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96화 (96/155)

96화.

선천성 마력 부족증.

꼭 그와 정반대인 것 같은 병명이었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다 미언은 웃었다. 꼭 릴리엔과 제가 날 때부터 이렇게 짝지어지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는 미친 생각을 하면서.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아래에는 상세하게 릴리엔의 병세가 진행되어 생명력을 잃게 되는 과정과 죽음에 이르는 증상이 이곳저곳 산발적으로 적혀 있었다.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거나, 안색이 창백해지고 쉽게 멍이 들며 그 밖에도 먹지 못하고 피로하고 열이 나는 등 갖가지 증상이 적혀 있었다.

끔찍한 점은 다미언이 증상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릴리엔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읽어 내려갈수록 다미언은 웃음을 잃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은 다음과 같았다.

[이 병에서 이른 죽음은 필연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목적지와 같은 것이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바깥에서 릴리엔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미언은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그는 가느다랗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서재 문 안쪽,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문 틈 사이를 주시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릴리엔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러자 더욱 현실 감이 들지 않았다.

죽는다고?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릴리에 이 잠들어 있는 침실에 숨어들어 있었다.

다미언은 끔찍하게 화가 난 동시에 감정이 뒤엉킨 나머지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었다.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력 폭주의 전조였다.

그는 잠든 릴리엔을 보며 '차라리 같이 죽으면 어떨까'하는 생각마저 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정말로 릴리엔을 죽이고 따라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기랄.’

다미언은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마력봉인구가 하나 있었다. 은제 스틸레토 형태의 마도시대의 물건으로 술식이 새겨져 있어 이 칼로 찌르면 상대 방은 잠시 마력을 봉인 당한다.

언젠가 클로드가 암살에 사용했지만 다미언에게는 큰 효과가 없다는 게 증명된 물건이었다.

그래도 폭주할 것 같을 때 제 몸에 찔러 넣으면 진정할 시간 정돈 벌어준다는 걸 알아챈 이후부터 다미언이 늘 들고 다니는 물건이기도 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감정이 고조되면 그의 마력이 멋대로 이 일대를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다미언은 단검을 꺼내 뾰족한 은빛 칼날을 망설임 없이 제 옆구리 쪽으로 향했다.

'윽….'

죽지 않는다는 건 이미 수차례 사용하면서 증명했다. 일부러 옷으로 덮인 부분을 찔렀는데도 칼자루를 타고 흐른 피가 똑 하고 시트 위에 자국을 남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릴리엔은 잠들어 있었다. 다 미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의자 위로 허물어졌다.

“크….”

잇새로 신음을 삼키며 단숨에 칼을 뽑았다. 주술이 걸린 칼에는 살점 하나 묻어난 곳이 없었다.

칼을 뽑자 곧바로 마력이 봉인 주술에 대항하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복막과 장기와 혈관과 피부가 차례로 아무는 동안 다미언은 피와 눈물에 젖은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릴리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는 몸이 아픈 그녀를 놀라게 할까봐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무도 모르는 그날 밤 일 이후로 다미언은 이렇게 줄곧 돌아버릴 것 같은 상태였다. 간신히 눌러 참고는 있지만 조금만 자극돼도 폭탄처럼 터지고 말 것이다. 스캔들 기사를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릴리엔을 찾아갔던 것처럼.

그래서 릴리에에게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고집 있고 선한 그의 아내는 끝까지 다미언이 알려준 방법을 쓰길 거부했다.

그러니 별 수 없었다. 릴리에이 지뢰라도 밟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소한 그를 피하지 않도록 움직이는 수밖에.

‘도박하는 셈 치고 예쁘게 차려 입고 오길 잘했지.'

아슬아슬하겠지만 당분간은 이정도 미봉책으로 덮어둘 생각이었다.

다미언은 손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언제든지 그의 심장을 찌를 준비가 된 얼음송곳 같은 단검이 만져졌다.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 *

준비를 마친 릴리엔은 오늘도 예뻤다.

하늘 같은 청록색 드레스에 아이보리색 숄을 걸친 릴리엔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시녀들에게 긴 치맛자락을 맡기고 주변을 살펴보며 신중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다미언을 향해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를 향해 걸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술렁이던 다미언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 앉았다.

황도 엑셀시어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황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미처 모르겠지만 조금 전 다미언의 마력 폭주에 휘말려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죽게 될 확률이 약간 줄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가만 보니 다미언과 색을 맞출 생각이었는지 분홍색이었던 릴리 엔의 귀걸이가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두 사람의 첫 무도회 동반 참석이구나.

문득 다미언이 깨달은 사실 덕분에 대참사의 확률은 이제 거의 0에 수렴하기 시작했다.

다미언이 팔꿈치를 내밀자 릴리 엔이 조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쑥 끼우고는 그의 팔을 잡았다.

“가실까요.”

“예.”

아직 화가 다 풀린 건 아니라 그런지 릴리엔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무덤덤했다. 원체 천성이 무던하고 착한 사람인데 뿔이 돋으니까.

'귀엽다고 생각하면 화내겠지.’

하지만 다미언에게는 귀여웠다.

