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11. 대화의 개막.
대화의(大和議) 개막 당일 저녁.
황실에서 계획한 행사는 오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지만 황제에 대한 충심이 없는 릴리엔은 그걸다 따라다닐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저녁에 있는 개회연딱 그 하나에만 얼굴을 내비치기로 결정한 릴리엔은 하루 종일 모린 부인의 손에 끌려 다니는 중이었다.
“피부를 뽀얗게 해 주는 데는 우유 목욕이 최고랍니다!”
비몽사몽하는 릴리엔을 데운 우유와 꿀, 향유를 넣은 도자기 욕조에 앉히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황금 조개발이 달린 욕조에서 릴리엔은 마저 꼬박꼬박 졸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린 부인은 금가루까지 풀어 반짝이는 우유로 릴리엔을 씻기면서 신이 났다.
“이 기적의 목욕법이면 오늘 황도 최고의 미인이 되실 겁니다!”
“그렇군요."
리타가 무표정한 얼굴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멍하니 계속 졸며 생각했다.
'돼지고기 잡내를 없앨 때도 우유에 담그지 않나……?'
……다행히 너무 졸렸던 덕분에 그 엄청난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솜씨 좋은 시녀들이 졸고 있는 릴리엔의 팔다리를 마사지했다.
눈치 없는 한 시녀가 “어머, 비전하 몸에 멍이 많이 드셨어요.”
하고 조잘거렸지만 모린 부인이 얼른 입단속을 했고 다들 얼굴이 붉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릴리엔은 곤란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이 멍이 순수하게 그냥 살다 보니 생긴 멍이고 최근 들어 잘 없어지지 않아서 여러 개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설명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우유 마사지를 하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향유를 바르며 또 마사지를 하고.
릴리엔은 이게 미용 과정인지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한 마리네 이드 과정인지 헷갈려 하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드디어 마사지에서 해방된 릴리엔은 리타가 입에 넣어 주는 작은 샌드위치와 쿠키를 오물오물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모린 부인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시녀들을 지휘했다. 시녀들은 릴리엔의 찰랑거리는 머리를 달군 인두로 말았다. 그리고 복잡한 방식으로 날쌔게 손을 움직여 머리를 땋고 화장을 하고 손톱을 손질해 주었다.
안네쥬 부인과 모린 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의상은 비둘기 색 드레스였다.
릴리엔의 창백한 피부에 착 스며들듯 어울리는 빛깔이었다. 연한 회색이면서 푸른빛이 도는 옷감은 천을 만들고 후가공으로 염색을 한 게 아니었다. 푸른 실과 회색 실을 씨줄 날줄 다르게 엮어야 비로소 이 오묘한 색감이 나타났다.
전 대륙에서 이런 천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있는 곳은 동방 기요문뿐이다. 이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간 기요문 실크는 수도에 3층 고급 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것이었다.
옷의 실루엣은 여전히 단순했지만 그만큼 보석이 화려해졌다.
목에는 20캐럿짜리 다이아가 일곱 개나 달린 태후의 목걸이를 메인으로 걸고, 알의 크기가 다른 긴 진주 목걸이 세 줄을 겹쳐 걸었다. 머리에도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왕관을 썼다.
양팔에도 줄줄이 팔찌를 걸고 손가락에도 반지를 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다가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비전하!”
“아이고, 저희 욕심이 과했네요!”
팔찌를 죄다 빼고 귀걸이도 뺐다. 반지도 알이 제일 큰 블루다이아몬드 하나만 남긴 후에야 릴리엔은 겨우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분명히 예물로 받을 때 릴리에의 손가락 사이즈를 재서 둘레를 다 맞춰 놨는데. 그새 살이 빠진 건지 알이 워낙 큰 탓인지 묵직한 다이아몬드가 헛헛하게 자꾸 옆으로 돌아갔다.
거울을 보니 그 안에는 낯설 정도로 장중하게 꾸며진 여인이 서 있었다.
“겨울 여왕님 같아요…….”
시녀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평소 릴리엔은 말을 걸기 쉬운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무슨 마법을 부려 놓은 건지 범접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비전하?"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릴리엔이 방긋 웃으며 치하해 주었다.
“예, 다른 사람 같네요. 다들 정말 고생이…… 이런…….”
리타가 다시 휘청하는 릴리엔을 부축했다.
“아직도 많이 무거우신가요? 이 이상 장신구를 빼기는 좀……"
릴리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대공가의 위신과도 직결된다.
“이런 차림을 해 본 게 처음이라 그래요. 익숙해지면 걸을 수 있을 거예요.”
