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04화 (104/155)

104화.

세드릭은 자책했다.

“그런 두려운 사실을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숨기다니, 내…… 내 탓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세드릭은 당황한 릴리엔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라도 아이처럼 보이는 누이동생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열두 살짜리 소녀가 약혼을 하겠다'며 찾아왔던 그 날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스물한 살의 세드릭은 미처 몰랐지만 스물여덟 살이 된 세드릭은 알 수 있었다.

릴리엔은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렇게 된 건 모두 세드릭 자신 때문이었다.

“너는 나 때문에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버린 거였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 데……."

릴리에이 아이답지 않다고 걱정했던 일들. 그를 의지해주는 것 같아 기뻤던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주먹질처럼 와 닿았다. 뒤늦은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다미언에게 성질을 내며 내가 그 아이를 아꼈노라고 자부하는 편지를 썼던 일까지 낱낱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릴리엔을 아껴주었다고 말할 자격이 없었다.

어린 누이에게 먼저 손 내밀어주고, 먼저 다가가서 의지처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동생은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혼자서 앓는 아이가 되었다.

평생을 두고 부끄러운 일로 남을 큰 잘못이었다.

“미안하구나, 릴리엔. 무엇으로도 사죄할 수 없겠지만………."

세드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릴리 엔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열두 살 적 열병을 통해 깨어난 기억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전생의 삶.

하나는 그 전생의 삶에서 읽은 이야기.

후자의 주된 내용은 아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는 그녀의 잘못된 삶, 그리고 지금은 크게 효용 가치가 없는 마테오 즉위 이후의 이야기 정도였다.

그중에서 전자의 기억이 유독깊게 체화되었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덕분에 열두 살 무렵 릴리엔은 마치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세드릭이 먼저 손을 내밀었더라도, 릴리엔은 여전히 어른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혼자 죽어갈 준비를 하던 릴리에에게 다미언이 다가왔다. 다미언은 체면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릴리에의 선 안에 들어오기를 갈구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래서 그녀도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다미언의 마음을 인정하고서야 릴리엔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강박관념을 자각하고 놓아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기억의 풍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원래도 흐려지던 기억이었다.

릴리엔이 힘써 예정된 경로를 이탈할수록, 기억은 비중을 잃고 점점 뇌리에서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야기의 기억뿐 아니라 전생의 기억 역시 지식적인 부분만을 남기고 많은 부분이 퇴색한 상태였다.

그렇게 릴리엔은 세 번째 삶이 아닌 릴리엔으로서의 삶,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게 되었다. 전지도 전능도 아닌 기억에 매달리고 구애받지 않는 진짜 자기 삶을.

예전이라면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릴리엔이 다미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릴리엔의 입가에 불현듯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제게 미안하시다면……오라버니도 결혼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세드릭에게는 뜬금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릴리엔은 진지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법이잖아요. 제게 약혼을 강요하셨으니 저도 오라버니께 약혼을 강요할게요.”

“릴리.”

“당장 누구랑 결혼하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을게요. 상대방의 의사도 중요하니까. 저는 그저 오라버니께서 이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고려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세드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릴리에, 그건 그다지 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어차피 가주인 이상 세드릭은 늦더라도 결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릴리에이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용서해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오라버니.”

“.......”

전처럼 죽을 때를 대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릴리엔은 죽지 않아도 세드릭과 함께 살 수 없다.

다미언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릴리엔은 남은 생을 다미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튜린 사람답게 절대 바뀌지 않을 이 결정은,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큰 확언일지도 모른다.

지금 릴리엔은 세드릭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노력하마.”

그제야 비로소 릴리엔은 웃었다.

“네. 그거면 됐어요.”

* * *

며칠 뒤, 마테오는 블란쳇 공작에단 슈미트를 호위로 임명했다.

측근들이 배신자였던 남자에게 호위를 맡길 순 없다고 들고 일어나지 못한 건 에단이 제시받은 위치가 근접 경호조차 허용되지 않는 말단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블란쳇 공작에게는 모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에단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과분한 기회를 주셨으니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전적이 문제였지 충심으로는 의심할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전적도 사실 에단의 뜻은 아니었기 때문에, 맞지 않는 위치에서 고생하는 새 블란쳇 공작은 옛 동료들 사이에 빠르게 융화될 수 있었다.

