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웅성웅성. 소란을 눈치챈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리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저길 봐요, 블란쳇 공녀가 또 대공비께 무례하게 군 모양이에요.”
“세상에.”
“정말 지치지도 않는 사람이네요.”
“그렇게 가십지의 내용을 신나게 떠들고 다니더니. 내일은 본인이 직접 등장하게 생겼군요.”
안 돼! 마리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릴리엔을 상대할 때는 전혀 두려운 게 없어 보이던 방금 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권위나 법보다도 주변의 시선이나 평판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릴리,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세드릭은 다급하게 릴리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잔머리 하나 헝클어진 구석이 없다.
는 걸 확인하자마자 노기를 띤푸른 시선이 곧장 마리앤에게로 향했다.
“황족 모욕죄로군. 블란쳇 공녀, 변명할 말이 있으면 해 봐라.”
"나, 나는…….”
왜 이럴 때 아무도 없는 거야!
샤프롱도 없이 몰래 여기까지 온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지만 불리한 상황에 처한 마리앤의 머릿속에서 그 사실은 이미 까맣게 지워져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앤! 내 아기!"
블란쳇 공작부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체면도 잊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딸을 끌어안았다.
“세상에, 아가! 너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니!”
“엄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의 편이 나타나자 마리앤이 결국 울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은 왜 이제 온 거냐며 엉엉 우는 딸을 가슴 아픈 표정으로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졸지에 이 모습을 구경하게 된 세드릭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잘못한 쪽은 저쪽인데 전말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을 만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사실 그게 블란쳇 공작부인이 노린 바였다. 그녀는 훤칠한 두청년에게 보호받는 여자보다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소녀에게 더 많은 동정표가 쏠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한 공작부인도 간과하고 만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블란쳇 공녀가…….”
블란쳇 공작가, 특히 마리앤에게는 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본 듯한 사람이 무리 속에서 외쳤다.
“공녀가 대공비께 부채를 던졌어요!”
'이런!’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그러나 공작부인이 무어라고 대처하기도 전에 다미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모욕죄가 아니라 황족 시해죄였군. 블란쳇 공녀, 변명할 말이 있어도 하지 마라. 이미 정황은 명백하니까.”
세드릭보다 더한 사람이 나타났다.
대공의 입에서 '황족 시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사람들의 술렁임조차 멈추고 말았다.
서늘한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 그치고 말았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선을 넘으면 아주 큰일이 나고 말 거라고.
정적 속에서 모녀가 나란히 꿀꺽 침을 삼킨 바로 그때.
“어마나, 이게 웬 소란인가요들.”
레이첼 부인이 살랑살랑 붉은 루비 장식이 달린 검은 부채를 부치며 나타났다.
"레이첼 부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비켜서며 부인에게 길을 내 주었다. 레이 첼은 요요하게 눈웃음을 치며 천천히 블란쳇 모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이렇게 큰 소란이 나다니…….”
“부, 부인.”
마리앤이 절박하게 레이첼을 불렀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질투심으로 순간 이성을 잃은 탓에 너무 큰 사고를 쳤다. 황족시해죄를 저지른 게 되면 단순히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레이 첼 부인뿐이었다.
마리앤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부인, 저는 억울해요. 노래하는 천사 부채는 부인께서 제게 주신 것인데 제가 그 귀한 걸 던질 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저 부채를 떨어트렸는데 저 여자가…….”
“릴리에 대공비 전하."
“예……?”
레이첼 부인의 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마리앤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디 마리앤, 내가 전에도 충고하지 않았나요? 루펜바인의 황족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라고 말이에요.”
“저, 저, 저는…….”
어떻게 이럴 수가!!
레이첼 부인마저도 그녀를 배신한 걸까? 레이첼의 싸늘한 말투에 망연자실한 마리앤을 끌어안고 블란쳇 공작부인이 대신 빌었다.
“아, 아이가 당황하여 말실수를….”
“정말 실수였다면 한 번으로 끝났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게다가 해명을 할 상대는 내가 아닐 텐데요, 블란쳇 공작부인.
공작부인은 말문이 막혔지만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비,비전하. 제가 아둔하여서…… 딸아이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비전하의 호칭하나 제대로 갖추어 부르지 못하다니…… 부끄럽습니다. 차라리 저를 질책하여 주십시오!”
릴리엔은 아무 말 않고 용서를 비는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부인."
