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92화 (92/155)

92화.

아이반이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간만에 사저까지 침투한 첩자라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손을 쓸 필요가 있는 걸까. 아직 무슨 일도 저지르기 전에 여기 잡혀 온 사람인데.

“기왕 생포한 거 곱게 고문해서 정보도 좀 캐내고 하면 좀 좋습니까.”

다미언은 비웃었다.

“경이 아직 결혼을 안 해 봐서 모르는군.”

이 집은 릴리엔을 데려온 순간부터 그의 둥지가 되었다.

연약한 아내가 거하는 거처. 이 세상 그 어디보다도 안전해야만 했다. 혹여나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아내가 겁에 질려 포르르날아가 버리지 않게끔.

최대한 아늑하고 안락하게.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부족한 것이라곤 조금도 없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평생 내 곁에 있어 줄까, 말까…….’

그런 둥지에 암살자가 스며들었다.

하마터면 릴리엔에게 이 더러운 손이 닿을 뻔했다.

안 그래도 심란하던 차. 다미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눈이 뒤집혔다.

티어 인피니티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참혹했다.

“아직 누구를 노리러 온 건지 확실치도 않은데. 좀 적당히 하시지……."

여전히 투덜대는 아이반을 보며 다미언은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저나 나나 사람 한두 번 죽여 본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왜 저렇게 호들갑이신지.

“사람 안 죽여 본 사람인 척하지 마라, 경.”

"…누가 사람 안 죽여 봤답니까? 적어도 전 웬만하면 경동맥!

그도 아님 배때지! 한 방에 쑤셔서 골로 가는 곳만 노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바로 죽지도 못하는 치명상을 일부러 입힌 적은 없다고요!”

누가 들으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고 했겠지만 아이반은 진지했다.

“요즘 세상에 살인자도 급을 나누는군. 미처 몰랐다.”

“급을 나누는 게 아니라 좀 더 보기 싫은 쪽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이반이 알기로 다미언은 살인을 저지를 때 망설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즐기지도 않았다.

'그저 필요하니 한다. 그뿐이셨는데…….’

쓱, 하얀 얼굴에 튄 남의 피와 살점을 닦아내는 다미언은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이 반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반은 그쯤에서 설교를 포기했다.

“뭐 설마, 비전하하고 싸우기라도 하셨……. 으악 취소! 취소!”

아이반의 경솔한 입에서 릴리에 이 언급된 순간, 다미언의 억센팔뚝에서 핏줄이 불뚝불뚝 솟았다.

“전하, 그 힘으로 다시 한번 박으시면 걔 완전 죽어요!”

누가 보면 아이반이 사람의 생명을 아끼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 전에 털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배후도 아직 못캤는데 죽이시면 안 된다고요!”

“끄어어어…….”

차라리 죽여라 이 자식들아

“누차 말씀드리지만 고문을 하실 거면 좀 정도껏 하시란 말입니다. 으아 이거……”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상태를 살피니 보다 심각했다.

“이렇게 작신작신 으깨 놓으셔서 어떻게 취조를 합니까. 큰일이네.”

“말은 할 수 있을 거다. 안 하면 엄살 부리는 거니까 손가락 하나씩 꺾어.”

“이 지경이 됐는데 손가락을 꺾는다고 압니까?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 한계가 있다고요.”

주종 간에 참으로 유익한 대화였다.

“어디 보자. 저기요,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흐어…….”

“곱게 죽고 싶으시죠? 아시다시피 지금 저희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거든요? 부부 싸움을 좀 하셔 가지고.”

“안 했다.”

안 하긴 개뿔. 아이반이 내심으로만 험한 욕설을 덧붙였다.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비전하한테 깨지고 여기 와서 화풀이람.

"자 그럼 묻겠습니다. 대답 잘하시면 으깨는 건 그만하고 한번에 보내드릴게요."

“흐어어…….”

“블란쳇 공작 쪽에서 보내서 온 거죠? 맞으면 눈꺼풀 깜빡여 보세요.”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여기에 온 건 누굴 노리고 온 겁니까?”

