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03화 (103/155)

103화.

13. 직면의 거울.

다미언과 함께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릴리엔은 낯선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살펴보니 낯익은 점이 보였다.

“서쪽 별궁……?”

마지막 개회연이 열렸던 서쪽 별궁이었다.

'꿈을 꾸고 있나.'

릴리엔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텅 빈 홀 안에는 그녀 외에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보아도 인기척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갑자기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꿈속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발소리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찾아야 해.’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움직였다. 얼마 후 그녀는 복도 한중간에 줄지어 찍혀 있는 작은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릴리엔의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의 발바닥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친 아이가 이 궁을 누비고 있는 모양이었다.

릴리엔은 다급해졌다. 다급해진 나머지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짓, 치마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꿈이라 그런지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침내, 릴리엔은 피로 젖은 발을 한 작은 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있었구나.'

작은 뒷모습을 발견한 순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뒤엉켜서 어깨너머까지 자란 금발 머리를 보아하니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릴리엔은 일단 아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가가기를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프지 않니?”

"......”

“괜찮다면 내가 상처를 좀 봐도 될까?”

아이가 뒤돌아선 채로 고개를 저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경계심으로 가득해 보였다.

"난 못 가.”

“음…… 그럼 내가 가도 되겠니?”

“당신도 여기 못 와.”

“왜?”

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보랏빛 눈동자가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나는 거울 속에 있거든.”

바로 그 순간 릴리엔은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침실의 정경이 보였다. 그러나 단순히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특히 그 보라색 눈동자……….

"…일어나셨어요?”

기척에 민감한 다미언이 옆에서 눈을 떴다. 꿈에서 본 것과 너무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라, 릴리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네. 전하께서도 잘 주무셨나요?”

"네, 덕분에.”

덕분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뭘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다미언이 그렇게 말해주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뺨에 와 닿는 다미언의 조그맣고 애교 어린 입맞춤을 받으니 마침내 온전히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릴리엔은 문득 이상하고 맥락없는 꿈을 꾼 건 어제 그녀의 무릎께에서 변명하던 다미언의 눈동자가 아주 예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곧 꿈에 대해서는 서서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 * *

블란쳇 공작에게 원인불명의 중병이 생겨 후계자인 에단이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동시에 마리앤은 어머니와 함께 황도를 떠나게 되었다.

전 블란쳇 공작은 딸을 불명예, 스럽게 쫓아냄으로서 공작가의 책임을 최소화할 생각이었지만 에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의를 일으킨 대가로 기한 없는 자숙을 명령했을 뿐.

마리앤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블란쳇이 함께 지고 가는 결정이었다.

마리엔은 의외로 반발하지 않고 에단의 결정에 따랐다. 이미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치가 떨릴만큼 비정한 결정에 대해 전해 듣고 기가 꺾일 대로 꺾인 탓이었다.

한동안 블란쳇의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아가씨께서 갑자기 조용해 지셨다.'는 후문이 암암리에 돌다가 사라졌다.

사교계에서는 블란쳇 공작가의 갑작스런 승계를 두고 많은 말들이 나돌았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만약 대공가에서 손을 쓴 거라면…….”

“설마 대공비의 일로 그렇게까지 했을 리가요.”

“못 봐서 그러는 것 같은데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라면 아주 벌벌 떠시던데요.”

“예? 그분이요?"

개회연 마지막 날의 다미언이 릴리엔을 애지중지 대하던 모습은 이리 살이 붙고 저리 살이 붙어 일파만파 퍼지는 중이었다.

“어쨌든 이 승계의 배후에 대공가가 있든 없든, 이득을 본 게 태자 전하시란 건 확실하네요.”

“그 에단 슈미트가 블란쳇 공작이 되다니…….”

권력에 눈이 먼 블란쳇 공작이 어린 아들을 이도에 선황에게 보내 버리는 바람에 자기 부모보다 선황의 얼굴을 더 자주 보며 자란 남자가 아닌가.

