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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05화 (105/155)

105화.

안 돼!

발길을 돌리는 선제후들을 붙잡을까도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때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얼른 나가보세요, 폐하.”

"!”

뺨이 퉁퉁 부어오르고 이마가 찢어진 채, 레이첼은 총비에서 책사가 되어 충고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세 선제후는 충심으로 폐하를 지지하는 게 아니랍니다. 폐하께서 저들이 원하는 이권을 주지 않을 것 같거나 자기들이 받아야 할 대우에 소홀하시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할 거예요.”

"크흠…….”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만큼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미 블란쳇 공작을 잃었다. 선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블란쳇공작가에 상당한 이권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주었는데 그 모든게 고스란히 황태자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아직 선제후들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잖아요? 폐하께서 함부로 하실 수 있는 건 이 레이 첼뿐이랍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가끔씩 걷잡을 수 없이 분노를 터트린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클로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여서는 아무리 레이첼의 도움이 있었어도 이때까지 황제 노릇을 해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보가 아니었기에 손수 알현실의 문을 열고 나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선제후들의 눈빛에서 '그럼 그렇지'하고 업신여기는 기색도 읽을 수 있었다.

‘짐이 황제이거늘…..….'

역시 선제후들은 너무 방자했다. 자신들이 황제의 목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구는 꼴이라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지만 기필코 이 자들을 짓눌러 주리라 클로드는 다짐했다.

역대 황제 중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 큰형 이도엘이나 그의 부황조차 범접하지 못했던 신성한 황권을 이룩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런 위대한 황제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블란쳇 공작을 얻어 기고만장해 있을 놈들에게 경고를 한번 해 줘야겠군.'

* * *

다미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서도 릴리엔의 변화는 극명하지 않았다.

릴리엔은 전과 같이 여전히 성실했고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대공비였다.

그에 반대로 다미언의 변화는 보다 전부터 아주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성격대로 일을 처리하자면 몰살로도 모자라 폐허로 만들었을 블란쳇 공작가를 공작 한 사람만 죽이고 곱게 살려주지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보조를 맞추어 성실한 가주 노릇까지 수행하기까지.

다미언은 스스로의 변화가 몹시 뿌듯했다. 오죽하면 요즘엔 달고 다니는 말이…….

“네가 결혼을 안 해 봐서 그래.”

"…전하, 제 말을 잘 못 알아들으셨습니다. 제가 전하께 ‘그렇게 좋으십니까?'라고 물어본 건 순수한 의미의 질문을 드린 게 아니라 비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결혼을 안 해봐서 모르는 거라니까.”

무슨 수를 쓴 건지 안 그래도 절세미인인 사람이 평소의 두 배정도 화사하고 싱그러워 보였다.

문제는 말이 안 통하는 정도도 평소의 두 배쯤 된다는 거였다.

결국 아이반은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결혼할 시간이나 좀 주시고 말씀하시죠!”

“나라고 시간이 있어서 결혼한건 아닌데. 참고로 난 출전 직전에 혼인 증서를 남의 손 통해서 받아봤고 결혼식 올리는 덴 일주일 밖에 안 걸렸어.”

“자랑이십니까, 그게? 게다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결혼식에 전하께서 기여하신 바는 별로 없는 걸로 알거든요?”

“그랬지. 맞아”

가시 돋친 말에도 다미언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났다. 어딘지 몽롱해 보이는,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미소였다.

아이반은 이제 짜증이 나는 걸 넘어 토하고 싶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미언은 추억을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난 사실 거기까지 욕심이 없었는데 비께서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셨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

쾅!

듣다 못한 아이반이 결국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회상을 방해받은 다미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나, 경?”

"고자질하러 비전하께 갈 겁니다! 저는 도저히 사랑에 빠진 전하를 감당 못 하겠으니 어떻게든 좀 해달라고요!”

“뭐?”

다미언이 냉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좋은 생각을 하다니. 내가 같이 가 주마.”

앞뒤 다 떼고 '비전하께 간다'는 말만 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좋으면 진작 가시지 왜 여기서 저나 괴롭히고 계셨던 겁니까? 할 일도 다 마치셨으면서.”

“비가 아침부터 할 일이 많다고 나를 두고 서재로 갔거든. 일하는 도중에 찾아가면 방해된다고 싫어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전하, 지금 그 말씀인즉…….”

여태까지 대공비의 서재로 찾아 갈 합법적인 핑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 양반 그럼 혹시 질릴 때까지 결혼 운운한 것도…….'

아이반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일부러 그런 거였군.'

장담하는데 100% 일부러 그런 거였다!

분노가 치솟아 목 뒤가 다 당길 지경이었지만 아이반은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아내 상대로 상사병에 빠진 주군 때문에 혈압이 올라 죽었다는 결말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신이 난 다미언을 금붕어 똥처럼 달고 대공비의 서재에 도착했다. 릴리엔은 성실하고 정갈하게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어머, 아이반 경? 그리고 전하…….”

