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 *
티어 인피티니가 누구를 상대로 전의를 불태우는 줄도 모르고 아가씨들은 그저 행복했다.
“단체 무곡을 실제로 추는 건 처음이니 답답하더라도 이해해 주련?”
“이해하고말고요!"
어디 이해하다 뿐인가! 대공비의 오늘 첫 춤을 가져갈 뿐 아니라 처음으로 단체 무곡을 추는 사람이 되다니!
“비전하, 이리로 오세요."
"틀려도 괜찮으니까 중간에 멈추지 마세요. 저희가 맞춰 드릴 게요.”
박수를 치며 핑그르르 한 바퀴, 대열을 맞추고 흩어졌다 다시 박수를 치고 한 바퀴 더.
“잘하시네요!”
“이번엔 이쪽으로 오세요!”
격렬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한 동작의 반복에 릴리엔은 금세 익숙해졌다. 동작이 몸에 익으니 그때부터 조금씩 즐거워졌다.
왜 동기들이 사교계 데뷔를 미루는 릴리엔을 안타까이 여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대도 데뷔는 안 할 거지만.’
그 당시 릴리에의 시간은 세드릭과 헤멘린나 대제후의 것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두 사람과 아낌없이 보낸 것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즐거운 시간은 금방 지나고 무곡이 끝났다.
“비전하, 괜찮으세요?”
뒤쪽에서 뾰로통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솔라리아가 얼른 따라붙었다.
“저쪽으로 가요, 이제. 동기들이다 모여 있어요. 비전하만 오시면 돼요.”
릴리엔은 아쉬워하는 소녀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은방울꽃 소로리티 동기들은 테라스 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비전하,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릴리엔은 고맙게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하고 놀아주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나저나 대공 전하께서는 비전하의 첫 춤을 빼앗기셔서 어쩌지요?”
이 모임에서 제일 먼저 유부녀가 된 죄로 릴리엔은 매번 이렇게 부러움 섞인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함께 웃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는 않았어요. 전하께서 흔쾌히 양보해주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거니까요.”
음…….
소로리티 일동은 손사래를 치는 대공비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 전하께서 흔쾌하셨을까? 개중에서 뤼슬은 아니라는 데 전 재산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막 뤼슬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놓으려던 찰나.
“담소를 나누시는데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뤼슬,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추시겠습니까?”
누군가 용감한 청년 하나가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와 정중히 춤을 청했다.
단정한 생김새의 청년은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뤼슬은 새침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수락하지요. 여러분, 저 먼저 실례할게요.”
그걸 시작으로 다른 청년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너도 나도 앞다 투어 각자가 마음에 둔 은방울꽃소로리티 멤버들에게 춤을 신청했다.
심지어 릴리엔에게도 춤을 신청한 아주 용기 있는 청년이 있었다. 물론 릴리엔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점잖게 거절했다.
“세상에.”
한바탕 신청이 이어지고 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리에 남은 건 릴리엔과 소피아뿐이었다.
“다들 인기가 좋으시네요.”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아가씨들은 양가 출신이고 각자의 기량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 있거든요.”
소피아가 수줍게 웃었다. 소피아 역시 춤 신청을 받았지만 핑계를 대고 거절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의 백작님 은요?”
“그렇게 부르시면…….”
소피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약혼자는 오늘 다른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약혼자도 안 계신데 춤을 거절하셨군요.”
“그게…… 사실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소피아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장난기가 별로 없는 릴리엔마저도 그녀를 놀려 주고 싶어졌다.
“백작님께서…… 오늘 그분이 안 계시니까 다른 분들과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거든요.”
소피아의 말에 릴리엔은 자연스럽게 다미언을 떠올리고 말았다.
“약혼자나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과 첫 춤을 추면 많이 속이 상할까요?”
"........”
착하지만 눈치가 없지는 않은 소피아는 릴리엔이 본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소피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라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아요. 비록 방금 곡이 같은 성별끼리 여럿이 모여 추는 춤이긴 했지만 그래도 첫 춤은 의미가 있잖아요.”
“아, 역시…….”
릴리엔은 뒤늦게 아까 상황 자체가 다미언이 안 된다고 거절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상처받았을까?'
조금 전 즐거이 다녀오시라며 허락하던 얼굴에 그 전날 보았던 차분한 얼굴이 겹쳐졌다.
릴리엔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그 전에 자기를 찌르라고 말하던 그때에도, 다미언은 얼굴만큼은 아주 태연하게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자신을 숨기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상처받았을 것 같다.'
마치 그날 다미언을 안아주는 대신 밀치고 자리를 떠나는 선택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긴 릴리에에게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제 생각에는요, 비전하. 지금이라도 돌아가셔서 먼저 춤을 신청해 보면 어떠실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아마 비전하께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자기 마음에 빗대어 부드럽게 직언하고 마지막에 사람을 위로 해주는 솜씨까지 완벽했다.
