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00화 (100/155)

100화.

* * *

그날 밤 마리앤은 피오니아 소로리티에서 제명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택에서 제대로 근신하며 또 다른 처벌을 기다리게 되었다.

또 한 번 소로리티에서 제명당했다는 걸 알게 된 마리앤은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블란쳇 공작 부인은 그런 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신은 대체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걸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애는 나 혼자 낳았고 나 혼자 키웠나? 공작 부인은 억울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큰일 났어요, 여보! 당신, 설마 벌써 대공비를 독살하라고 지시한 거 아니죠?”

“잘도 묻는군. 당신하고 애가 나를 그렇게까지 닦달하는데 여태까지 내가 아무것도 안 했겠어?”

"에그머니!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뭘 어떻게 해!”

사실 블란쳇 공작은 일이 터지자마자 급히 ‘취소’ 지령을 넣었다. 그리고 조금 전 지령이 무사히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장 큰 사고는 막았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딸의 인생이었다.

"여보, 우리 마리앤은 어떡하면 좋아요.”

“뭘 어떡해! 당신이 그렇게 싸고돌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공작은 모든 일의 책임을 무작정 아내와 딸의 탓으로 돌렸다.

매정하고 기가 막힌 말이었다.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고 아이를 몰아붙인 건 당신이잖아요!”

공작 부인은 새파랗게 질려 항변했다. 이대로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으면 딸의 인생은 정말로 끝이었다.

“애초에 당신이 소로리티 사건 때 대제후 님을 배신할 생각만 안 했어도!”

“듣기 싫소! 가서 마리앤을 데리고 시골로 요양을 떠날 준비나하시오!"

털썩, 공작 부인은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공작은 매몰차게 뒤돌아설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공작 부인은 깨달았다.

자신과 딸은 버려졌다. 오랫동안 공작가를 지원해 준 대제후를 배신한 공작은 지금 그때와 똑같이 부인과 딸을 버린 것이었다.

* * *

릴리엔과 다미언, 세드릭은 황궁을 떠났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오기로 버티고 있던 릴리엔이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허물어졌다.

“릴리!”

"괜찮아요.”

다미언의 팔에 기대 겨우 서 있는 동생을 보며 세드릭은 안절부 절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릴리엔을 보호하고 릴리엔의 일에 나서 목소리를 낼수 있는 첫 번째는 다미언이었다.

세드릭이 귀기 서린 푸른 눈으로 다미언을 쏘아보며 경고했다.

“확실하게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미언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다신 일어설 생각조차 들지 않게 끔 작신작신 밟아 놓기. 이 분야야말로 다미언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전 일부러 한번 놓아주고 안심한 틈을 타서…….”

“전하.”

“실언이었어요.”

여동생은 말 한마디로 저 얄미운 대공 전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세드릭은 감탄 어린 눈으로 릴리엔을 바라보다 어렵게 인정했다.

‘걱정은 좀 덜 해도 되겠군.'

“릴리, 많은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알았지?”

"네, 오라버니. 그렇게 할게요.”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인편으로 몸에 좋은 것들을 좀 챙겨 주마.”

끝까지 여동생 걱정을 남기고 세드릭이 돌아갔다.

릴리엔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다미언의 품에 안기다시피 저택에 입성했다. 그러다 별안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시나요?”

“아뇨, 그러고 보니 무도회를 두 번이나 참석했는데… 정작..

남편 되시는 분하고는 춤 한 번을 같이 못 췄다는 게 생각이 나서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첫 번째 무도회 때는 클로드의 방해로, 오늘은 마리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릴리엔이 고개를 들어 남편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이라면 왠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춤은 전하와 함께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솔직한 고백에 다미언의 마음에 맺혔던 작은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가 표정마저 허물어질까 싶어 그는 얼른 릴리엔의 목덜미께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쯤 대공 부부를 맞이하러 나왔던 사람들도 눈치 좋게 뒤로 빠져 주었다.

덕분에 릴리에과 다미언은 마음껏 자기들만의 세계로 빠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응접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까 제게 너무하셨다는 건 아시는군요.”

일부러 밉게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톡 쏘는 말이 나왔다. 마음은 이미 릴리 엔의 사과를 듣자마자 풀렸는데도 그랬다.

아닌 척만 할 줄 알지 진짜 감정을 다루는 덴 한없이 미숙한 남자는 자신이 진짜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릴리엔은 웃으며 남편을 다독였다.

“네, 제가 너무했어요.”

“그러고 가실 때 사실 속상했습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저도 알아요.”

