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대공 전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상대는 금발이었다. 순간적으로 마테오인가 싶었지만 소년 보다는 키가 크고 체격이 성숙한 걸 보니 남자였다.
“…… 비전하, 괜찮으십니까?”
나직한 목소리.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공작석 같은 눈동자는 분명…….
"블란쳇 소공작?”
블란쳇의 소공작, 말라카이트후작 에단 슈미트였다.
"괜찮으십니까!”
에단과 계속 눈을 맞추고 있을 틈은 없었다. 황급히 다가온 마테오가 릴리에의 안위를 서둘러 살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앞에 그 혐오하는 배신자 에단 슈미트 경이 있는데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리앤 슈미트.”
“오라버니, 어째서…….”
“내가 묻고 싶군. 네가 생각이 없는 철부지인 줄은 익히 알았다.
만. 어째서 이런 짓까지 저지른 거지.”
매서운 추궁에 마리앤이 버벅거리면서도 릴리에 쪽을 손가락질했다.
“그, 그건 저 계집이 다………!”
“마리앤 오블라하 슈미트!”
에단의 목소리가 냉엄해졌다.
“대공비 전하시다. 말을 삼가라.”
마리앤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오라버니가 어떻게……!”
그녀는 배신감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릿속에 순식간에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금이야 옥이야 자신을 싸고돌았던 부모님 옆에서 냉정한 얼굴을 하던 모습부터 소로리티의 일로 마리 앤이 슬퍼할 때 조금도 편들어 주지 않았던 모습까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항상 저랬어! 가족들 사이에서 저만 잘난 척 매번 그랬어!
사람들은 마리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눈빛에 생생한 적의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며 다 같이 혀를 찼다.
“어쩜, 블란쳇의 영애가 건방지 단 풍문은 익히 들었지만."
“비전하께서 데뷔하기 전에도 더러운 소문을 신나게 부풀리고 다녔다나 봐요.”
“어머, 무서워라. 너무 악의적인 짓이네요.”
마리앤이 평소에 깎아 먹은 평판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았다.
에단은 한숨을 쉬며 새파래져 있는 마리앤의 사프롱을 불렀다.
“숙모님,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십시오. 오늘은 이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래.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마리앤, 이만 돌아가자꾸나.”
중년 부인이 되도 않는 핑계를 주워섬기며 마리앤을 잡아끌었다.
에단은 그제야 릴리엔은 돌아보았다. 필시 잘 정리해 두었을 에단의 앞머리는 죄다 흘러내린 데다 술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파편에 다친 것인지 뺨에서는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동생의 무례한 행동을 사죄드립니다, 비전하. 이 일로 향후 어떤 문책을 하시는 달게 받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마리앤은 당분간 자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방패막이 되느라 엉망이 된 꼴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괴팍한 사람일지라도 더 화를 내긴 어려웠다. 하물며 릴리엔이었다.
"...소공작의 사과를 보아 이 일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넓은 아량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에단의 눈빛이 마테오와 잠시 마주쳤다. 과연, 황태자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을 막아 준 그에게 썩 꺼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물러가게, 에단 슈미트 경.”
에단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그 말을 음미했다. 블란쳇의 배신 사건 이후 처음으로 화내지 않는 주군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
에단 슈미트는 엉망이 된 꼴로 물러가는 모습마저 반듯했다.
젖어서 조금 더 색이 어두워진 금발이나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까지.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에 반응하는 굳은 입매가 지금까지 없던 신경질적인 기색을 더했다.
그것마저도 잘 생겼다. 오히려 노상 반듯하기만 하던 사람이 제 런 표정을 지으니 '일탈'이라는 제목을 붙여 초상화로 그려 놓고 싶을 정도였다.
새하얗게 차려입은 은방울꽃 아가씨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잘 생기긴 참 잘 생겼어."
“그나저나 비전하는 괜찮으실까?”
“레이디 마리앤은 정말 무례해.
어떻게 황족이신 분께 그렇게……."
“저기 혹시…… 레이첼 부인이 이 따로 지시한 게 아닐까?”
“어머!”
