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01화 (101/155)

101화.

[대공비를 죽여라.]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블란쳇에서 첩자에게 보낸 지령입니다.”

블란쳇의 첩자라면 다미언의 손에 이미 처리되었다. 시체를 공작가에 보내라는 명령도 아이반이 필사적으로 설득한 덕분에 내부적으로 조용히 정리된 터라 블란쳇에서는 아직도 첩자가 살아있는 줄로 알고 있을 터였다.

대공비를 죽여라.

다미언은 자칫 증거물을 훼손하게 되기 전에 아이반에게 도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은빛 단검을 꺼냈다. 아이반에게도 낯익은 물건이었다.

“그거 비전하를 만나시고서부터 거의 안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날 끝으로 제 손바닥을 주욱 그으면서 다미언이 대답했다. 몽글몽글 피가 솟더니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상처가 아물 때쯤 손바닥을 한 번 더 그었다. 그렇게 세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칼을 놓을 수 있었다.

아이반의 말대로 이 칼은 릴리 엔을 만나고서부터 거의 써 본적이 없었다.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마력의 주의를 분산시켜 폭주의 가능성을 낮춰 줄 뿐, 고통을 달래 주지는 못한다. 효과를 크게 보려면 그만큼 상처도 커져야 했다.

그전까지 다미언은 이 칼이나 다른 어떤 수단으로라도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다잡아 왔다. 그리고 마력이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제어력을 되찾는 식으로 버텨 왔다.

'그나마 봉인 주술이 걸린 이 칼을 사용하면 효율이 더 나은 정도.’

평안과는 거리가 먼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다미언의 고통을 덜어 준 건 지금도 그의 검에 매달려 있는 매듭과 릴리에, 둘 뿐이었다.

다미언은 아마 그 매듭도 릴리 엔이 만든 물건일 거라고 뒤늦게 추측했다.

릴리엔에게 닿으면 고통 없이 효과적으로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격동이 심해질 때마다 릴리엔이라는 유일한 해결책을 맛본 몸이 슬슬 단순한 접촉, 입맞춤, 포옹 이상을 원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비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저지를 순 없다. 설사 릴리에이 허락한다 쳐도 연약한 몸은 다미언을 배겨 낼 수 없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 앞에서 다 미언은 결국 릴리엔을 만나고 저 절로 멈추었던 습관을 다시 시작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미언 자신으로부터 릴리엔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지시가 마지막이었나?”

“아닙니다. 방금 전 이 지령을 취소하는 지시가 도착했습니다.”

“그랬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릴리에이 죽으면 누구나 범인을 추측할 수 있을 테니까.

릴리엔과 죽음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가자 다미언은 다시 견딜 수 없어졌다. 그는 결국 이를 악물며 제 손에 다시 한 번 상처를 냈다.

보다 못한 아이반이 말렸다.

“전하! 그만 좀 하십시오.”

마력이 상처를 치유하는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인다 해도 결국 근본은 사람의 몸이었다. 아무리 다미언이라 해도 재생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구적인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미언은 꾹 손을 쥐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무리였다. 그나마 지금은 릴리엔과 접촉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거였다.

다미언의 역린이자 유일한 안식 처. 그 눈을 통해서 보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려 준 사람.

'그 사람을 죽이겠다고……….’

으드득 하고 불길한 소리가 샜다. 릴리에이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분노라는 좁은 탈출구 속으로 모조리 쏟아졌다.

깨진 그릇 사이로 흘러넘치는 물처럼 새어 나온 다미언의 분노가 공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무형의 기운이 주변을 압도하자 아이반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바로 옆방에 비전하께서 계십니다!”

휘몰아치던 마력의 흐름이 멎었다.

다미언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형형했다.

아이반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분노가 아닌데도 견디기가 힘들어서였다.

돌연 다미언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반, 그거 아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 비는 몸이 약해.”

“알고 있습니다. 비전하께서는…….”

“네가 알고 있는 그 이상으로 몸이 약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아이반은 그제야 상황을 대강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블란쳇 공작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을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아이반은 다미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비전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분명…….”

그 순간 다미언이 불현듯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아, 아이반. 당연히 방법이 있어야지.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말고.”

다미언은 릴리엔을 그대로 잃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왜냐면 나는 내 비가 없는 세상에 무슨 가치가 있을지 잘 모르겠거든.”

다미언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아이반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릴리엔을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가 작정하면 이 나라, 루펜바인 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지. 네 말대로 옆방에 내 비가 잠들어 있으니까.”

안전한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릴리에 이슬라르.

그 존재만이 폭발할 것 같은 다 미언을 억눌러 주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상, 이 집은 릴리엔을 위한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곳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를 스스로 파괴할 순 없었다.

“여기서는 안 되지. 여기서는 안 되고말고…….”

대공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아이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렸다.

“그 말씀인 즉슨…….”

"응."

다미언이 해사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블란쳇 공작의 저택으로 간다.”

분노의 칼끝이 향할 곳이 정해졌다.

