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 순간 릴리에의 머릿속에 한가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다미언은 이야기의 최종 흑막이다. 그는 정신을 공격하는 고대 병기 자그레브에 당해 영혼의 한 조각을 빼앗긴데다 릴리에 이슬라르의 죽음을 계기로 완전히 미쳐 버린다.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릴리엔 이슬라르도 자살로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분명 그때는 죽음의 방식이 기폭제가 됐다고 했어.’
지금은 그녀가 자살하려는 게 아니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확신할 수 없는 불안 요소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긴 하지만 릴리엔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다미언이 픽 웃었다.
“그래요, 내 비는 설득이 통하지 않는 튜린 사람이었지.”
다미언이 갑자기 릴리엔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곧 그가 가져온 건 작고 폭이 좁은 단검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세공품처럼 보이지만 송곳 같은 날을 가진 칼이었다. 날 전체에 기이한 예기가 흐르고 있었다.
불길했다.
“마도시대의 봉인구에요. 찌르면 상대의 마력을 봉인할 수 있는 주술이 걸려 있어요.”
“갑자기 그건 왜…"
당황하는 릴리엔의 손을 잡고, 다미언은 말없이 웃으며 그 빛나는 은빛 송곳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이렇게 바깥으로 쥐어야 해요.”
다미언의 손아귀 안에서 칼을 을잡게 된 릴리엔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전하!”
다미언은 차분하게 릴리엔의 손을 움직여 칼끝으로 자기 목을 눌렀다. 릴리엔이 기겁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진정해요. 찔러도 죽지 않으니까.”
“이러지……!”
“망설이면 안 돼요. 여기가 경동맥이에요. 날이 안 보일 때까지 다 쑤셔 넣어야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안 합니다!”
“해야 해요.”
릴리엔이 처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다미언은 강경했다.
“비께서 하려는 그 말을 들으면 난 분명 제정신이 아니게 될 거에요. 제정신이 아닌 난 상당히 위험해요.”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 내 마력은 본능적으로 그걸 최우선적으로 수복하려고 해요. 다른 사고를 칠 여력이 없어지는 거죠.
정확히 찌르면 한 시간 정도는 안전할 수 있을 거예요.”
농담이 아니었다. 다미언은 진심이었다. 미친 것 같지만 릴리 엔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사랑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해도, 이게 사랑이 아닐 수가 없었다…….
릴리엔의 손끝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깨달음과 경악이 번지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미언이 천사처럼 웃었다.
그래, 당신은 못 하지. 내가 죽지 않는대도 절대 찌르지 못해.
그러니 말할 수 없어.
그는 알면서 물었다.
“어떻게 할래요?"
다미언이 손을 놓자 릴리에의 손에서도 비수가 미끄러졌다. 한 순간도 본인의 의지로 잡아본 적은 없다는 듯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릴리엔의 몸 전체로 번졌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릴리엔을 다미언이 조용히 끌어안았다.
끔찍하다는 듯 밀치고 뺨이라도 맞아도 할 말 없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짓이었다. 그러나 릴리 엔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와락 다미언을 껴안았다.
“......!”
혐오와 경멸을 예상했던 다미언은 깜짝 놀랐다.
“화…… 나신 거, 아니었나요?”
“났어요!”
당연히 화가 났다. 자기를 찌르라고 칼을 쥐여 주는데 그 말과 행동이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너무 놀라고 무서웠다.
릴리엔이 아무리 찌르지 않으려 해도 방금의 상황이라면 그를 제 손으로 찌르고 말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겁이 났던 만큼 지금은 화가 났다.
그러나 목이 꿰뚫릴지언정 자신이 죽는다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그 마음을 도저히 밀쳐 버릴 수가 없었다.
릴리엔은 왈칵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저한테, 어떻게…….”
"네, 잘못했어요. 울지 말아요."
“거, 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잘못인 건 알아요.”
다신 안 그런다고는 말 못하지만. 품 안에서 흐느껴 우는 릴리 엔을 다독이며 다미언은 생각했다.
‘오늘 가르쳐 준 걸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면 혼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다미언루펜바인을 제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릴리엔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릴리엔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다미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껴지던 어긋남과 그가 숨겨왔던 아슬아슬함, 이따금씩 내비치는 변덕 같은 것이 일시에 수면 위로 올라와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릴리엔은 그런 다미언을 두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수면 위로 올라온 그 괴물이 그녀를 사랑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다며 칼을 쥐여 주고 약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건 아주 끔찍하지만……….
사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 * *
에단이 릴리엔을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에 마리앤은 광분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쨍그랑!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마리앤이 가장 아끼는 인형이 박살이 났다.
“마리앤!"
블란쳇 공작부인은 자기가 더 마음이 아픈 표정으로 발을 동동굴렀다. 얘가 어쩌려고 이렇게 후회할 짓을 하지?
“마리앤, 진정하고 엄마랑 얘길 좀 하자. 응? 네가 아끼는 물건을 이렇게 부수면 속상할 사람은 너잖니.”
