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래전, 블란쳇 소공작이기 이전에 그는 선황의 기사였고 태자의 검술 스승이었다.
주군에겐 신임을 받고 동료로부터는 인정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선황이 갑작스럽게 승하했을 때, 모두가 피눈물을 흘리며 태자 전하를 보필해서 무사히 황제폐하로 옹립할 것을 맹세할 때.
에단도 그 무리 속에 당당히 속해 있었다.
그러나 블란쳇이 황태자를 배신한 이후, 에단의 처지는 애매하게 붕 뜨고 말았다.
황태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배신자였다. 설상가상으로 측근 중에서는 그가 첫 이탈자였기 때문에 어렸던 마테오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껴 버렸다.
그러나 황제파에서도 에단은 환영받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에단 슈미트의 충심에 대해서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란쳇 공과 그 부인 그리고 마리앤이 희희낙락하는 동안 에단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외로운 길을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조금만 관찰하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란 단순한 말이 마음에 계속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에단 슈미트는 아직 선황의 충신이다.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인정해 준 사람은 여기 릴리엔이 처음이었다.
“후가 날 도와준 것도 아마 레이첼 부인의 계산에는 있었을 거예요. 후의 성격상 누이가 나를 모욕하면 나서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방심하면 선의마저 이용당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후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했겠죠.”
지금 이 상황은 결과적으로는 레이첼의 뜻대로 된 것 같기도 하다며 릴리엔이 조용히 웃었다.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달빛이 내린 릴리에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그전까지도 이 대공비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지금은, 뭐?’
일평생 반듯하게 살아온 남자는 불쑥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데…….”
미처 당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릴리에이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서 더 당황했다.
“……예?”
“나도 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나요?”
“비전하, 어찌. 양해를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문하시면 대답하겠습니다.”
“말라카이트 후께서는 진심으로 나를 유혹할 생각이 없으신데 왜 이렇게 열심히 나를 따라다니는 척하는지 이유가 궁금하군요.”
"결례를 저지른 사람들이지만 제 혈연입니다. 그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더불어 선황께서 영면해 계신 곳에 간 건 한 번도 뵙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말하면서도 에단은 부끄러웠다.
지금 그는 가족과 충성의 대상사이에서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릴리엔은 가타부타 평가하지 않고 말을 삼갔다.
사정이야 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엔이 에단과 어울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릴리엔과 다미언은 서로에게 정절을 약속했다. 그리고 릴리엔은 튜린 사람답게 그 약속에 충실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에단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역시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황제와 레이첼은 그가 감당하지 못할 요구를 해 올 테고 그때 그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때.
"에단 블라시하 슈미트.”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손에 약속했던 레모네이드 잔과 물수건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마테오황태자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네가 지금 비전하를 유혹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으득 하는 소리에 에단이 흠칫 굳었다.
“전하, 그건……."
막상 변명을 하려고 보니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뭐라고 해명하겠는가. 비전하를 유혹하라는 명령을 듣긴 했지만 듣고 따르는 척만 했을 뿐이라고?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어 주겠나. 게다가 상대는 마테오 황태자였다.
“썩 물러가라. 이대로라면 내가 후작을 한 대 쳐서 가십지란 곳에 굴욕적으로 나란히 이름이 오를 것 같으니까.”
"죄송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에단이 목례를 하고 서둘러 정원을 떠났다. 그가 멀리 사라지자 마테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음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상처받을 것 같은 날선 표정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네, 전하. 별일은 없었습니다.”
“압니다. 일단 레모네이드부터 좀 드세요.”
릴리엔은 안개처럼 뽀얀 음료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현기증이 가라앉았던 머리가 조금 더 개운해졌다.
“감사합니다, 전하."
“파트너로 참석했으니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배려를 받았으니 당연히 제가 감사할 일이기도 하고요.”
마테오가 조금 웃었다. 그가 릴리엔의 옆에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꼈다.
잠시 그 상태로 정원에 핀 꽃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던 태자가 입을 열었다.