말 한마디로 다미언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블란쳇 공작의 저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지금 격렬한 대치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공작 부부가 대치하는 동안 상황을 파악한 에단이 뒤늦게 나섰다.

“네놈이 제대로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다.

블란쳇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어떻게 해서는 가문에 도움이 될 생각을 해야지, 네놈은……!”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에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황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 제후견인이셨고 저는 그분의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절대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누가 선황 폐하를 배신하라더냐! 클로드 폐하는 그분의 동생이야!”

“마테오 전하께서는 그분의 외아들이십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

는 것은 블란쳇 공작도 알았지만 아들을 이기기 위해 무조건 큰소리를 내지르고 보았다.

"이놈이 아비를……!”

그러나 에단은 평소와 달리 거기서 굴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무조건 따르는 게 아들로서 할 노릇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뭐라고?”

“아버지께는 충의도 소용없고 아내와 딸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가문의 영달만이 중요하시지 않습니까?”

“에단 슈미트!”

"더는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이상 선을 넘기 전에 차라리 제가….….”

“에단! 난 네 아비다!”

“예, 압니다.”

알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 콰앙! 하는 굉음이 울렸다.

"윽!”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찬 것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밀려난 문은 끼익끼익 소리를 내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들 여기 계셨나.”

떨어져 나온 문을 밟으며 한 남자가 등장했다.

“노크를 해도 듣는 사람이 없길래.”

아니, 그는 이미 사람이라기보다. 거대한 분노와 광기의 화신, 그 자체였다.

“다, 다미언 루펜바인……!"

“이 집안은 존칭 생략하는 게 관습이신가?”

꿀꺽, 블란쳇 공작은 침을 삼켰다.

다미언이 나타난 순간 그는 혹시 대공비 암살 시도를 들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존칭 운운하는 걸 보니 암살 시도에 대해서는 모르고 단순히 마리앤의 일로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 마리앤의 일이라면 곧 그 아이를 시골로 요양 보내려고 했습니다. 원래 정신이 온전치 못한 면이 있어서…….”

어제까지만 해도 귀애하던 딸은 마음에 병이 있는 아이로 전락했다.

“한데 그런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 문을…….”

“레이디 마리앤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다미언의 거대한 분노 앞에 서자 블란쳇 공작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공포가 얼마나 큰지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지금 내가 서 있는 게 맞긴 한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는 생각에 블란쳇 공작은 필사적으로 입을 놀렸다.

“대, 대, 대공비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으니 병을 핑계로 그 아이를 더 좌시할 수는 없지요.”

그 순간 대공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젓는 게 블란쳇 공작의 눈에 보였다.

'어?’

뭔가 실수를 했나?

부친과 다르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에단이 다급히 나섰다.

“대공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희는……….”

“그만.”

다미언이 한 손을 들어 에단의 말을 막았다. 에단은 6테라를 보유한 티어 하이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다미언의 힘 앞에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어느새 공작의 앞까지 다미언이 다가왔다. 그는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건만 공작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블란쳇 공작, 이게 뭔 줄 아나?”

“대, 대공 전하, 저는…….”

“이게 뭔 줄 아느냐고 물었잖아.”

“저는…….”

대공이 그에게 보여 준 것은 대공비를 죽이라는 말이 적힌 종이였다.

다미언은 다 알고 찾아온 거였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이라도 이 상황에서 ‘그건 제가 보낸 게 맞지만 곧바로 취소하라는 지령도 보냈다.'라고 실토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공작이 입을 다물자 다 미언이 옳지, 하고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는 투였지만 블란쳇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이건?”

천만다행으로 다미언이 그 다음에 보여 준 비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블란쳇 공작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 저는 모릅니다!”

“그래, 모를 거다. 이건 내 작은 형이 나를 죽이라고 보낸 물건이거든.”

다미언이 아찔하게 웃었다.

“찔린 사람의 마력을 봉인하는 주술이 걸려 있는 물건이지. 주술을 푸는 방법은 실전되어 전해 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 봉인 주술에 걸리면 마력을 완전히 봉인 당하게 돼. 한데 마력과 생명력은 묘한 불가분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말이야.”

“저, 저, 전하, 저는, 저는……!”

“이 칼에 찔리면 웬만한 놈은다 피를 토하며 죽어 버리게 된다.”

다미언처럼 마력이 넘쳐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전신에 홍반이 올라오다 결국 눈을 까뒤집으며 새까맣게 비틀어져 죽게 된다.

“물론, 내가 도와주면 그런 일은 없겠지만.”

대공의 압도적인 마력만이 그 저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내가 공을 도와줄 리는 없으니 안심하고 죽게.”

"끄악……!

날카로운 은빛 송곳이 블란쳇공작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아이반은 진저리를 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다미언이 치명적인 급소를 피해 굳이 손등을 찌른 이유가 너무도 명백해서였다.

“큭, 끄억…….”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을 경우라면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최대한 오래 고통에 시달리다 죽으란 말이었다.

천금은커녕 이 세상 전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릴리엔의 목숨에 감히 접근하려 든 이를, 다미언은 자비롭게 단번에 죽여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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