결국 앞에서 잡아 주고 뒤에서 잡아 주는 둥 법석을 떨며 릴리 엔은 천천히 방을 나섰다.
오늘의 파트너인 마테오는 릴리 엔과 같은 색 기요문 실크로 만든 셔츠를 받쳐 입었다. 짙은 금발에 푸른 눈, 건강한 살굿빛 혈색을 가진 마테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다.
“오셨군요.”
릴리엔은 무심코 다미언이 저 셔츠를 입었다면 훨씬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름다우신 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득이하게 전하께 폐를 끼치게 되었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폐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 마테오를 보며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숙모의 손을 잡고 연회에 참석하는 게 부끄러우신가 봐.'
마테오가 들으면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할 법한 생각이었다.
* * *
시녀들의 보조가 사라지자 릴리 엔은 생후 9개월쯤 된 아기가 아빠 손에 잡혀 걷기 연습을 하듯 천천히 걸어야 했다.
마테오는 그 또래 소년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보폭을 맞춰 주었다. 덕분에 릴리엔은 무사히 마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곧 마차가 황궁에 당도했다. 다 미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당도하자 줄을 지어 서 있던 마차들이 황족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다른 이들의 마차와 달리 대공가의 마차는 무도회가 열리는 내 성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해서 내리세요."
먼저 내려간 마테오가 손을 잡아 주었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악단이 연주하는 선율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발생하는 열기가 물씬 느껴졌다.
공기 중에는 낮에 터트린 축포의 화약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마법으로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꽃들이 화사했다.
여름밤 같았다.
회장의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긴장해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문이 열렸다.
“제국 루펜바인의 작은 광휘, 두 번째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 시사크의 공작이자 투르마린의 후작이시며 푸른 깃발의 기수이 신 마테오 시사크 투르마린 루펜바인 전하께서 드십니다!”
핏대를 세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루펜바인의 대공비 전하, 튜린과 헤멘린나의 레이디, 헤멘린나 공작 부인이자 알트 해의 여주인 이시고 팔미앵의 백작 부인이신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
숨이 넘어가지나 않을까. 릴리 엔은 긴장했다.
“릴리에 마리에스타드 이슬라르루펜바인 비전하께서 드십니다!”
마테오가 뒤편에 서 있는 기사에게 신호를 주자 그가 “수고했네.”하고 시종에게 금화 세 닢을 쥐여 주었다.
마테오가 나직하게 물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이 회장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적의, 호의, 미움, 사랑, 슬픔, 기쁨. 갖가지 감정들이 관계라는 거미줄을 타고 오가고 있었다.
때로는 소양을 시험받고 때로는 운을 시험받는다.
순간 릴리에의 머릿속에 소로리 티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도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보다 큰 무대에 나설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릴리엔은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완벽하게 꾸며진 회장 속으로 마테오와 릴리에이 한 걸음 걸어들어갔다. 악단이 음악을 멈췄다.
시종의 외침에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곳곳에서 술과 음악을 즐기던 사람들도 갑작스럽게 음악이 멈추자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분위기를 파악하고 황황히 물러섰다.
사람들이 물러나서 만든 길에서…….
"이런, 세상에, 내 조카야!”
클로드 1세가 나타났다.
장신이 내력인 집안답게 키가 큰 중년의 미남자였다. 만면에 진위를 분간할 수 없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황제가 어서 오라는 듯 양 팔을 벌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생후 9개월 정도의 속도로 걸어야 하는 릴리에 덕분에 클로드는 예상보다 좀 오래 팔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모양이 빠지기 직전에 결국 황제 쪽에서 두어 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잘 왔구나, 잘 왔어.”
덥석 마테오를 끌어안는 모습이 정말로 수더분한 삼촌 같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런, 언제 이렇게 철이 들었느냐. 어린 시절처럼 숙부라도 불러도 괜찮은 것을."
툭툭, 하고 등 한가운데를 친근하게 두드리는 손길에 마테오의 얼굴에 가는 금이 갔다. 릴리엔이 저도 모르게 나서고 말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튜린 후의 여동생이 아니신가.”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눈빛은 다미언과 비슷해 보이는 보라색이었지만 동공이 미묘하게 확장되어 있어 인상은 약간 달랐다. 눈썹과 뺨에도 심하게 찢어졌다 붙은 것 같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다미언이 새 사람을 만나 정착을 하였다니 흔흔하다. 오래도록 전쟁터를 쏘다녀 내 근심이었거늘.”
릴리엔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폐하께 대한 충심이셨겠지요.”
좋아서 쏘다닌 게 아니라 네가 시키지 않았느냐는 말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