"에단 슈미트가 진심으로 돌아선 게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알고 계셨군요.”
“열다섯 살이니까요. 여덟 살 때 보지 못하던 걸 보고 있을 뿐입니다.”
스승으로서 믿고 따르던 에단의 배신은 여덟 살의 그가, 아버지를 잃고 쫓겨나듯 궁에서 도망친 마테오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여덟 살도 아니고 오해는 이미 다 풀렸습니다. 제가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 저쪽에서 한마디 해명도 안 했다는 겁니다.
“아하.”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여덟살이라지만 태자였습니다, 저는."
마테오가 신경질적인 투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철모르는 애였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알아서 눈치챌 능력은 없었어도 알아듣게 설명했으면 전후 사정을 참착해 줄 만한 이해력은 있었단 말입니다!”
말하다 보니 열이 오르는지 마테오가 씨근거렸다.
"그런데 해명 비슷한 건 한마디도 않고, 저 혼자 알아서 상황정리만 다 끝내고 떠난 지 벌써 7년입니다. 이러니 제가 그 화상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열이 안 뻗치고 배깁니까?”
화가 나니 묘하게 단어 선택이 늙은이 같은 태자였다.
맘껏 씩씩대고 나서야 마테오는 아차 했다. 상관없는 릴리엔에게 괜히 열을 올렸다 싶어서 민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릴리에이 추억을 떠올리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저를…"
"음, 이건 좀 딴소리이긴 한데…….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게 선대 대제후 각하를 닮으셔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역정을 내는 대제후의 말투를 닮았다.
"윽."
마테오는 찔끔했다. 릴리엔은 정말로 그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하니 뵙고 싶네요."
헤멘린나 대제후께서 하도 역정을 자주 내셔서 화내시는 말투만 좀 옮았다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 마테오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그래서 화가 납니다. 이쪽에서 이해해 주지 않을 거라 단정해 버리고 선을 긋는 그 태도, 매번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사람 성질을 긁는다는 거친 말은 간신히 삼켰다. 릴리엔은 조금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상황, 제 탓이네요."
“……예?”
블란쳇이 황태자파에서 이탈하게 된 계기는 릴리엔과 마리앤의 마찰 때문이었다. 그 설명에 태자가 뚱하게 인상을 썼다.
“그래서 그게 왜 비전하의 탓입니까?”
“예?”
“저도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도 마리앤 슈미트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자식이 소로리티에서 쫓겨났다고 그동안 비호해 준 대제후를 배신하는 그게 대관절 사람의 새끼가 할 노릇…… 아차.”
이래서 성장기의 인성 함양이 중요하다. 마테오가 뒤늦게 말을 삼켰지만 릴리엔은 이미 들을 거 다 들은 뒤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대제후께서 살아돌아오신 것 같고 좋네요.”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끙 신음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하는 마테오의 동작마저 헤멘린나 대제후를 닮아 있었다. 릴리엔은 이번엔 굳이 지적하는 대신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하는 참 모시는 보람이 있는 황제가 되실 겁니다.”
"대관절 어느 사람 새끼가 할 노릇이냐고 화를 내는 모습이요?”
자포자기하고 웅얼거리자 릴리 엔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마테오는 자기가 좀 우스워진 건 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자의 짝사랑은 이미 중병이 된 지 오래였다.
'좋은 황제라.'
가만 생각해 보면 마테오는 황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선황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들어 보았다.
하지만 정작 마테오가 어떤 황제가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좋은 황제가 되느냐 마느냐 이전에 황위를 탈환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너무도 거대했던 탓이다.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좋은 황제가 되실 거예요.”
릴리에 이슬라르에게는 사람 마음의 빗장을 푸는 재주가 있다.
그녀 자신은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사람 마음의 깊은 곳으로 발을 디뎌 버린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음…….”
릴리엔이 독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미리 읽은 재미있는 소설책의 결말을 살짝 알려 주는 사람처럼.
“그냥 그런 예감이 든다고 해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