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적의라곤 요만큼도 없는 맨숭맨숭한 얼굴에서 예상치 못하게 툭튀어나온 당돌한 대꾸. 마테오는 하마터면 기침을 해 버릴 뻔했다.
황제는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내 남동생을 구제해 준 것이 고마워 보낸 선물이 생각이 나는군. 공주관(Princess's Tiara)은 잘있는가?”
공주관, 릴리엔을 향한 클로드 1세의 적의를 드러낸 물건.
릴리엔은 얌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페라트릭스 칭호를 인가해 주신 날 곁들여 하사하신 선물이셨지요. 두 폐하께 선물을 받은 날이라 몹시 뜻깊고 기뻤습니다.”
해석하자면 네 선물은 '곁들임정도였다는 뜻이고, 그래서 별로 기분 상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오래지 않아 이 머리 위에서 볼 수 있겠군.”
“확답 드릴 수 없습니다. 담이 작고 도량이 좁아 귀한 물건을 좀처럼 세상에 내어 놓지 못하는지라.”
“......."
잠깐 침묵하던 황제가 곧 호탕한 웃음을 토해 냈다. 누가 보더라도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마테오의 어깨를 짚는 클로드 1세의 손에 미묘하게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그래!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로고! 내 새 가족과 더 한담하고 싶으니 다음에 기회를 찾자 꾸나.”
“부디 황은을 널리 나누어 주소서.”
그만 대화하자는 말마저 몹시 우아하게 오갔다. 마테오는 릴리 엔을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기가 막힌 마테오가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요.”
바람에 밀리면 밀리는 대로 살것 같은 유순한 얼굴로 릴리에이 조금 웃었다.
“전하, 튜린 사람들은 가끔 승산을 따지지 않는답니다.”
그 순간 마테오는 릴리에이 ‘튜린 사람'이란 말을 앞으로도 종종 핑곗거리로 써 먹을 거란 사실을 예감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곤란한 사람이다.
“정말이지…….”
“?”
눈을 살짝 짚는 마테오의 옆에서 릴리에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까지 황제에게 있는 대로 대거리를 해서 쫓아낸 주제에 여전히 무골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친애하는 비전하, 제 착각이 아니라면 걷는 속도가 빨라지셨는데요.”
“착각이 아니십니다. 적응이 끝났거든요.”
“……언제요?”
마테오의 물음에 릴리엔은 착한 얼굴로 빙긋 웃기만 했다. 마테오는 직감했다.
'큰일 났다. 더 반하겠다.'
어쩌겠는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 수밖에.
* * *
잠시 걷던 릴리엔과 마테오는 곧 솔라리아와 마주쳤다.
“비전하! 이리 오세요.”
올해의 데뷔탕트인 솔라리아는 곱슬곱슬한 긴 머리를 풀어 내리고, 하얀 모슬린으로 만든 풍성한 치마를 휘날리고 있었다.
“솔라리아.”
인상도 그렇고 서로 차려입은 태가 확연히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은 실제보다 좀 더 나이 차이가 나 보였다.
“비전하와 함께 데뷔탕트 드레스를 세트로 맞추고 싶었는데.”
귀여운 투정에 릴리엔이 다정하게 웃었다. 솔라리아의 얼굴에도 금방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비전하께는 평범한 데뷔 드레스보다 지금 옷이 훨씬 더 어울려요!”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러서가 아닐까. 릴리엔은 현실적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웃었다.
“솔라리아, 태자 전하께도 인사를 해야지.”
솔라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새침해졌다.
“라니스터의 솔라리아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이쪽으로 오세요.”
무성의한 인사에 마테오는 머쓱해졌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솔라리아는 그저 너무 좋아하는 비전하의 파트너가 싫을 뿐이었다. 그 단순하고 분명한 사고방식은 똑똑한 마테오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마, 비전하!”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은방울꽃 소로리티〉 동기들은 물론, 그보다 연배가 어린 영애들도 있었다.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본능적으로 릴리엔을 먼저 반기고 그 뒤에서야 아차 해서 마테오를 반겼다.
마테오는 이 소로리티 아가씨들이 릴리엔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실감했다.
아가씨들이 왁자하게 달려들어 릴리엔의 안부를 묻는 동안 약간씩 소외된 남성 파트너들도 멋적 어하며 대화를 나눴다.
“저분이 바로 그 소문 자자한 비전하셨군요.”
“미셀로 경도 들으셨습니까? 저희 아가씨께서도 오늘 비전하를 뵙는다고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이셨습니다.”