정확히 마테오가 의도한 결과였다.

“당분간은 고생을 좀 시킬 생각입니다. 쌓인 앙금도 풀 겸, 남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겸.”

아이반은 감탄했다.

"괜찮은 방법이네요."

다미언의 반응은 보다 매정했다.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마테오는 상처받지 않았다.

“황제가 될 생각이니까요. 그것도 꽤 괜찮은.”

마테오가 납치 사건 당시 온갖 협박에 굴하지 않았던 건 다른 사람도 아닌 클로드에게 꺾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인정하자면 황제가 되어야겠다.

는 생각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전하께서는 정말 좋은 황제가 되실 거예요."

릴리엔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미언과 릴리엔의 사이가 제법 부부다워지면서 마테오는 릴리에에 대한 마음을 접기 시작했다.

혹여나 이 마음이 드러나 릴리 엔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했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만천하에 못 보일 꼴을 보이고 있는 큰 숙부와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도 않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다만 한 가지, 마테오는 릴리에 이 말한 '좋은 황제'가 되는 것만은 스스로에게 허락해 줄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른다.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결과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가는 후대의 몫이니까.

하지만 첫 연정을 가져간 사람의 기대였다.

그만하면 평생을 걸고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리라고 마테오는 믿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다.

* * *

아르투라 정궁 황제의 알현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값비싼 도자기가 깨졌다. 파편들이 이미 난장판이 된 방 안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에단 슈미트, 그 비루먹은 개새끼가 기어이 제 집을 찾아가?”

분노한 황제는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다시 한번 와장창 소리가 나며 이번에는 술병들과 크리스털 잔들이 깨져 나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황제의 분노를 달랠 수 없었다.

시종들이 집무실 밖에서 수군거렸다.

“아직도입니까? 조금 있으면 선제후들께서 폐하를 알현하러 오실 시간인데…….”

"레이첼 부인께서는요?”

“이미 삼십 분 전에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 근데 왜 폐하께서 여태…….”

황제는 때때로 분노를 폭발시키면 스스로 진정하지 못했다. 그런 황제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우선 황제가 분이 풀릴 때까지 폭력과 폭언을 감내하고, 듣기 좋은 말로 달래 말이 통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진정시켰다.

하지만 오늘은 레이첼이 들어갔는데도 황제의 분노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집무실을 주시했다. 그 안에서는 황제가 뺨을 싸쥐고 말없이 주저앉아 있는 레이첼을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 분노한 척 숨을 씨근거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황제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왜 안 말리는 거지?'

오늘따라 레이첼은 황제의 손에 몇 번 뺨을 내어주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분노를 가라앉힐 구실을 기다리던 황제는 당황했고 곧이어 평소보다 더욱 화가 났다.

'방자한 계집이 제가 할 일도 제대로 안 해?'

따지고 보면 블란쳇 공작가의 일도 레이첼이 에단 슈미트를 대공비에게 붙여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너!”

황제는 레이첼에게 다가가 레이 첼의 머리를 쥐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오늘따라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을 뿐이었다.

시원찮은 반응에 마음껏 분을 풀지 못한 황제는 레이첼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예전보다 더 흉흉한 기세로 집기를 내던지고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결국 황제가 선제후들을 알현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루체른 선제후, 티라나 선제후, 비슈케크 선제후, 현 황제를 지지하는 세 명의 선제후였다.

시종들은 당황하여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선제후 각하들을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뵈러 왔네만…….”

알현실 안에서 들리는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에 선제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설마 폐하께서……?”

“예, 그것이…….”

선제후들은 당황스럽고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현 황제에게는 그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데 자신들을 제대로 맞이하기는커녕, 알현 시간에 맞춰 패악을 부리고 있다니?

“일단 황제 폐하께 고해주게."

시종도 이 선제후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잘 알았다.

그는 선제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황제가 진정하리라고 기대하며 고했다.

하지만 분노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황제는 대답 대신 문을 향해 의자를 내던질 뿐이었다.

문에 부딪친 의자가 박살이 났다. 그 순간 황제도 아차 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폐하께서는 알현을 받으실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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