정상적인 윗사람을 보니 심신에 안정이 찾아오며 울컥 설움이 밀려왔다. 아이반은 본격적으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비전하, 거두절미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예의 안경을 쓰고 차분히 일을 보던 릴리엔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상황은 알수 없지만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진 아이반의 모습만 봐도 알았다고 해주지 않으면 당장 창문으로 뛰어내릴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릴리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이반의 얼굴에서 억울한 표정이 씻은 듯이 가셨다. 십년 묵은 체증을 내려 보낸 듯한 환한 얼굴로 아이반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전하, 비전하를 너무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형식상의 당부를 마치자마자 아이반은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릴리엔은 순식간에 싱글싱글 웃는 다미언과 단둘이 남겨지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전하?”

“제가 너무 비를 보고 싶어 하니까 충직한 아이반 경이 저를 보내준 겁니다.”

“네?”

다미언은 아이반이 미처 닫아두지 못한 서재의 문을 마저 닫았다.

문이 닫히는 달칵 소리가 유독크게 들렸다. 아직까지 상황이 파악이 안 되는지 릴리엔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귀엽기도 하시지.'

다미언이 씨익 웃었다. 그제야 릴리에도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하.”

"네에, 비전하. 부르시지 않아도 제가 갑니다.”

하지만 눈치채 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다미언은 요염하게 흐드러지는 미소를 한껏 뽐내며 아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아내의 손에서 펜을 빼앗았다.

“잠깐만요, 제가……!”

“나의 사랑하는 비.”

다미언의 달콤한 부름에 릴리에 이 멈칫했다.

예상대로였다. 다미언의 비는 그가 '사랑'을 입에 담으면 이렇게 귀엽게 굳어지곤 했다.

'아무래도 아직 같은 답을 돌려줄 수 없어서 미안하기 때문이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저도 사랑합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건 물론 섭섭하긴 했다. 하지만 서운함과 별개로 다미언은 이 점을 오히려 무기로 써먹을 줄 아는 영악한 남자였다.

다미언은 샐쭉하게 웃으며 릴리 엔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 냈다. 그리고 릴리엔의 입술을 농밀하게 핥기 시작했다.

"읏..…."

이제 서로가 어느 정도 호흡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만큼 입맞춤은 단시간 안에 깊어졌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휘저어 혼을 빼놓고 다미언이 물러섰다.

“……아무리 바쁘셔도 약 먹는 걸 게을리하시면 안 되지요.”

“당분간은, 이미 주신 걸로도 충분합니다만……….”

다미언에 비해 폐활량이 부족한지라 릴리엔이 호흡을 가다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전하께서도 바쁘실 텐데요.”

“저요?”

“오늘 안에 재가하셔야 할 안건이 꽤 되는 걸로 압니다만…….”

릴리에 쪽에서도 가주의 최종승인이 필요한 건을 잔뜩 올려둔 참이었다. 다 마치려면 오늘 하루는 꼬박 투자해야……….

“오늘 아침에 올라온 건이라면 이미 다 봐뒀는데요."

"…예?”

그걸 다 봤다고?

다미언이 한량처럼 구는 것과 달리 일을 하고자 하면 잘 하는 편이라는 건 어느 정도 안다. 하지만 오늘 그가 해결해야 할 양을 벌써 다 볼 수는 없었다. 그건 릴리에에게도 가능한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진심인 것 같았다.

‘설마 내용도 확인 안 하고 서 명만 했나?'

릴리엔은 반신반의하며 확인해 보았다.

“발미에라 본성의 방한 공사가 완료되어 보고된 건은요?”

“비께서 꼼꼼히 봐 주신 덕에 예산이 절감되어 남은 금액을 과동 예비비로 돌렸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가신들에게 하사품을 내리기 위한 예산안은…….”

“다 좋았습니다만 올해는 예년에 비해 관세 수입이 늘어서요.

관련해서 포상 항목을 조금 늘렸습니다.”

“새롭게 작성한 예산안은 보시기에 어떠셨는지….”

“아주 편했습니다. 비께서 노력 해주신 덕분에 인적 자원뿐만 아니라 종이 낭비도 크게 덜 것 같아 전망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돌릴 줄 알았던 다미언의 대답은 의외로 착실했다. 릴리에은 조금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다 보셨군요……. 그걸다.”

“비께서 워낙 정리를 잘 해 주신 덕에 시간이 얼마 안 걸렸어요.”

안 걸려도 너무 안 걸렸다.

'나도 어디 가서 일 잘하는 걸로는 안 밀린다고 생각했는데…….’

졌다. 그녀에게는 다른 삶의 지식이라는 이점까지 있었는데도 완전히 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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