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12. 다미언이 알았다.
그날 밤.
릴리엔은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귀가했다. 체력을 안배하느라 춤은 딱 한 곡만 췄는데도 도착할 무렵엔 이미 반쯤 눈이 감겨있을 정도였다.
“아이고 비전하, 장하십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제나저제나, 몸이 약한 릴리 엔이 혹시 쓰러졌을까.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던 모린 부인이 얼른 릴리엔을 부축했다.
“으음,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자, 여기 얼른 슬리퍼로 갈아 신으세요.”
구두에서 발을 빼고 푹신한 슬리퍼를 신자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린 부인은 연신 릴리엔을 다독이며 침실 옆 드레스룸으로 이끌었다.
'어……?’
떠밀리듯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던 릴리엔의 눈에 바로 앞에 있는 대공비 전용 서재의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보통은 닫혀 있을 텐데.'
멍하니 생각하는 릴리엔을 모린 부인이 “자, 자!” 하고 이끌었다.
릴리엔은 청소를 하고 문을 꼭 닫는 걸 잊은 모양이겠거니 금세위화감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어차피 대공비와 대공의 침실이 있는 이 층에 올라올 수 있는 사용인은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린 부인과 시녀들이 잽싸게 움직인 덕에 릴리엔은 금방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몸이 편해지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릴리엔은 모린 부인에게 서재 문이 열려 있으니 닫아 달라고 졸린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리고…… 혹시 전하께서는 들어 오셨나요?”
“예,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어요.
한데 할 일이 있으신지 서재에서 계속 안 나오시네요.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추운 데서 고생하셨을 텐데 무사히 돌아 오셨나 궁금하여서…….”
릴리엔은 베개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모린 부인은 코끝이 찡해져서 훌쩍거렸다.
“어쩜, 대견하기도 하시지. 나이도 어린 분이…… 잠들기 직전까지 가주를 챙기는 안주인이라니.
다미언 전하께서 참으로 큰 행운을 만나셨어.”
모린 부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릴리에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뒷걸음질 쳐 방을 나왔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
릴리엔은 아주 피곤했음에도 평소보다 더 이르게 눈을 뜨고 말았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 때문이었다.
'뭐지, 이 이상하게 춥고 허전한 느낌…….’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그녀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늘은 혼자구나.'
지금 침대 안에 누워 있는 건 릴리에 자신뿐이었다.
생각해보니 결혼을 하고 이 집에 온 뒤로 혼자 잠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사저 내에 부부의 금슬에 대한 헛소문이 퍼진 주된 원인, 하루도 빼놓지 않고 릴리엔의 침실에서 잠들던 사람이 없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바쁘셨나보다. 아니면 피곤해서 오랜만에 혼자 자고 싶었거나.
'몸이 추운 탓일까.'
좋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마음이 서늘할까. 릴리엔은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당겼다.
그런데…
'응?’
새하얀 이불 위에 못 보던 핏자국이 동그랗게 나 있었다.
세상에. 어제 무리를 좀 했다고 이제는 자다가 코피라도 흘렸나.
릴리엔은 일단 코 밑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다가 다시 스르르 잠에 빠졌다.
두 시간쯤 뒤에 모린 부인이 그녀를 깨우러 왔다. 부인이 기겁하지 않는 걸 보고 릴리엔은 제가 잠결에 잘 수습한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거기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 *
다미언 루펜바인은 의외로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한량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꼭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티어 인피니티의 마력이 다미언의 무력에만 영향을 미친게 아니었다. 다미언의 천재성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발휘되었다.
그러니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다 미언의 능력보다 태도였다.
비단 일처리에 임하는 태도뿐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면에서 다 미언은 뭐든 대충이었다. 열심히 하는 게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열심히 안 해도 되는 천재이니 애초에 그 정도였더라면 문제도안 됐을 것이다.
측근들이 보기에 다미언은………
기분만 내킨다면 당장 10분 뒤에라도 죽어 버릴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열의조차 없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변덕을 일으킬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던 사람, 절대 자연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변한 건 놀랍게도 결혼을 하고서부터였다.
