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95화 (95/155)

95화.

* * *

공작부인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공작은 진절머리를 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왔소!”

“진정해요, 여보, 아까는 제가 잘못했어요. 아이가 난리를 피우니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

“그런데 생각해 봐요, 당신. 우리 마리앤이 얼마나 분하겠어요.

당신도 튜린 선제후를 겪어 봐서 알 거 아니에요. 그 집안이 얼마나 진절머리나고 고고하게 구는지.”

그렇게 생각하니 딸아이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공작은 답답했다.

“아니, 그래도 일을 대국적으로 봐야 할 거 아니오. 내가 언제 그 계집을 며느리 삼는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자존심이 있잖아요.”

공작부인이 살살 남편을 달랬다.

“그래서 말인데 여보, 이럴 거 없이 차라리 그 년을 죽여 버려요. 네?”

“뭐?”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당신, 얼마 전에 대공저에 세작도 잘심어 놨다면서요.”

“하지만……."

“공을 세워야 한다면서요. 악투라 백작위를 받아야죠.”

블란쳇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태자를 죽이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잖아요. 일이 잘 되어도 황태자를 죽인 죄를 우리가다 뒤집어쓰고 토사구팽 될 가능성이 커요.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려면 대공비 정도가 딱이죠.”

공작의 귀에 부인의 설득이 슬슬 타당성 있게 들리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은 마지막으로 가장 달콤한 유혹을 건넸다.

“그 얄미운 튜린 선제후가 저승에서 요절한 딸을 만나도록 해줘요, 여보.”

“........”

블란쳇 공작은 언젠가 궁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튜린 선제후가 황태자였던 이도엘과 함께 걷고 있었다. 반면 그는 그 대화에 낄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막 태어난 선제후의 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작은 불현듯 그때 선제후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를 떠올렸다.

“악투라 백작위를 생각해요, 여보, 우린 대영주가 될 거예요. 당신은 황제 폐하께서 가장 신임하시는 공신이 될 거고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혹시 태자가 태어나고 우리 에단이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손녀가 태자비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드디어 외척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의 다 넘어온 공작에게 부인 이 속삭였다.

"그 년을 죽여요, 여보.”

* * *

“비전하. 안네쥬 부인으로부터 소포가 왔습니다. 뭔가를 따로 부탁하셨다고…….”

"아.”

멍하니 있던 릴리에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게 있었다.

“거기다 두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모린 부인이 잘 포장된 상자를 내려놓았지만 릴리엔은 그 상자를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모린 부인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전하, 혹시 몸이 안 좋으시면 오늘 저녁 연회에도 참석하기 어렵겠다고 전갈을 보낼까요?"

이번 개회연은 특별히 3일 동안 열리는 행사였다. 어제 다미언과의 일이 있고 나서 전신의 힘이 풀려 버린 릴리엔은 그대로 두번째 무도회를 빼먹었다.

공교롭게도 스캔들이 난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릴리에의 불참을 두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오죽하면 대공비가 대공에게 맞아 눈에 멍이 드는 바람에 못 나오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타블로이드에 실렸다.

고 했다.

'오늘까지 빠질 수는 없어.'

오늘까지 빠져 버리면 개회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적이 한번도 없는 셈이 된다. 불륜 스캔들쯤이야 이 나라에서는 다들 시즌마다 거쳐 가는 이벤트라고 웃어넘긴다고 쳐도 곧바로 불화설이 나는 건 곤란했다.

'준비를 해야지…….’

릴리엔은 피곤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당장 처리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지만 복잡한 생각을 쫓아내는 덴 실패했다.

“잠시만 시간을 줄래요? 삼십분 정도만.”

모린 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릴리엔은 착잡한 얼굴로 안네쥬 부인이 보낸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이 안에는 릴리엔이 다미언을 위해 주문한 셔츠가 들어 있었다.

다미언에게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회청색 기요문 실크로 만든 셔츠였다.

'지금 이걸 주기는 타이밍이 좀.'

어제 일 이후로 다미언과는 서로 아무 일 없는 척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태연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다미언과 달리 릴리엔은 지금 몹시 심란하고 데면데면한 상태였다.

잠깐 눈에 띄지 않게 버릴까도 싶었지만 바쁜 시기에 급한 부탁을 들어준 안네쥬 부인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대공비가 내놓은 쓰레기통에 누가 봐도 다미언의 사이즈에 맞는 셔츠가 들어 있는 것 자체도 너무 눈에 띄는 짓이었다.

