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에단 슈미트.”
대공의 수하들이 관통당한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블란쳇공작의 입을 막고 끌어냈다.
황족이자 대공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폭거였다. 하지만 에단은 저지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할 뿐이었다.
“예, 대공 전하.”
“이제부터 네가 블란쳇 공작이다.”
에단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다미언은 수하가 내미는 비수를 받아 들며 넌더리를 냈다.
“착각하지 말지. 이 이상 하면 내 비께서 눈치챌 것 같아 그런 것뿐이니까.”
죽이는 것도 죽이지 않는 것도다 릴리에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는 자기 때문에 한 가문이 멸문됐다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더 많았을 텐데.'
그가 사랑하게 된 릴리엔은 올곧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다미언에게는 아쉽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착실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아쉬운 그가 무조건 지고 들어갈 수밖에.
그 순간, 이런 깨달음이 다미언의 머리를 스쳤다.
'과연. 이런 게 결혼 생활이라는 건가...….'
상대방의 기준을 이해하고 자신이 먼저 한 발 양보한다. 다미언은 스스로의 깨달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란 놈도 결혼을 통해 변하는군.'
스스로의 변화가 어색했지만 신기했다. 릴리엔을 위해 변했다고 생각하면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세상 두려운 것 없이 마음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의 세계는 릴리에 이슬라르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릴리엔의 규칙이란 목줄에 스스로 매여 그 발치에 자발적인 복종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감정에 반응해 사납게 일렁이던 마력의 파고 역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평온한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다 미언이 조절할 수 있는 범위 내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인내하는 대견한 자신.
이 대견함을 릴리에이 알아준다.
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번 일을 칭찬받으려면 블란 쳇 공작에게 손을 쓴 것도 털어 놓아야 하니 그럴 순 없겠고.'
어쨌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여기 더 머물 이유도 없어졌으니.’
더 있다가 또 그를 화나게 하는 일이 생겨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끝까지 대견한 남편이 되기 위해 물러날 때였다.
아이반은 칼같이 뒤돌아서는 다 미언을 따르려다 말고 에단을 못마땅하게 쏘아보며 충고했다.
“여태까지 우유부단하게 구신 거, 본인이 가장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잡지 못할 두 번째 기회를 잡으셨으니 알아서 잘 행동하세요.”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아이 반 경.”
블란쳇 공작이 된 남자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반은 못마땅하게 혀를 한 번 차고 뒤돌아섰다.
* * *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남편, 다미언은 귀가하자마자 아내의 침실로 향했다.
비록 포상을 주어야 할 아내는 잠들었겠지만 다미언은 이왕 장한 남편이 된 김에 상도 알아서 받아 챙기기로 결정했다.
일단의 수하를 이끌고 흉흉한 기세로 저택을 떠나는 다미언을 걱정하던 엘런 총관은 두어 시간만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미언은 아슬아슬한 사람이었다. 볼 때마다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다미언은 밖에 머무는 시간은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서둘러 귀가하는 남자가 되었다.
재빠르게 몸을 씻고 한시가 아까운 듯 아내의 침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니 이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암, 저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수습 못 할 큰일을 칠 리는 없지. 이젠 안심해도 되겠어.'
수습 못할 큰일을 칠 수도 있는 잠재적 폭탄에서 수습할 수 있는 정도의 사고만 치는 남자로 성장한 다미언이었다.
'어?'
보무당당하게 릴리에의 침실 문 앞까지 다가가던 다미언은 흠칫 멈췄다.
'숨소리가…….’
인간 같지 않은 감각이 릴리엔의 숨소리를 잡아냈다. 당연히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릴리리 엔은 의외로 깨어 있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목덜미의 털이 서는 기분이었다.
다미언이 문을 열자 예상대로 릴리엔이 잠에서 깬 상태로 그를 맞이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다녀오셨나요, 전하?"
한 쪽으로 풀어 내린 머리, 잠옷 위에 걸친 가운. 릴리엔은 피우던 약연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빛에 단정한 미소. 대충 보면 여느 때의 릴리 엔이었지만…….
'전투태세……?’
다미언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눈이 안 웃는 데다 피곤한 상태로도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찮았다.
“비, 안 주무셨나요……?”
“네.”
단답형 대답에 다미언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화났다.'
다미언의 등 뒤에 살랑거리던 가상의 꼬리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나 착하고 선량한 다미언의 아내, '나를 찌르라.'고 가르쳐 줄때만 딱 한 번 화를 냈던 릴리에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하니 무조건 빌 수도 없었다.
다미언은 벌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주무시지 않고…….”