동맹을 건 정략이었다. 스스로를 매대에 내건 매매 행위나 다름없는 결혼이었다. 측근들 중 누구도 대공 부부에게 금슬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나. 일 해.”
자발적으로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일하는 모습 같은 인간적인 면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고약한 성미가 있어서였다.
그런 사람이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 있었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었다.
아이반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심히 하셨다고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이 변덕이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군요.”
“그럴 거야. 너희 내가 이거 안하면 곧장 비한테 달려가서 징징댈 거 아냐.”
그리고 앞으로는 애꿎은 비한테 가서 질척대지 말고 할 일 있으면 우선 자기 쪽으로 가져오라는 말에 모두가 질겁했다.
"예? 대공 전하께서 뭐요? 비전하 고생 안 시키려고 뭘 해요?”
“아니, 우리야 비전하를 안 거치고 직통으로 일을 처리해 주신다면야 좋지만…….”
그동안 가신들이 염치 불구하고 어린 대공비를 찾아가서 죽겠다.
고 읍소를 한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미언이 이쪽으로 눈길도 안 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알아서 일을 해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긴한데…….
“그래, 뭐. 새신랑이 신부에게 혼이 나가서 이것저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 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
“아니, 그 새신랑이 대공 전하이신데 그게 어떻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허허…… 너무 결혼이 사람을 안정시킨다더니 그게 대공 전하께도 적용이 될 줄이야…….”
“대공 전하께서도 사람은 사람 이셨군요.”
곱씹어 생각할수록 새 대공비가 대단하다 싶었다.
“것 참, 세드릭 이슬라르가 왜 그렇게 누이동생이라면 죽고 못살았는지 알 것 같군요.”
“아, 잠깐씩 뵐 때 하시는 것만 봐도 제 마음이 다 흡족한데. 어련했겠습니까.”
“딸도 아니고 여동생을 결혼시키면서 기세가 흉흉하길래 뭘 저렇게까지 염병을 떠나 했는 데…… 아무래도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라도 비전하 같은 여동생을 시집보내면서 웃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보기에 릴리엔은 다미언을 인간 세상에 붙잡아 두는 단하나의 매개체였다.
그나마 선황 이도엘이 살아 있을 때나 좀 사람 같았지, 선황이 승하한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표홀했던 사람이다.
릴리엔과 결혼하고서부터 갑자기 인간이 된 것처럼 인세의 규칙과 계약에 연연하기까지 했다.
혼전 계약서를 비롯한 수많은 계약서로 철두철미하게 릴리엔과의 결합을 이중 삼중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가신들은 튜린에서 온 신부가 괴물을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의 결합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 중에서도 아이반이 가장 간절했다.
아이반은 바로 어제, 릴리에이 한창 첫 무도회 참석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전하, 전하!”
“귀 안 먹었어.”
아이반이 호들갑을 떤다. 그건다미언에게 있어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대체 뭘 보고 계셨길래불러도 듣질 못하십니까?”
“아무것도.”
아이반은 의심쩍은 눈으로 다미언이 칼같이 치우는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라 갈대로 만든 옛날 파피루스 뭉치 같기도 했다. 아니, 저건 양피지인가?
'웬 고문서를 갑자기 읽고 계셨지.'
아이반은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다미언의 새로운 취미에도 관심이 가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보고할 내용이 우선이었다.
“사저 내에 침입한 세작이 있었습니다. 지하에 구금해 두었는데 전하께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전하, 그만 하세요!”
아이반은 10분 전 자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 그냥 내 선에서 해결할걸!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십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기는요! 아무 일도 없는데 사람을 그 꼴로 만들어 두십니까?”
“끄으으으으… ....”
다미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제 손에 머리채를 잡힌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반쯤 갈려 나간 남자가 피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입가에서 피가 흐를 때마다 깨진 치아 조각도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그가 아직 살아 있다.
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