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 *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아르투아정궁 정원에는 회장의 답답한 공기를 피해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이 벌써 여럿이었다.
마테오는 릴리엔을 작은 분수대 옆 벤치로 이끌었다. 지대가 높아 정원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더러운 소문이 날 가능성도 없는 장소였다.
"괜찮으십니까?"
쉴 만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마테오는 릴리엔의 상태부터 살폈다. 릴리엔은 그런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후후 웃었다.
"네, 태자 전하. 이 ‘숙모’는 괜찮답니다.”
“쿨럭.”
예상치 못한 말에 태자는 기침까지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릴리엔은 즐거운 낯으로 웃고 있었다.
조금 전 마테오가 그녀를 '숙모’라고 부르는 걸 듣자마자 어제 세드릭에게 조카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어라, 이미 조카가 있었군?'
생각해 보면 릴리엔은 여태까지 마테오를 한 번도 조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릴리에이 무심코 생각하는 조카의 이미지보다 마테오의 나이가 많기도 했거니와 마테오를 '황태자'로 인식하고 있는 탓이 컸다.
다미언과 마테오의 사이가 건조하고 데면데면한 것도 한몫했다.
오죽했으면 원작에서 릴리에의 아들과 마테오가 다미언을 흉보며 친분을 다졌겠는가.
게다가 마테오는 그동안 릴리엔을 숙모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나?
릴리엔은 조심스레 짐작했다.
'고작 네 살 차이일 뿐이라 숙모라고 부르기가 어려우신가 봐.
서운하진 않았다. 이쪽도 그를 조카라고 생각 못한 건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있었고 불쑥 장난기가 치솟았다. 그래서 한번 찔러 보았는데 반응이 굉장했다.
릴리엔은 방금 제 장난이 짝사랑으로 심력이 쇠약해진 소년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웃으며 마테오를 다독였다.
“안심하세요. 굳이 저를 숙모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대명사 지칭을 피해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어색하다는데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것참…… 감사하군요…….”
마테오는 잠깐 사이에 다 시들어 가는 얼굴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원체도 싱거운 편인 릴리엔의 장난기가 그 쯤에서 그쳤다는 점이었다.
그제야 마테오도 슬그머니 릴리 엔의 몸 상태를 다시 챙길 기력이 생겼다.
"큼, 이젠 좀 괜찮으십니까?”
“태자 전하께서 이 숙모'를 염려해 주신 덕분에…….”
“.……그만, 이제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단 말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릴리엔이 자기 건강을 화제 삼아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심술궂은 면이 있으셨군요.”
마테오가 툴툴거렸다. 그제야 좀 소년다워 보였다.
“저 때문에 전하께서도 무도회를 즐기지 못해 어쩌지요?”
"예? 무도회를 즐기다니요.”
마테오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럴 마음은 클로드 1세 폐하께서 저를 껴안은 순간부터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는데요.”
“태자 전하, 방금 굉장히 대공전하와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릴리엔은 감탄했지만 마테오의 표정은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실례지만 오늘 제가 뭔가 실수라도 저질렀습……. 이런!”
릴리에이 갑자기 입을 막았다.
"어디가 불편해지셨습니까?”
“괜찮아요, 잠깐 현기증이…….”
“휴게실로 가시죠.”
릴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회장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춤 한 번도 추지 않고 벌써부터 휴게실에 가 버리면 건강상태에 이상이 있다고 대놓고 홍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메슥거리는 듯한 어지러움을 견디는 릴리엔을 보다 못해 마테오가 물었다.
“안에 가서 찬 음료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마침 레모네이드가 있던데.”
새콤하고 달고 시원한 레모네이 드. 그거라면 조금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릴리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테오는 자리에서 일어 서며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회장에서 멀지 않은 이 정원은 제2의 무도회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안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로 보는 눈이 많으면 잠시 다녀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계십시오.”
* * *
마테오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릴리엔은 천천히 숨을 쉬며 어지러움을 달래 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시원한 밤공기 덕인지, 핑 돌던 머리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릴리엔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블란쳇 소공작?”
말라카이트 후작 에단 슈미트입니다.”
말끔히 옷을 갈아입은 에단이 담담히 대답했다. 간명한 자기소개일 뿐이었지만 릴리에이 그가 '블란쳇 소공작'이라는 호칭을 피하고 있음을 알아채기에 충분한 대답이기도 했다.
여러 작위를 가지고 있을 경우 가장 높은 작위가 호칭에 반영된다. 보통 귀족들은 에단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더라도 규칙을 깨는 데 협조하기를 꺼렸다.
“좋습니다, 말라카이트 후.”
누구도 릴리에처럼 순순히 호칭을 고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에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려한 청년이 감사를 표하듯 살짝 목례를 했다.
“한데 내 기억으론 아까 회장에서 이미 사과를 받은 줄로 아는데요.”
굳이 아까 마무리 지은 상황을 다시 한번 사과하러 온 이유가 뭘까? 옷은 갈아입었겠지만 젖은 머리며 찝찝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건…….”
의표를 찌르는 합당한 의문이었다. 에단은 머뭇거리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천천히 흐음, 소리를 냈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라카이트 후, 그대 혹시……"
“예, 말씀하십시오.”
“……나를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까?”
사람이 싱거워 보여서 방심했더니 푹, 하고 사정없이 정곡을 쑤셨다.
에단 슈미트가 쩡하니 얼어붙었다. 표정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청록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과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
"아니면 혹여 내가 오해한 건가요?”
정말 오해를 했을 수도 있겠다.
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굳이 이 남자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기에 빠져나갈 숨통을 터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에단 슈미트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전하. 영명하십니다. 정확히 그런 수치스러운 지령을 하달 받고 비전하께 접근한 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으음, 그러셨나요…….”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렇게 깔끔하게 사과를 하니 더 뭐라고 하기가 그랬다.
'그나저나 수치스럽다라….….'
릴리엔은 직설적인 어휘 선택에서 약간 신선함을 느꼈다. 심지어 에단은 그 대목에서 살짝 이를 갈기도 했다.
과묵하고 선량할 줄로만 알았더니 생각보다 신랄한 구석도 있는 모양이다.
"저…….”
“무슨 할 말이라도 더 있나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비전하께서 어떻게 눈치를 채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눈치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데…….”
릴리엔은 잠시 고민하다 '괜찮겠지.' 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 후께서 황명을 전하러 왔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폐하께서 어지간히 우리를 화나게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만남은 선황의 비석 앞에서 이루어졌다. 여자를 유혹하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장소는 아니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긴가 민가했다.
그러던 것이 조금 전 마리앤과의 일로 확신이 되었다.
“아까 레이첼 부인은 일부러 레이디 마리앤을 두고 갔어요. 마치 마찰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리고 결과적으로 후께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셨죠.”
“그건…… 사실 저는."
“네, 알아요. 저를 확실히 유혹하기 위해서 도와준 건 아니셨겠죠.”
에단이 눈을 깜빡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를 믿으십니까?”
“믿는다기 보다……."
릴리에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만 관찰하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후께서 전심으로 황제에게 협력하고 있지 않다는건.”
그랬다. 에단은 진심으로 선황과 태자를 섬기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엉망이 된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