릴리엔이 감탄했다.
“역시 소피아는 어른스럽네요.”
“과, 과찬이세요, 비전하."
“소피아를 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리지만…….”
이 무슨 말씀. 소피아는 로맨스의 방해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얼른 손까지 내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비전하. 제 사프롱께서 저기 바로 지척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신걸요. 게다가 곧 다른 동기들도 돌아올 거예요. 어서 가 보세요!”
소피아의 격려에 힘입어, 릴리 엔은 다미언을 찾아 나섰다.
* * *
황궁의 무도회장은 아주 넓었다. 보통 무도회장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미언의 그림자 하나 볼 수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간 사람들에게 붙잡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릴리엔은 일단 회장의 벽을 따라서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릴리엔의 눈에 마침내 다미언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릴리엔이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는 순간, 시야를 가리던 사람 중 하나가 물러섰다.
다미언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아가씨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분홍빛 도는 살구색 드레스를 입어 재기발랄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별다른 장면이 아니었다. 다미언이 회장에서 마주친 걸로 보이는 어떤 아가씨랑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오해의 소지는 전혀 없었다.
문제는 저 별거 아닌 장면이 릴리엔의 마음을 단숨에 헝클어 놓았다는 거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릴리엔의 스캔들을 접하고 첫 춤을 눈앞에서 빼앗긴 다미언의 기분이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반성을 하든 사과를 하든 일단은 다미언을 만나야 했다. 릴리엔이 멈췄던 걸음을 옮기기 위해 발을 뗀 순간이었다.
“거기 서. 릴리에 이슬라르.”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할 할 마리앤이었다.
릴리엔은 어쩐지 전과 비슷한 상황에 피로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는 우아하게 돌아보았다.
“레이디 마리앤.”
마리앤은 벽에 늘어뜨려 놓은 커튼 옆에 서 있었다.
몰래 나오느라 대대적으로 치장하지 못한 탓인지 약간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손에는 대조적으로 아주 화려한 부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근신하고 계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여기서 뵙는군요.”
“지금 절 놀리시나요?”
마리앤이 앙칼지게 대꾸했다.
그러나 마리앤의 사고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던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사실 마리앤의 근신은 블란쳇공작가에서 임의대로 내린 처벌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루펜바인의 황족이었다. 대공비를 모욕한 걸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근신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국 대공가에서는 블란쳇 공작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모르는 건가.
싸움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해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막무가내인 사람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차후에 책임소재를 공식적으로 묻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눈 감아 드릴 테니 일단 돌아가세요."
지금까지 릴리엔이 마리앤을 너 그러이 봐 준 이유는 소로리티추방 사건 당시 릴리엔이 공교롭게 쓰러지는 바람에 일이 커진 것이 미안해서였다.
물론 릴리에이 쓰러지지 않았어도 마리앤은 추방을 면할 수 1었겠지만 과정 자체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릴리엔은 그 일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돌아가라고?”
이번에도 마리앤은 그 권고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네깟 게 대공비가 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내 오라비까지 꼬여 내려고 하는데! 날더러 여기서 꺼지기까지 하라고?”
릴리에 이슬라르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뭐라고 했지, 영애?”
"!”
릴리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하지만 늘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이 짓는 무표정은 마리 앤마저도 잠시 말을 잊게 만들었다.
"이, 이것 봐! 본색을 드러내는 거지?”
“본색이 아니라 이게 내가 원래 영애한테 해야 할 대우야. 나는 루펜바인의 대공비이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외에는 아무도 내게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어.
내가 여태까지 영애에게 보인 건 인내심과 배려였어.”
“이익……!”
고작 무표정 따위에 기가 질린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원래는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자신이 이런 소리를 듣고 있다니.
마리앤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다. 그녀의 인생이 꼬인 건 다 저기 있는 릴리엔 탓이었는데!
분노한 나머지 마리앤은 예의 그 나쁜 손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노래하는 천사 부채를 집어던진 것이다.
이번에는 부채가 릴리에의 치마폭에 명중했다.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마리앤은 그것만으로도 기세등등해졌다. 그녀가 릴리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네!"
와자작.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나타나 떨어진 부채를 짓밟았다.
홧김에 집어던지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마리앤이 애지중지하던 부채였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구둣발이 잔인할 정도로 부채를 짓이겼다. 천사의 산호 리라와 터키석 눈이 잘근잘근 밟혀 가루가 되었다. 그녀에게 이토록이나 잔인하게 구는 사람은 바로…….
“전하.”
다미언 루펜바인이었다.
털썩. 기가 꺾인 마리앤이 힘이 빠져 주저앉았으나 사프롱도 데리고 오지 않은 그녀를 부축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릴리엔의 뒤에는 서늘한 푸른 눈을 한 남자가 또 한 명 나타났다.
“내 누이에게 아주 유감이 많은 모양이군, 블란쳇 공녀."
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동생 바보로 소문난 세드릭 이슬라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