화낼 걸 알아서 내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미언은 제 안의 주책맞은 부분이 간지럼을 타듯 배배꼬이는 걸 느꼈다. 다름 아닌 저릴리에 이슬라르가 자기 때문에 감정적 동요를 겪는다는 게.

'짜릿해.'

다미언은 괜히 혀로 한 번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늘의 연회장은 정궁이 아니라 서쪽 별궁과 그 후원이었다. 릴리엔은 장소를 말해주자 다미언은 뜬금없이 “음…” 하며 제 가슴 팍을 더듬었다. 릴리에이 그런 다미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문제라기보다 추억이 깊다고 해야 할까요.”

다미언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웃었다.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다 도착한 모양이군요."

화려하고 규모가 컸던 정궁에 비해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서쪽 별궁은 소박한 화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은 대공 부부를 보고 잠깐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다급히 물을 마셨다. 릴리엔은 안쓰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하게.”

"아, 예…!”

예상치 못한 친절에 시종이 뺨을 붉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우렁차게 대공 부부의 도착을 알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선량해 보이는 대공비가 웃는 얼굴로 '고맙구나.'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의 입꼬리가 헤실 헤실 올라가려는 순간 대공의 서늘한 눈초리가 그에게 꽂혔다.

시선이 닿자마자 무형의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전하?”

릴리엔이 따라 들어오지 않는 다미언을 보며 의아하게 묻자 시종의 목을 죄던 기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예.”

다미언이 천사같이 웃는 얼굴로 릴리엔에게 화답했다.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방금 이 사람 기색이 좀 섬뜩했던 거 같은데.

황도 엑셀시어에 대참사가 발생할 확률이 0에서 조금 늘어난 탓이었지만 릴리엔은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딜 보시나 해서요.”

“별 것 아니었습니다.”

뭔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대공 부부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테오와 함께 참석했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예습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릴리엔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놀랐다. 두 사람에 대한 주목도가 남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사실 첫날부터 이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미언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쟁취한 명예, 그리고 인세에 보기 드문 절세 미모와 같은 방탕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주일 단위로 사람을 바꿔가며 놀아날 수도 있는데 그런 것 치곤 여태 스캔들이 전혀 없었다.

그냥 스캔들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횟수자체가 지극히 적었다. 간신히 참석한다 해도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황제의 신경이나 벅벅 긁고 돌아가는 게 다였다.

그렇다고 정조관념이 투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참으로 독특한 경우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대공 전하께서는…….”

“좀 사람 같지 않은 면이 있으시지요.”

그런 사람이 남녀상열지사도 없이 덜컥 결혼부터 했다니 호사가 들에게는 더없이 흥미진진한 이 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그 다미언 루펜바인과 결혼식을 올렸는가.

“미모로 견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울까요?”

“아니면 대공의 옆에 서 있으면 존재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여자일 수도 있죠.”

“열아홉 살인데 아직 데뷔를 안한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요.”

“결혼식에 다녀온 사람들은 뭐래요?”

“즐거웠다고 하던데요.”

“남의 결혼식이 즐거워요?”

종잡을 수 없는 소리였다. 어쨌든 단서가 너무 적다 보니 추측은 전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다 이야기가 지나쳐 혼전임신 운운하는 말도 나오고 만 것이다.

물론 첫날 모습을 드러낸 대공비는 그런 헛소문을 깡그리 종식 시켰다. 마치 날 때부터 임페리 얼 하이니스를 달고 태어난 것처럼 차분하니 우아한 모습 덕분이었다.

대공비는 알려진 것보다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 굳이 흠을 잡으려 하면 열아홉 살로는 절대 안 보인다는 정도. 그것도 노안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분위기가 지나치게 성숙한 탓이었다.

“저런 아가씨가 숨어 있는 줄 알았으면 튜린에 진작 허혼서를 넣어 볼 걸.”

“아서요. 그 세드릭 이슬라르가 죽고 못 사는 누이동생이었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참 좋은 분 같기는 한데요.”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비 자체로는 사람이 참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다미언이,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요사스러움이 줄줄 흐르는 남자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둘이 같이 서 있으면 부부처럼 보이기는 할까요?"

“척 보기에도 너무 성격이 달라 보이는데.”

폭발한 호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둘째 날 연회에는 부부가 둘다 나란히 불참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들이 이렇게 동반 참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은.

생각보다 어울리네요?"

척 보기에 알아볼 정도로 기를 써서 의상을 맞춘 것도 아닌데 정 반대 분위기의 두 사람은 제법 어울리는 부부처럼 보였다.

의외의 조화인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두 사람을 좋았다.

그런 관심들 속에서 릴리엔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약간의 불편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다미언이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많이 불편하신가요?”

“조금요…….”

"흐음.”

그렇다면 어디 보자.

다미언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번 스윽 훑어보았다. 크게 위협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티어 인피니티가 눈총을 주는데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눈짓 한 번에 삽시간에 집요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사라졌다.

다미언이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자, 이제 됐죠?”

칭찬을 조르는 강아지 같았다.

“잘…… 하셨어요?”

떨떠름한 칭찬이었는데도 다미언은 기뻐 보였다. 그는 한술 더 떠 릴리엔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비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애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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