“전하와 첫 춤을 추다가 잠이든 것 같은데, 문득 깨어나 보니 저 혼자 침실에 있더군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릴리엔은 정말 깜짝 놀랐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저질러 다미언이자길 두고 갔나 하는 생각마저 잠깐 해 버릴 정도였다.
“해서 모린 부인에게 물어보니 전하께서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나가셨다고 하기에.”
“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요.”
"그게…… 비, 저는 어지간하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진심이었다. 다미언이 누군가를 해쳤으면 해쳤지 무슨 일을 당하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마력으로 극한까지 단련된 신체와 회복력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못한다.
그러나 다미언의 말을 들은 릴리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서 강하신 것과 제가 남편 되시는 분을 걱정하는 건 별개입니다.”
“그야 그렇죠…….”
다미언이 강하거나 말거나 릴리 엔이 걱정을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것이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다미언을 보며 릴리에의 표정이 또 조금 변했다. 무언가 안쓰러운 사람을 바라보듯이.
"전하께서도 이런 식으로 저를 걱정하셨겠죠.”
“예……?”
그토록 잘 돌아가던 잔머리,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던 입술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에는 고장이 나 버린 것 같았다. 릴리엔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멍한 다미언을 향해 릴리에이 손을 내밀었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릴리엔에게 다가갔다. 손이 깍지를 끼듯 얽혔다.
“블란쳇 공작가에 다녀오셨나요?”
"…눈치채셨군요.”
“이 밤에 전하께서 급히 가실 곳은 그밖에 달리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다미언의 잔머리가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그는 우선 릴리에이 그의 예쁜 얼굴을 감상하기 편하게끔 무릎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열심히 변명했다.
블란쳇 공작을 죽인 일엔 '에단을 공작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붙였고, 릴리엔의 탓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늘 그에게 목숨을 잃은 건 블란쳇 공작뿐이라고도 강조했다.
릴리엔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만히 다미언을 쓰다듬어 줄뿐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물었다.
“그럼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순간적으로 제 손에 상처를 냈던 일이 생각났지만, 그거야 이미 다 아물었으므로 다미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릴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안 다치셨으면 됐어요."
"........”
릴리엔이 그를 일으키려는 손짓을 했다. 다미언은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칠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인데.’
비는 그런 자신을 걱정했다.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미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를 기다리는 동안 졸렸어요.”
릴리엔이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다미언은 깊이 참회했다.
잘 자도 모자란 사람의 잠을 방해하다니 그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그렇지만 다음부턴 언질이라도 주고 다녀오세요. 깨우셔도 괜찮으니까…….”
릴리엔이 작게 하품을 하며 잠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다미언 쪽을 돌아보았다.
“안 주무실 건가요?"
"잡니다.”
안 그래도 언제 옆에 눕는 게 괜찮을지 눈치를 보고 있던 다미언이 즉각 대답하고 릴리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불을 고르게 덮어 주고 베개를 베기 편하게 고쳐 주었다.
“전하.”
다미언이 둥지처럼 다듬어 준 이불 속에서 릴리엔은 금세 흐러졌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다미언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 앞으로 전하 곁에서 오래 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그러니까 전하께서도 스스로를 아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미언은 스스로를 아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릴리엔의 말이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릴리엔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나머지는 차차 얘기하고…… 저희 이제 그만 자요."
릴리엔이 자기 옆자리를 톡톡쳤다. 다미언은 냉큼 릴리에이 가리킨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네, 비께서도.”
잠시 후, 릴리엔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다.
다미언은 잠들지 못하고 릴리엔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복기하고 있었다.
걱정했다. 안 다치셨으면 좋겠다. 전하 곁에서 오래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스스로를 아껴 달라.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다미언은 한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릴리에이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푹 하고 찌르면 들어가는 푸딩처럼 말랑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릴리엔은 곁을 내주는 버릇이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영악한 구석이 있는 다미언은 항상 마음속으로 릴리에의 한계를 쟀다. 그래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선을 넘었다는 걸.
'기뻐. 하지만........'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나의 비.”
깊이 잠들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마음 놓고 물었다.
“비께서는 아직 저를 인간으로 알고 계시지요.”
만약 릴리엔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그를 보며 비명을 내지르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감각해진 장면들에 릴리엔의 얼굴을 덧입히자 일순간 숨이 막혔다.
다미언은 일렁이는 감정의 파고를 삼키며 릴리엔의 등으로 파고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죽음으로써 나를 떠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괴물이라는 걸 알고 나를 거부하는 게 빠를까?
당신에게 거절당하면 나는 어떻게 되지?
“……떠나지 마요.”
떠나지 말아요. 어떤 식으로든 나를 떠나면 안 돼요.
잠든 릴리엔의 뒷모습에 대고 다미언은 오래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