“듣고 싶지 않아! 모두 날 속였잖…… 아악!”
와장창! 인형 진열장까지 내던지다가 결국 사고가 났다. 마리 앤은 쭉 하고 베여 버린 제 팔목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마리앤! 내 아기!"
다친 마리앤을 보는 블란쳇 공작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마리앤을 껴안았다.
“의사, 당장 의사를 불러! 내 아가!”
"어, 어, 엄마… 피가, 피가….”
“세상에, 이걸 어쩜 좋아!”
피가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 모녀가 야단법석을 떨었다. 결국이 사태는 블란쳇 공작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다.
"이 무슨 소란이오."
가장 긴박한 순간은 다 지나고서야 겨우 얼굴을 내미는 남편을 보고 블란쳇 공작부인이 원망스럽게 쏘아붙였다.
“왜겠어요? 당신이 에단에게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녜요.”
블란쳇 공작은 혀를 끌끌 찼다.
아내는 늦둥이인 마리앤을 오랜 산고 끝에 낳았다. 그 때문인지 사소한 것이라도 딸아이의 일이라면 이성을 잃곤 했다.
그러나 그런 아내와 달리 블란 쳇 공작은 손익 계산이 빠른 자였다. 그가 딸아이를 아끼는, 혹은 그런 척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실 블란쳇 공작은 황태자비자리에 딸아이를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튜린 선제후의 딸은 대공비로 끝나겠지만 내 딸은 황태자비에서 황후로 만들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마리앤이 소로리티에서 쫓겨나면서부터였다.
블란쳇 공작은 대노했다.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얄미운 튜린 놈의 딸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해서였다.
미래의 대공비를 건드리며 마리 앤의 입지는 대번에 좁아졌다.
깐깐한 헤멘린나 대제후는 원래부터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던 차에 튜린 선제후의 딸을 건드리며 완전히 척을 져버렸다. 이에 따라 황태자비가 될 희망도 사라졌으니 황태자를 지지할 이유도 없었다.
블란쳇 대공은 그 즉시 황제 쪽으로 돌아섰다. 차라리 이쪽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 있는 대제후가 두려워 정보를 팔 최적의 타이밍을 잡는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침묵해 왔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대제후가 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데 황제의 대답은 이랬다.
"너무 늦었군, 블란쳇 공작.”
그러면서 초대장 하나를 보내주었다. 결혼식 초대장이었다.
“조금만 일찍 왔어도 이 일로 그래. 적어도 악투라 백작령 정도는 하사했을 텐데.”
악투라 백작령은 곡창지대였고 조세 수입이 많았다. 게다가 백작위 하나를 더 보유하면 블란쳇은 당당히 대영주 반열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망설임과 두려움 때문에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황제의 공식 정부가 그를 불렀을 때 블란쳇 공작은 다짐했다.
무슨 일을 시키든 최선을 다해 해내리라. 그리고 악투라 백작령을 손에 넣고 대영주 반열에 올라서리라. 마침내는 선제후를 넘어서는 황제의 척신이 되고 말것이다!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있는 한, 죽은 튜린 선제후를 이길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나다름없었다.
야욕에 불타는 블란쳇을 바라보던 황제의 공식 정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비와 블란쳇공의 아들이 연치가 어울리는데 혼담을 넣을 생각을 해 보진 않았나요?”
블란쳇 공작은 레이첼이 말하는 바를 곧장 알아들었다. 고집 센아들이 순순히 따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일단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들은 싫은 내색을 하기는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그에게 순종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이 아비가 혼자 잘 되자고 이러는가! 다 저가 물려받을 것을 일구려고 이러는 것인데.'
오랜만에 아들이 기특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그 년을 유혹해야 한다니요! 그 년이 벌써부터 얼마나 기세등등한지 아세요, 아버지?”
“마리앤, 그게 왜 중요하냐. 어차피 다 연극인 것을!”
그 다 된 밥상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 딸이 이렇게 발작을 하고 나설 줄이야.
하지만 철없는 딸은 대공비가 절 얼마나 우습게 보겠냐며 펄펄뛰었다. 그걸 말려도 모자를 판에 아내는 옆에서 아기가 불쌍하다며 대성통곡을 하질 않나. 공작은 골치가 아팠다.
“시끄럽소! 아녀자들이란 이래서…….”
결국 공작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믿고 있던 아버지의 배신에 마리앤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눈이 뒤집혀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마리앤!"
이러다 애를 잡겠다! 다급해진 공작부인이 달랬다.
“얘야! 이러지 마렴, 응? 엄마가 누구니? 엄마가 다 해결해 줄게!
우리 아기를 무시한 그 년을 엄마가 아주 죽여 버릴게. 응?”
그제야 파들파들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마리앤의 숨이 돌아왔다.
시뻘개진 얼굴로 마리앤이 겨우 말했다.
“약속……."
“엄마가 어디 못 하는 거 봤니?
조금만 기다려라, 응? 이렇게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마리앤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은 애처로운 마음에 딸을 꼭 껴안아 주었다.
“엄마만 믿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