키가 훌쩍 큰데다 대공비의 차림으로 성장한 릴리엔을 보다 화사하고 가볍게 차린 아가씨들이 둘러싸고 있다. 어미 새와 아기 새들 같았다.
돌아가며 아가씨들이 말을 걸면 릴리에이 하나씩 대답을 해 주는 것도 왠지…….
“다정한 어미 새가 공평하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보고만 있어도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군요.”
“좋은 광경입니다…….”
까르륵 꺅꺅 릴리엔을 둘러싼아가씨들이 신이 난 모습에 남성들은 허허 웃으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성별을 따라 두 무리로 갈라졌다.
“비전하도 무도회는 처음이시죠?”
“처음이시라고 들었어요!”
“춤은 추셨나요?”
릴리엔은 차분히 처음이 맞고 춤은 아직 추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다들, 비전하께서 성가시겠구나.”
신이 난 데뷔탕트들을 만류하며 동기들이 나섰다. 릴리에의 동기들은 이미 데뷔를 치른 사람이 더 많아서 상대적으로 옷차림도 더 차분했고 들떠 있지 않았다.
'역시 비전하의 동기분들은 달라.’
데뷔탕트들이 선배들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였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흐드러지게 붉은 치맛자락, 검은 오닉스와 황금 목걸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릴리엔과 대비되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라 생각할 정도로 정 반대의 화려한 색채를 덧입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는 뒤로 비슷하지만 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막 도착한 편인 은방울꽃 소로 리티>에 비해 레이첼 일행은 처음부터 파티를 즐겼는지 다들 손에 음료 한 잔씩을 들고 있었다.
레이첼이 자기 음료를 시녀에게 넘기고 곱게 인사를 올렸다.
“비전하께는 처음 인사를 드리는군요. 레이첼 우드라고 한답니다.”
"처음 뵙는군요, 우드 부인.”
"어머 싫어라. 레이첼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양 섞인 가벼운 말투에 욱한 솔라리아를 일라시아가 재빨리 붙잡아 말렸다.
레이첼이 부채를 펴며 웃었다.
“무도회는 즐거우신가요? 비전하의 데뷔 무도회가 되리라 생각하고 공을 많이 들였답니다.”
“이미 결혼한 몸인데 또 주목을 받을 수야 없지요. 부인의 성의는 여러 아가씨들께서 알아주실 겁니다.”
"겸손하시군요.”
레이첼의 시선이 경계 중인 솔라리아에게 닿았다.
“오늘은 그저 인사를 올리러 온 것뿐인데 아기 새가 경계심이 강하네요.”
레이첼이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레이첼이 무리를 끌고 물러갔다. 하지만 다 자리를 떠난 건 아니었다.
“비전하, 평안하신가요?"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레이디 마리앤, 오랜만에 뵙는군요.”
“네에, 참으로 오랜만이랍니다.
비전하의 덕이지요.”
보아하니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 레이디 마리앤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 일라시아가 나서려고 했다. 그때 릴리엔이 가만히 손을 들어 막았다.
“네, 저도 레이디 마리앤의 덕에 그동안 아주 잘 지냈습니다.”
말뜻을 아는 동기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일라시아는 나설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평온하고 당당한 릴리에의 태도에 마리앤은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지?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사소한 잘못 하나 때문에 사람을 사회적으로 말살하려고 한 게 들통날 판이잖아!
“비전하께서는 참으로…… 당당하시군요.”
“지금 저희 대화에 당당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나요?"
릴리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그다지 길지 않은 마리앤의 인내심은 그쯤에서 끊겼다.
뿌득, 이를 악문 소리와 동시에 마리앤의 손에 들렸던 잔이 허공을 날았다. 몰상식하게 음료를 끼얹는 정도가 아니라 잔을 던지는 미친 행동에 다들 경악했다.
뒤쪽 신사들 틈에 있느라 상황을 늦게 파악한 마테오가 막 달렸지만 때는 이미 늦은 듯했다.
릴리엔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잔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네쥬 부인이 공을 들인 기요문 드레스를 망치게 생겼다. 모린 부인과 리타를 비롯한 시녀들이 꾸며 주었는데. 험한 꼴을 당해서 돌아가면 다들 속상할 얼굴이 선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멍이 잘 안없어지는지라 얼굴에라도 맞으면 큰일이 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릴리엔의 상태로는 섣불리 피하려다가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재빠르게 하며 고통을 기다리는데…….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어 쨍그랑 하며 잔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릴리에이 예상한 고통은 없었다.
"......?"
살그머니 눈을 떠 보니 누군가가 릴리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