블란쳇 공작이 되어 거칠 것이 없어진 이상 그가 어떤 길을 택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실제로 에단은 곧바로 마테오를 찾아갔다. 물론 마테오는 곧바로 에단을 만나 주지 않았다.

총관을 통해 '내가 생각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

그때부터 에단은 사저의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정말로 기다리기 시작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언제쯤 공작을 불러 주실 생각일까요?”

“글쎄요.”

다미언이 시큰둥하게 커튼을 쳤다. 에단이 어디서 고생을 하건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태자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비께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택 앞에 무려 제국의 공작을 조각상처럼 세워 두고 있는 상황인걸요. 집주인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과연. 선긋기가 확실한 아내다운 대답이었다. 질투할 여지를 차단하는 솔직함에 다미언은 흐물흐물 행복해졌다.

“비께서 편치 않으시다면 정문이 아니라 후문 쪽에 세워 두도록 하죠.”

그거야말로 본격적인 조각상 취급이었다.

“전하.”

릴리에이 나무라자 다미언은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당신의 관심 한 자락이라도 저쪽에 가는 게 싫은걸요.”

릴리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녀도 다미언이 불리할 때면 애교를 부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릴리에이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방법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달콤한 속삭임과 입맞춤이 귓가에 닿았다.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대낮이라, 릴리엔은 뺨을 붉혔다.

“치료법을 찾는 것도 전하나 아이반 경이 전담하고 계시잖아요.”

거기에 쇼 윈스턴도 친정 주치 의로서 간간이 손을 거들곤 했다.

릴리엔이 나설 구석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진찰을 받거나 매일매일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남편으로부터 마력을 보충받는 정도였다.

“글쎄요. 비께서는 형님께서 보낸 괴상한 보양식을 해치우는 중임을 떠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좀 힘든 일이 맞는 것 같네요…….”

며칠 전, 릴리엔은 다미언과 상의한 끝에 시한부라는 사실을 세드릭에게도 알렸다.

그날 이후로 세드릭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무슨 식물의 뿌리나 정체 모를 고기 같은 것을 꾸준히, 꼬박꼬박 구해다 바치기 시작했다.

모린 부인은 그 이상한 식재료들을 열렬하게 환영하며 매일매일 릴리엔의 식탁에 올렸다.

“사실 그런 희귀하고 맛없는 것보다 제가 더 비의 건강에 특효약인데요. 그렇죠?"

……다미언은 이제 하다하다 릴리엔의 입에 들어가는 보양식까지 질투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었다.

그런 세드릭의 애정도, 다미언의 애정도 릴리에에게는 감당하기 벅찰 때가 있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릴리에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미언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미언이 이미 거의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당신에게 가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는 말에 다미언은 잠시 침묵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릴리에에게 다미언이 바싹 다가가 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닿았다.

“앞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 주신 다는 말, 진심이지요?”

"네."

릴리에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언은 잠시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듯 빤히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가 앞으로 저를 를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면 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 망설임 없는 대답에 다미언은 잠시 굳었다가 곧 크게 숨을 내쉬며 휘청 릴리엔의 무릎으로 기울었다.

"전하!”

"별 일 아니에요……긴장이 좀 풀려서.”

다미언은 “노력하신다니 됐어요. 약속해주신다면 됐어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릴리엔은 다미언의 마음의 크기를 또 한 번 실감했다.

아직은 돌려줄 방법을 몰랐기에, 어설픈 손놀림으로나마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미언의 등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도 진정 시켜 주는 데 보다 시간이 걸렸던 남편과의 이야기가 끝나자 릴리엔이 떠올린 사람은 가장 먼저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에게 소식을 알리겠다는 말에 다미언은 그거야 릴리에이 결정할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혼내시겠는데요.”

“아마 그렇겠죠.”

“아뇨, 비께서 혼이 나시는 게 아니라 제가요.”

세드릭이 다미언을? 릴리엔은 설마 하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아픈 것도 저고, 알리지 않은 사람도 저예요.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그렇게까진 안 하실 거예요.”

예상은 둘 다 빗나갔다. 세드릭은 둘 중 그 누구도 혼내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 릴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