특히 모린 부인은 다미언과 릴리엔의 금슬이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고령인 부인을 쓸데없이 놀라게 할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릴리엔은 곱게 포장한 소포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숨겨두었다.

'여기 두면 일부러 누가 들춰보진 않겠지.'

표정을 가다듬은 릴리엔은 설렁줄을 당겼다.

“네, 비전하.”

“준비를 시작하죠.”

“곧바로 모시겠습니다.”

* * *

릴리엔의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첫날과 같은 대대적인 준비는 생략되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모린 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고 간곡히 주장하는 몇 가지 절차는 피해갈 수 없었다.

“아유, 우리 비전하는 피부가 참 투명하셔서 걱정이 없네요."

“병색이 아닐까요.”

아차…….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본심이 입 밖으로 흘러 나오고 말았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그래도 이렇게 여드름 하나 없이 고우시니까요!”

“맞아요! 머릿결도 어찌나 좋으신지! 저희는 부스러기같이 막 일어나는데 비전하는 이렇게 만지면 차가운 비단을 만지는 것 같아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시녀들이 필사적으로 릴리엔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릴리에도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고맙다. 하지만 너희들이 하고 있는 머리도 참 귀엽구나.”

“헤헤…"

칭찬을 받은 시녀들이 더욱 바지런히 손을 놀렸다.

오늘 릴리에의 옷은 도자기 같이 연한 청록색이었다. 모린 부인이 감탄했다.

“안네쥬 부인이 적극 권하더라니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얼굴에 훨씬 혈색이 돌아 보여요, 비전하.”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니 그런 모양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칭찬 아닌가.

“맞아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복숭아 같아 보여요.”

"그만. 매일 이런 칭찬을 들으면 나를 굉장한 미인으로 착각하게 될 것 같구나.”

“어머, 그렇게 생각하셔도 전혀 착각이 아니에요. 그렇죠, 대공전하?”

흠칫.

다미언의 등장에 릴리엔이 깜짝놀라 어깨를 바르르 떨자 시녀들은 대공비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키득거렸다.

이미 문 앞까지 걸음했을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릴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뒤돌아섰다.

“오셨어요, 전…….하."

그러나 릴리엔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 옆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다미언이 회청색 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푸른 씨줄과 회색 날줄이 엇갈려 얽힌 비단으로 만든 맞춤 셔츠는 다미언의 크림 같은 살갖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릴리에이 말을 잃자 다미언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비께서도 오늘 아름다워요.”

"…한 적 없는 칭찬을 들으시다니 대단한 청력이시네요.”

“그야 당연히 칭찬해 주시는 거 아닙니까? 비께서 저를 위해 수도 의상실 중 가장 유명하고 바쁜 ‘네쥬 리아파'를 운영하는 안네쥬 부인께 직접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걸 마다하지 않고 간곡히 부탁하여 맞춰 주신 것인데.”

속사정을 알아도 너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귀한 옷을 입었으니 당연히 예뻐 보여야죠.”

굳이 어울리는 걸 안 찾아 입어도 절세미인인 남자가 저런 소릴 하니까 더 얄미웠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준비가 덜 끝났으니 나가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전하?”

"이런, 여기서 더 아름다워지시면 오늘 비를 모시고 나가고 싶지 않…….”

“전하.”

릴리엔의 입술에 걸린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다미언은 알 수 있었다.

'눈이 안 웃고 있군.'

“저는 준비가 아직 덜 됐다고 말씀드렸어요.”

“명을 받잡도록 하지요.”

그가 일부러 더 정중하게 받아 치자 마침내 릴리엔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영악한 다미언은 생각했다.

'됐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다미언은 그제야 안심했다.

화를 내고 삐죽대는 건 좋은 신호였다. 거기다 실소나마 해서 웃기기까지 했으니 적어도 이로서 릴리엔은 더 이상 얼굴 보기 어색하다거나 심란하다는 이유로 데면데면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좀 위험하니까.'

릴리에이 다미언을 피한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행동이었다. 비유하자면 곰 앞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을 시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였더라. 아직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릴리에의 서재 책상 서 랍에 숨겨져 있던 문서를 발견한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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