“아냐, 아냐. 내가 알기로는 예전에 블란쳇 공이 돌아서기 전에 소로리티에서 …….”
“봉오리 아가씨들."
차분한 저음. 대공비였다.
“비, 비전하!”
화들짝 놀란 은방울꽃 봉오리들을 보며, 릴리엔은 부드럽게 웃었다. 질책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켕기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가씨들은 절로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비전하, 저희들이 입이 가벼워서……."
“쉿.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니.
모처럼 이리 예쁘게 꾸몄으니 고운 입술에서 고운 말만 나오길 바랄 뿐이야. 그래야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네, 네에…….”
“죄송해요…….”
릴리엔은 아가씨들이 민감한 주제를 입에 올려서 데뷔 무대를 트집 잡힐까 봐 주의를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생각 보다도 시무룩해한다.
'이런.’
이렇게까지 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릴리에이 ‘대공비 말투'가 나빴나 싶어, 보다 부드럽게 어조를 바꾸어 아가씨들을 달랬다.
“울적해하지 말렴. 정말로 혼내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그대들이 하나같이 어여뻐 시선을 많이 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노파심에 하는 말이었단다.”
“비전하아…….”
아니, 매섭게 다그치는 것도 아니고 곱게 달래는 말이었는데 왜 다들 히잉 소리를 내며 우는 상을 한단 말인가?
지켜보던 남성들은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하면서 릴리에의 치마꼬리에 다시 모여드는 영애들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혼났다고 생각하면 주눅이 들어서 물러나야 하는 건데. 저건 흡사 어린 아이들이 너그러운 어머니에게 어린양을 떠는 꼴이 아닌가.
“괜찮아, 앞으로 주의하면 되지.”
,
“울상을 해도 예쁘지만 기왕이면 웃는 게 보고 싶구나.”
하고 부드럽게 달래는 대공비의 말에 아가씨들의 눈빛이 몽롱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애초에 사지 멀쩡한 파트너는 내동댕이치고 왜 대공비 옆에 가서 얼굴을 붉히고 있단 말인가?
푸르고 희고 반짝이는 릴리엔은 마치 겨울의 여왕 같았고 그 주변을 둘러싼 흰 옷을 입은 아가씨들은 겨울 여왕의 눈송이 시녀들처럼 보였다. 여전히 보기에는 좋은 광경이었지만…….
“저 지금 굉장히 소외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도 그렇습니까?"
“아니, 이상하게 파트너를 비전하께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게 그냥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이것 참. 경쟁자가 대공 전하도 아니고 대공비 전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 저런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남자들의 입가에는 반쯤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누차 말했다시피 나쁜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테오 역시 반쯤 웃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무지 웃을 기분이 안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 같다…… 응?
'잠시만.’
하얀 꽃봉오리들에게 둘러싸인 릴리엔의 안색이 아까보다 살짝 더 창백하게 보였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마테오는 일단 아가씨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웬만한 놈팡이였다면 알은척도 하지 않았을 아가씨들이 태자 전하라니 못내 아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태자 전하?”
릴리엔이 병약하다는 건 아직까지 대외비였다. 사실 비밀로 해봤자 첫눈에 이미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다 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식 석상에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여야 했다.
타고나길 그냥 좀 연약하게 타고난 것과 픽 하면 쓰러지는 것은 결이 달랐다.
마테오는 재빨리 핑곗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러고 보니 숙모님께 황궁 정원을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한 게 기억이 나서요.”
마침 춥지도 않았다. 이 사람들 등쌀에서 릴리엔을 구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테오의 뜻을 눈치챘는지 릴리 엔도 “그랬었지요.” 하고 자리를 뜰 기세를 보였다.
“비전하, 가시는 거예요?”
“오늘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이따 단체 춤곡 때 같이 춤 주고 싶어요.”
마지막까지 짹짹거리는 아가씨들에게 릴리엔은 일일이 성의 있게 대답을 남겨 주었다. 단체 춤곡을 추는 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아가씨들의 태도는 흡사 약혼반지 하나만을 남기고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을 전송하듯 했다.
“……이쯤 되면 저희가 비전하께 비법이라도 전수받아야 하는거 아닙니까?”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