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 *
고백하자면 릴리엔은 《페이지식스》를 제대로 읽어본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알았나 싶은 사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날조된 로맨스. 남의 일이었다면 깜빡 믿었을지도 모를 만큼 사실적이었다.
“이런 기사를 쓰는 사람이 분명 귀족은 아닐 텐데.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는 건지 신기하구나.”
“비전하, 죄송합니다만 지금 그런 데 감탄하고 계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릴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리타가 조용히 문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간밤에는 잘 주무셨어요, 비전하?”
여느 때보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다미언이 있었다.
“전하.”
릴리엔은 최대한 침착하게 《페이지 식스》를 두 번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미언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한 걸음 천천히 릴리에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어젯밤에 바쁘셔서 늦게 들어오신단 소식은 들었는데, 잠은 좀…… 으읍.”
다미언은 소파를 팔로 짚고, 고개만 뒤로 꺾어 자기를 올려다보는 릴리엔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
“으음.”
난잡하고 질척한 호흡 소리.
어머. 남사스러운 광경에 시녀들이 입을 가리고 시선을 공유했다.
절대 눈을 가리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 래도 뜻밖의 스캔들이 하룻저녁떨어져 있던 대공 부부가 아침부터 사랑을 불태우는 계기가 될 모양이었다.
'하긴, 무도회도 함께 못 가고 경비만 서셨는데 비전하께선 첫 선을 보이시자마자 스캔들이 나셨으니…….’
‘전하께서 웃고 계셔도 속이 말이 아니실 거예요.'
'왕비의 열락에서 남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잔뜩 벌을 주실지도 몰라!'
'꺄악!'
얼굴을 붉힌 시녀들은 재빨리 응접실을 비웠다.
다미언이 주는 감각을 '좋다'고 받아들이게 된 릴리엔이었다. 한번 눈을 뜨니 그 다음 진도는 일사천리였다.
“하아…….”
긴 입맞춤 끝에 몽롱해진 아내의 뺨이 발그레했다. 다미언은 간만에 혈색이 돌아 사랑스러운 뺨, 눈꺼풀, 이마 위로 키스를 남겼다.
릴리엔은 조금씩 안심했다. 다 미언은 아무래도 기사를 못 본 모양이었다. 아니면 봤지만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거나…….
'응?’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왜일까. 릴리에이 멍하니 고민하는데 다미언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간밤에는 즐거우셨나요, 나의 비?”
여전히 홀릴 만큼 부드러운 미소에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기묘하게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전하?”
“비께서 즐거우셨다면 기쁘지만, 오늘 아침 제 기분은 쓸쓸하고 서운하고 서글프네요…….”
아. 봤구나.
게다가 무지하게 신경도 쓰고 있었다.
따끔했던 마음이 소르르 아물었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미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미언이 슬프지만 애써 미소짓는 그런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릴리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릴리에의 옆자리에 앉았다.
풀이 죽었는지 당장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시도해야 할 사람이 얌전히 릴리엔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절로 안쓰럽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전하.”
“비께서는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남의 눈에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홀로 밖에 내놓은 이 사람의 잘못이니까…….”
하아, 내쉬는 한숨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덕분에 릴리엔은 훤한 대낮부터 안겨 드는 다미언을 만류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스캔들이 나긴 났으니까.
'나를 유혹하라고 보냈으니,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이렇게 공론화 시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이성 관계로 모함에 빠진 게 처음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릴리엔은 고민 끝에 어설프게 말을 돌리려 시도했다.
“어제 경비 업무는 어떠셨나요? 고생이 많으셨지요?”
“아니요. 그보다는…… 쓸쓸했어요.”
쓸쓸했단다.
말끄러미 릴리엔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촉촉했다. 다미언은 마치만 하루 정도 주인을 만나지 못한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것도 뽀얀 금빛 털을 가진, 귀가 크고 순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골든리 트리버…….
아이반이 들었다면 “지옥견입니다, 지옥견! 케르베로스 머리 중 하나요!" 하고 피를 토했을 생각이었다.
“비의 첫 무도회에 함께하고 싶었는데.”
“앞으로 같이 참석할 기회는 많을 거예요.”
시무룩한 다미언을 어떻게든 달래 주고 싶어서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미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다미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릴리에이 “전하?” 하고 불렀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서 안 해도 될 행동을 했나?
릴리엔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미언의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기이한 표정이었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흐느껴 우는 처럼 보이기도 하는.
“전하, 왜…….”
"기뻐서요.”
기쁘다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다미언은 릴리엔에게 더 이상 표정을 관찰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릴리엔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그가 일부러 얼굴을 숨긴다는 생각이 든다면 과한 억측일까.
릴리엔은 다미언의 목덜미를 서툴게 어루만져 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듬더듬 사과했다.
“음…… 전하, 먼저 제 경솔한 행동으로 저런 기사가 나서 죄송합니다.”
“비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닌데요. 속상하긴 하지만…….”
“아닙니다. 속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미언은 계획된 처량하고 가엾은 척에 홀딱 속아 넘어가 우직하게 사과하고 있는 릴리엔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자기 무덤을 판 줄은 알고 있을까?'
아무래도 이제 슬슬 나서도 좋을 타이밍이긴 한 것 같았다.
“정말 제게 미안하다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다미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릴리엔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언제 강아지처럼 안겨 애교를 부렸나 싶게, 릴리엔은 손쉽게 그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겼다.
다미언에게 미안한 탓인지 오늘의 릴리엔은 평소보다 훨씬 더 순순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여쭤보면 대답해 주실 건가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대답이라면…….”
섣불리 그렇게 대답하면서 릴리 엔은 생각했다. 아마 다미언이 어젯밤에 에단 슈미트를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어볼 거라고,물어보면 저쪽에서 릴리엔을 유혹할 수단으로 에단을 보냈지만 에단은 그녀를 유혹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런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고 잘 설명해야지.
그렇게 결심한 릴리엔에게 다미언이 물었다.
“……아직 죽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
마주친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바닥이 없는 우물 같았다.
순간 릴리엔은 직감했다.
다미언이 알았다.
“전하….”
릴리엔은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5년짜리 목숨이란 걸 털어놓는 순간 존재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릴리 엔은 꿋꿋하게 견뎠다.
예전에야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다미언은 그녀를 적어도 아내로서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었다. 조심스럽고 무딘 릴리에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를 버리지 않아, 이 사람은.'
그렇다면 이 순간 릴리엔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에게 정직하게 털어놓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릴리에이 입을 열려는 순간.
“전하, 저…….”
사실은, 하는 고백은 다미언의 입맞춤에 먹혀버렸다.
가볍게, 깊게.
순식간에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입맞춤보다 더 릴리엔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한 건 다미언에게서 폭발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이었다.
“읏, 전, 하…….”
손끝이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해일과도 같이 압도적인 마력에 릴리엔은 몸을 떨었다.
다미언에게 딱히 릴리엔을 해할 생각이 있지는 않겠지만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미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미언이 입술을 뗐다.
숨을 조르는 것 같던 마력의 농도가 점차 엷어졌다.
“전, 하…….”
“쉿.”
다미언의 입술이 다시 다가오자 릴리엔은 흠칫했다. 그 반응에 다미언은 쓰게 웃고는 릴리엔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생각해보니까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요.”
릴리엔은 답답해졌다. 다미언은 알아야 했다. 이건 이렇게 감추고 숨긴다고 해서 나을 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다미언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내가 말하지 말라는 건 듣기 싫어서가 아니에요. 들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