려났을 때.

그때 죽어서…… 세드릭이 조금 이나마 충격을 덜 받길 바랐다.

사랑하는 누이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세드릭은 결혼을 기피하는 것과 별개로 누이가 원하는 조카를 당장 못 만들어 준다는 게 미안해졌다.

참으로 호구 같은 발상이 아닐 수가 없지만 누이 사랑이 지나친 남자는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 냈다.

“릴리에, 네가 정 조카를 가지고 싶다면 입양할 만한 아이가 있는지 한번 찾아볼… ....”

“오라버니."

“가주님.”

알렌과 릴리엔이 동시에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몹시 한심한 사람을 질타하는 눈빛에 세드릭은 '좀 심했나.' 하고 머쓱해했다.

머쓱해하는 오라버니를 보며, 릴리엔은 남몰래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쇼가 비밀을 지킨 모양이야.'

주치의의 입이 무거운 줄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 하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그래,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릴리엔은 그렇게 안심했다.

쇼는 약속대로 비밀을 지켰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지 못했다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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