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97화 (97/155)

97화.

몰래 곁눈질하던 사람들의 입술에서 숨죽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밀은 풀렸다.

“저렇게 애지중지 아내를 다루고 있는데…….”

“부부로 안 보이는 것도 이상하겠네요.”

“설령 저게 다 연기라고 해도 저러다 보면 사랑이 싹트기도 할것 같아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다미언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릴리에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집에서 터트린 실소보다 좀 더 순수한 웃음이었다.

대공비가 웃자 대공이 얼른 또 뭐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그러자 그만하라는 듯 대공비가 웃으면서 나무라는 모습은.

“왜 보고 있는 우리가 다 간지러운지…….”

사람들은 ‘으’ 하고 어깨를 털었다. 어쨌거나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이니 흥미가 뚝 하고 반감됐다.

“어쨌건 당분간 동맹 전선에는 이상이 없겠네요. 폐하께선 이 사실을 아시려나 몰라.”

“쉿, 입조심해요!"

사람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다른 물어뜯을 거리를 찾아 흩어졌다. 그 모습을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마리앤이 뿌득 하고 이를 갈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보통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었네요.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겠지만 피해 의식으로 똘똘 무장한 마리앤의 눈에는 마치 릴리에이 두 남자를 양손에 쥐려고 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당장 뛰쳐나가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사실 오늘 그녀는 여기 나타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릴리엔이 덮어줬다고 해도 보는 눈이 있었다. 블란쳇 공작은 마리앤에게 당분간 근신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에 격분한 딸을 달랜 건 공작부인이었다.

“아버지께서 저렇게 보이셔도 화가 많이 나셨단다, 마리앤, 너도 알잖니. 원래 네 아버지는 그 집안사람들을 안 좋아하셔. 이 어미가 잘 말해 놓았다. 대공비는 이제 오래 살지 못할 거란다.”

악에 받쳤던 마리앤은 토닥토닥달래는 손길에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쓸데없이 의심을 사선 안 되니 우선은 어디 나설 생각 말고 근신하라.”

는 말에 마리앤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결국 공작부인이 네쥬 리아파의 드레스 등 여러 가지 선물을 약속한 후에야 마리앤은 간신히 알겠다고 대답한 터였다.

딸이야 근신을 시키더라도 개회연에 공작부인이 불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마리앤은 어머니가 자신을 달래다 말고 치장을 시작한 것에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꼈다.

"가여운 내 아기!”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안심한 블란쳇 공작부인은 마리앤을 껴안아 주고 조만간 좋은 소식을 꼭 가져다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다독이며 일어섰다.

문득 마리앤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오라버니처럼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자기를 배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맞아, 두 분 다 오라버니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면서 나한테 숨기셨잖아. 만약 레이첼부인의 시녀가 귀띔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그녀는 불안했다. 릴리엔을 죽여주겠다는 약속도 말뿐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혼자 집안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리앤는 커튼 뒤에 숨어서 릴리엔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마리앤에게 있어서 릴리엔은 순탄했던 자기 인생을 망치러 온 파괴자나 다름없었다.

당장이라도 나가 따지고 싶었다. 릴리엔에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해 보이는 대공에게 저 겉만 순해 보이는 계집애의 내면에 숨겨진 실체를 폭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목격하거나, 최소한 릴리에이 혼자가 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 * *

“어머, 비전하!”

“비전하께서 오셨어, 빨리!"

오늘도 릴리엔은 은방울꽃 소로 리티의 아가씨들에게 우르르 둘러싸였다.

'엇.'

예상치 못한 아가씨들의 습격에 다미언은 아차 하는 사이에 릴리 엔으로부터 세 걸음 이상 밀려나게 되었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 다미언조차 얼른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런 그의 옆에 자연스럽게 남자들이 와서 섰다.

“저희 모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하.”

다미언과도 조금씩 안면이 있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전하께 파트너를 빼앗긴 처량한 신세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아무래도 아가씨들이 릴리에을 둘러싸고 법석을 떠는 게 처음은 아닌 모양이라고 다미언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참 보기는 좋은 광경이네요.”

꽃이 만발한 정원을 옮겨 놓은 것처럼 꾸며진 무도회장에서 아가씨들이 싱그러운 청록색 옷을 입은 릴리엔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늘은 요정 여왕님과 작은 요정들 같으십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고 허탈해하면서도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들과 달리 다미언의 표정은 탐탁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파트너의 관심을 잠시 빼앗겨도 괜찮은 모양이었지만 다미언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우르르 나타나서 그를 릴리엔 옆에서 밀어낸 이들의 존재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몹시.

“비전하, 다음 곡이 단체 무곡이래요! 오늘은 저희랑 꼭 춤 춰주세요, 네?”

게다가 이게 무슨 소리람? 다미언은 기가 찼다. 아직 그도 릴리 엔과 첫 춤을 추기 전인데!