릴리엔은 아까 전 다미언이 여자와 말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을 뿐인데 이유 모르게 섭섭했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미주알고주알 속상한 걸 털어놓고 그걸 릴리에이 받아 주기까지 하니 다 미언의 기분도 풀렸다.

'젠장.’

그와 동시에 심장이 떨리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애도 아니고 아내에게 그런 투정을 부리다니.

릴리엔이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다미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전하.”

“……네.”

“고개를 좀 들어 보세요.”

두 사람은 불 꺼진 복도 한중간에 서 있었다. 바깥으로 창이 나 불이 꺼져 있음에도 달빛이 충분히 비쳤다.

붉어졌을 얼굴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다미언은 릴리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달빛 속에서 릴리에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달이 예뻐요. 보세요."

여기가 이렇게 환한 것만 봐도 달이 제법 둥글고 하늘이 맑다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다미언은 릴리엔이 예쁘다는 달보다 릴리엔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밤을 푸르게 밝히는 진주같은 달. 얼마든지 감흥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전장에 나가 광공해가 없는 곳에서 다미언은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밤하늘도 많이 보았다.

그때 릴리에이 물었다.

"예쁘죠?”

다미언은 말없이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밤은 거기 있었다. 진주 같은 달이 비쳤다.

“……네, 무척.”

속삭이던 입술이 릴리에에게 닿았다. 다미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중하게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마음을 떨리게 하는 잔잔한 바람을 입술을 통해 불어 넣듯이.

조심스럽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입맞춤을 통해 옮은 건지 다미언처럼 릴리에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발그레한 뺨과 떨리는 눈빛으로 다미언을 바라보던 릴리엔의 눈빛이 일순간 복잡해졌다.

“전하, 저 드릴 말씀이…….”

다미언은 릴리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대꾸했다.

“쉿, 말하지 말아요.”

릴리엔이 난처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을 막지 말라는 듯.

다미언은 고집스러운 아이가 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만이라도. 안되나요?”

“우리, 아직 한 번도 춤을 추지 못했잖아요.”

그랬었다.

결혼을 하고 서로 간에 수많은 약속을 주고받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춤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일들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될 텐데.'

다미언이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달이 아름다워요. 릴리에, 제발.”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가진 말은 아니었다. 영악한 말재간으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달이 아름답고 고요한 밤이었고 그들은 아직 한 번도 춤을 추지 못했다.

만약에 이 밤을 그녀가 망쳐 버리면 다미언은 앞으로 이런 아름다운 밤이 올 때마다 릴리엔을 떠올리며 슬퍼하게 될까.

다미언이 조용히 릴리에에게서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애원이 릴리에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릴리에의 떨리는 손이 다미언의 손 위에서 잠깐 헤맸다.

다미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다미언의 손위에 릴리엔의 손이 얹혔다.

악단도 춤추는 사람들도 술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조용하고 적막한 밤. 단지 그뿐.

다미언은 릴리엔의 손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릴리엔은 한 발짝그의 품 안으로 이끌렸다.

달 아래서 맞닿은 서로의 떨리는 몸이 요람처럼 흔들, 흔들, 흔들.

릴리엔은 양수에 잠긴 태아처럼 다미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피로가 혼곤하게 밀려들었다.

든든한 품 안에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릴리엔은 점점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천천히 잠들었다.

* * *

고요하게 잠든 아내를 안아 들고 다미언은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는 따뜻한 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미언은 곤히 잠든 릴리엔을 우선 눕혔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자기 자신을 찌를 때는 망설임 없었던 손을 깃털처럼 움직여 아내의 구두를 벗겨 냈다.

다음으로 장신구를 제거하고 예쁘지만 불편해 보이는 머리를 풀어 주었다.

곤히 잠든 데다가 다미언이 최대한 기척 없이 움직인 덕분에 릴리엔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다미언은 온전히 그의 손을 거쳐 편한 모습으로 고이 잠든 아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릴리엔의 닫힌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내 밤하늘.”

***

다미언이 조용히 릴리엔의 방에서 나온 순간.

“전하.”

굳은 얼굴을 한 아이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아이반이 망설이며 다미언의 서재 쪽을 가리켰다. 릴리에이 잠들어 있는 쪽을 향해 흘긋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수 있는 말인 듯했다.

다미언은 두 말 않고 서재로 향했다. 아이반이 뒤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손가락만 한 간식을 쌀 법한 작은 종이 한 장.

“보시면 압니다.”

다미언은 종이를 받아 보았다.

그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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