눈꺼풀이 깜빡인다.

“네에, 그러셨군요……. 그럼 혹시 누굴 노리고 오셨습니까? 1번 대공 전하. 2번 황태자 전하. 3번 대공비 전하. 대답 잘 하셔야 해요.”

남자는 피범벅이 된 상태로 피눈물을 질질 흘리며 짧은 순간 치열하게 고민했다.

누구를 골라야 그나마 여기서 편하게 저승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대공 본인을 고르면 괘씸죄로 더 끔찍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황태자를 골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나마 3번 대공비가 제일 만만해 보였다.

남자는 간신히 세 번 눈꺼풀을 깜빡였다. 자기가 방금 요단강으로 편히 갈 수 있는 직항 승차권을 찢어 버린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반이 두려운 얼굴로 다미언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도 모르게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된 불쌍한 첩자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말았다.

“아이반 아이작.”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이 하게 빛났다.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나가.”

* * *

주제도 모르고 다미언의 아내에게 범접하려 든 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소싯적부터 함께 전쟁터에서 굴러 웬만한 꼴에 단련이 된 아이 반조차 헛구역질을 할 뻔한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불과 30분 사이에.

하지만 다미언의 조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곱게 포장해서 블란쳇공작가로 보내라.”

“저걸요?”

“마침 같은 황도에 있으니 배달시간은 얼마 안 걸리겠군.”

배달 시간…….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어휘 선택이다.

“그야 그렇겠죠……. 많이 걸려 봐야 한 30분…"

아이반은 넋이 나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미언이 올라간 뒤 창고 문을 고이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될 말이다.'

아까 이자가 분명 제 스스로 대공비를 노리러 왔다고 하긴 했다. 그러나 고통에 못 이겨 죽고 싶은 마음에 거짓으로 자백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었다.

단순한 첩자인지 암살자인지도 판가름이 안 났는데, 대뜸 죽은 시체를 공작가로 돌려보내 개싸움의 신호탄을 울릴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대화의 개회당일. 엑셀시어가 귀 밝고 눈 좋은 귀족들로 드글드글한 판국이 아닌가.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저, 아이반 경. 어찌할까요.”

“뭘 어쩝니까. 일단 기온을 조절할 수 있는 입 무거운 마법사를 수배해서 통째로 얼려 놓으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저녁에 릴리엔이 돌아와 화해하고 나면 도로 기분이 좋아져 시체를 돌려주란 명령은 취소할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여길 치우는 걸로 일이 끝날 수도 있다.

아이반은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결정했다.

* * *

신께서 아이반 아이작을 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이반 아이작은 엑셀시어의 각 가정에 배달된 《페이지 식스》를 허허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블란쳇 소공작 에단 슈미트:대공비의 남자]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단에 이어진 기사에서 릴리엔과 에단은 정치적 서사에 희생된 비극적인 연인이 되어 있었다. 다미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을 잔인하게 찢어 놓은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로 묘사되었다.

'아니, 피도 눈물도 없는 건 맞는데…….’ 어쨌든 사실과 상상력을 기묘하게 뒤섞어 결과적으로 날조가 된 글을 보며 아이반은 절감했다.

'이래서 칼보다 펜이 강한가!

사람 여럿 잡을 날조 기사였다.

심정만 같아서는 족히 만 부는 뿌려졌을 이 악마의 소설을 죄다 긁어다 화형식을 치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반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한 부를 구겨서 벽난로에 던져 넣는 것뿐이었다.

'죽었다, 진짜.'

사표 내고 어디 먼 나라로 튀어버릴까?

실제로는 릴리에에게 요만큼의 해도 끼치지 못한 첩자를 다미언이 맨손으로 어떻게 뼈와 살을 분리했는지 구경한 게 바로 어제였다. 심지어 그 시체를 아직까지 처리를 못 하고 보관까지 하는 중이지 않은가.

이 날조 기사를 쓴 기자와 신문사의 운명이 어찌될는지는……

아침 먹기 전이라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처리를 하는 게 십중팔구 자신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아이반은 그만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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