"환장하겠군.”

차라리 웬 놈팡이가 릴리엔에게 춤을 신청했다면 가볍게 떨구어 낼 수 있을 텐데 하필 상대가 나이 어린 아가씨들이었다.

다시 말해 진지하게 대응하면 대응할수록 이쪽이 우스워지는 상대들이란 뜻이다.

“어머,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계신데…… 저희가 먼저 나서도 되려나 몰라요.”

그러면서 아가씨들이 은근히 다 미언의 눈치를 살피는 척 했다.

정말 죄송하다거나 물러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다 미언에게서 '괜찮으니 다녀오십시오.'라는 말이 나오게끔 유도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영악하긴.’

아무리 다미언이라지만 어린 아가씨들 상대로 진지하게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 특히나 릴리엔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 아가씨들은 그 미묘한 권력 관계를 간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싸움의 승기가 넘어가고 있었으나 둔한 릴리에만 그걸 몰랐다.

“전하, 사실 제가 첫 연회 때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해서요."

릴리엔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아가씨들이 미묘한 승리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다미언도 웃긴 웃었다. 이를 악물고, 이마에는 슬그머니 핏대마저 솟은 채로.

“비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즐거이 다녀오시지요.”

승패가 명확해졌다.

자기들이 엑셀시어를 날려 버릴 폭탄을 도발한 줄도 모르고 아가씨들이 깔깔거렸다.

“너그럽기도 하셔라!”

“비전하, 저희 빨리 가요. 네?

비전하를 모시고 춤을 추는 모습을 빨리 보여 드리고 싶어요!”

천진한 아가씨들의 말에 다미언은 혈압이 올랐지만 릴리엔은 그저 그들이 귀여운 모양이었다.

“알겠으니 뛰지 말렴. 넘어질까 내가 다 조마조마하구나.”

“앗, 네에……!”

만류를 당한 아가씨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아가씨들의 행동거지도 수줍어졌다. 보고 있던 다 미언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저 사람이 저러니까.'

다미언이 끊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다미언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처음 보는 남자들이 놀란 시선을 공유했다. 그들 모두 제국 고위귀족들답게 다 군 경험이 있었고 다미언의 인간 같지 않은 전투력과 욕 나오게 천재적인 전략에 대해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고작 십대 소녀들에게 부인의 첫 춤을 뺏겨한숨을 쉬는 꼴을 볼 줄이야. 세상만사가 참으로 요지경이었다.

“비전하께서 워낙 인품이 출중 하셔서…….”

“인기가 많은 분을 배우자로 두셨으니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힘내십시오, 전하."

힘을 내라니. 내가 이제 하다하다 10대 소녀들하고 기싸움까지 해야 하나?

……아니다. 생각해보니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릴리에 이슬라르가 걸렸는데 자존심과 체면을 따질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자괴감이 아니라 전투 의욕이 솟구쳤다. 다미언은 궁리하기 시작했다.

'저 영악한 것들을 어떻게 이겨주지?’

바로 그때였다.

“오, 다미언! 내 동생! 여기 있었느냐!”

황제 클로드 루펜바인이 나타났다.

“연회를 선포할 때 네가 없기에 오늘도 안 오는 줄 알았다. 한데 여기 이렇게 있었구나.”

황제가 넉살 좋게 웃는 얼굴로 다미언 앞에 섰다. 그리고 격려를 한답시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듣자 하니 첫날에 네가 황궁서쪽을 지켜주었다면서. 어찌 그렇게 충성스러우냐.”

하나뿐인 대공을 말단 기사처럼 경비로 부려먹은 일과 저는 무관하다는 뻔한 거짓말이었다.

'아하.'

평소 때라면 다미언은 귀찮아서 대충 내버려 두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기분이 무척 나빴다.

"폐하의 명을 받잡고 나갔는데요. '듣자 하니’라니 말씀이 이상하십니다. 분명 남한테 들어서 아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계셨을 텐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시도는 좋았으나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고 할 수 있겠다. 황제가 재빨리 수습을 시도했다.

"다미언, 그게 아니라.”

“혹시 기억을 못 하십니까? 아니면 제가 사실 쌍둥이 형을 두고 있었는지요?”

오냐오냐하면 기어오른다.

둘째 형은 여전히 그를 얕보고 있었다. 다미언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묶어두고 있는 제약이 선황의 유언인 '형제끼리 상잔하지 말라'는 덧없는 말뿐이란 걸 알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

“너는 참……여전하구나, 동생아.”

작금의 사태는 막냇동생이 미친 개라는 걸 매번 까먹는 클로드루펜바인의 자업자득적인 측면이 컸다.

“사람이 쉽게 변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경사스러운 즉위 7년을 맞이하여 반목하는 막냇동생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면모를 강조하려다 장렬히 실패하고, 황제는 결국 다미언의 분풀이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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