이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릴리에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납작 엎드린 척 하고 있지만 공작부인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마리앤의 잘못은 ‘릴리 엔에게 존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세드릭 역시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잠시만요, 튜린 선제후 각하.”
레이첼 부인이 끼어들며 부드럽게 세드릭의 말을 끊었다.
릴리엔은 부채를 살랑이고 있는 레이첼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이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흐름이 바뀌었어. 대단하구나.'
적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수완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대공비를 향해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과를 받은 사람은 여기 비전하시잖아요? 오라버니로서 화가 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마는……비전하께서 대답하실 시간을 좀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블란쳇 공작부인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대공비 전하, 정말 잘못했습니다! 딸아이는 제가 단단히 타이 르겠습니다!”
“비전하,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렇게까지 사과하시는데, 받아주실 건가요?”
상황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내 심 혀를 찼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레이첼 부인은 자신의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블란쳇 부인에게 잘못을 축소시킬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일을 더 크게 번지지 않게 마무리 짓도록 대공비를 압박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유약해 뵈는 대공비가 레이첼 부인을 이길 가능성은 몹시 희박해 보였다.
모두가 가망이 없겠다고 생각한 순간, 대공비가 침착하게 반기를 들었다.
“아니요.”
다미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지금 파리 한 마리도 제 손으로 못 잡게 생긴 대공비가 뭐라고 말을 한 것인가?
물론 개중 몇몇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긴 그렇지.”
그들은 대공비가 이미 한 번 마리앤의 무례를 덮어 준 전적이 있단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알음알음 옆에서 누군가가 영문을 몰라 하면 친절하게 설명도 해 주었다. 사람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갔다.
“술잔을?”
“아이고 세상에. 젊은 아가씨가 과격도 하시지.”
“황족 시해죄가 맞네요. 맞아.”
"맙소사, 블란쳇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딸을 단속조차 안한 겁니까?”
자연히 상황은 마리앤의 과거 전적까지도 만천하에 끄집어내기에 이르렀다. 릴리엔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용서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 이상의 관용은 제 위신뿐 아니라 대공가의 위신에도 영향을 줄 테니까요. 제 개인적인 사감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해 버리는 대공비의 간결한 어투에 사람들은 감탄하고 말았다. 이로써 블란쳇 공작부인의 가장 큰 무기인 눈물로 호소하기도 힘을 잃은 셈이었다.
"흐음.”
그러나 레이첼 부인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마음에 드는 것과 지금의 상황은 별개였다.
“좋아요, 그럼 비전하께서는 어떤 처벌을 원하시죠?”
“그건.”
"아니.”
다미언이 가로막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 내비께 묻는 것을 금한다.”
“전하.”
릴리엔이 부르자 다미언이 냉큼 기다렸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제야 릴리엔은 다미언이 한 발 앞에서 그녀가 받아야 할 시선을 어느 정도 분산시켜 주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다미언이 빙그레 웃으며 릴리에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많이 놀라셨지요.”
“괜찮아요. 저…….”
"이만하면 의연히 잘 버티셨습니다. 잘 했어요. 그러니 이제 나머지는 제게 맡기세요.”
그 말을 듣자 릴리엔은 깨달을 수 있었다. 다미언은 그녀가 일을 해결할 수 있게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다미언에게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연약한 사람으로 취급당하지 않도록, 그가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무시당하거나 하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긴장해 있던 릴리엔의 어깨에서도 바짝 들어갔던 힘이 살그머니 풀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대공 전하께서 저러시는 거 체음 봐요.”
“그러게요. 아까 어떤 아가씨랑 대화를 하고 계시길래 난 또 맞바람인가 했더니만."
“그 아가씨는 전하께서 여기 오려는 걸 방해하다가 제풀에 밀려 떨어져 나가던데.”
사실 그녀 또한 레이첼 부인으로부터 특별히 부탁을 받은 이였다. 그러나 아가씨는 몇 마디를 섞자마자 대공을 유혹하는 일이 불가능한 과제임을 일찌감치 깨달았고, 안 될 일에 매달리는 대신 깔끔하게 포기해 버렸다. 현명한 결정을 내린 그녀는 이미 집으로 가 버린 뒤였다.
"거 참, 저 정도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보기 좋은 신혼부부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결혼이 단순히 정치적 동맹의 산물이 아니라는 게 만천하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