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전하, 그럼 여태까지도 이렇게 미친 듯한…… 아니, 빠른 속도로 일을 마치셨던 건가요?"
“오늘은 빨리 마치고 비를 기다리고 싶어서 힘을 좀 내 봤어요.
저 잘했지요?”
“예……. 너무 잘…….”
“칭찬해 주시니 기뻐요."
이 예쁜 얼굴에 문무를 다 갖추다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릴리엔조차도 잠깐 허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허탈했던 것도 잠시.
“전하께서 그토록 뛰어나시다니 잘 됐군요.”
“예?”
일을 잘 한 걸 핑계로 본격적으로 릴리에에게 치대 보려던 다미언은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엔이 다시 안경을 썼다.
“보자, 그렇다면 여기 이 통행세 부분도 전하께서 봐 주시면 훨씬 효율적일 것 같고요. 이 부분은 헤멘린나 본성에서 요청이 왔는데 제가 손대기 쉽지 않은 내용이라…….”
“자, 잠깐만요. 비? 릴리엔?”
다미언이 말릴 새도 없었다. 릴리엔은 순식간에 여러 가지 일을 다미언에게 떠넘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릴리엔은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는 중이었다.
잠시 후.
“부르셨습니까.”
시종 둘이 척 하고 방 안에 들어와 섰다.
“이것들을 전하의 서재에 옮겨 다 주게. 전하라면 이 정도는 금방 해결해 주시리라 믿어요.”
열심히 일을 끝내고 아이반을 들들 볶아 여기까지 온 다미언은 억울해졌다. 아직 안 되는데!
항변하려는 다미언을 향해 릴리 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 해 오시면 또 칭찬해 드릴 게요.”
고작 칭찬 가지고는 안 된다고 뻗대고 싶었지만.
'칭찬해 드릴게요.
그 말이 종처럼 댕 소리를 내며 머리를 울렸다. 이성적인 생각이 멀어져갔다.
'비께서 칭찬해 주신다잖아.'
내 비께서 기쁘시면 그만 아닌가? 살짝 알딸딸해져서 다미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불공정계약이 었지만
릴리엔의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고 말았다.
……잠깐.
“저 여기서 일하면 안 될까요?”
“네? 여기서요?”
릴리엔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미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맹세코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기 전까지 비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저보다도 전하께서 일을 먼저 끝내실 수도 있잖아요."
다미언의 릴리엔은 이런 면에서는 예리했고 허투루 넘어가 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고단수였다.
“그럼 제가 또 비의 일을 도와 드리면 되지요.”
"음…….”
일을 또 도와준다는 말에 결국 릴리에이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언은 씩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 도착하신 손님부터 처리하고 일을 해 보도록 할까요.”
"…예?”
손님이라니?
릴리엔이 의아해하는 것보다 다 미언이 날렵하게 뒤돌아서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는 게 더 빨랐다.
은빛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피분수가 화려하게 날렸다.
“컥…!”
“전하!”
갑자기 얌전히 뒤에 서 있는 시종을 베어 넘기는 다미언의 행동에 릴리엔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시종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곧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어떻게……!”
“피 냄새를 감췄어야지.”
아마 이 시간에 다미언이 대공비의 서재에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미언은 흘긋 릴리엔을 살폈다. 다행히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등 뒤가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사람 죽이는 모습을 두 번 보여줄 생각은 없었는데.'
하는 수 없었다.
“비, 눈을 감으세요.”
다행히 릴리엔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고 다미언은 두 암살자를 마주했다.
챙캉 하고 검이 맞부딪쳤다. 순식간에 두 합이 오갔다.
'…!’
릴리에 때문에 다미언이 크게 절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와 합을 주고받을 정도면 보통 실력 자는 아니었다. 아까도 분명 죽일 생각으로 칼을 휘둘렀는데 피해서 상처만 입은 걸 봐도 그랬다.
이런 실력자를 보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작은형, 당신 정말…… 여전히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
큰형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의 아내까지.
'감히….’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분노가 치밀었다. 그와 동시에 검을 잡은 손끝에서 익숙한 작열감이 치솟았다. 삐익 하는 이명이 귀를 울렸다.
다미언의 자제력이 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안 돼!’
팔이 옷을 찢고 괴이한 형태로 변하기 직전에 다미언은 간신히 동요를 다스렸다.
그 찰나의 틈을 실력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다미언은 이를 악물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암살자 한 명의 허벅지를 깊게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전하!”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하나에게 목을 베이고 말았다. 바로 다음 순간 다미언의 칼이 목을 벤 암살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대동맥과 심장. 급소를 그대로 내 준 두 암살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목을 베인 아픔과 마력이 날뛰면서 전신을 내달리기 시작한 익숙한 고통. 그러나 다미언은 그 무엇보다도 릴리에이 눈을 뜨고 있었다는 데 소름이 끼쳤다.
"눈을 감고 있으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자칫 잘못했다면 그대로 변이하는 모습을 들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으로 다미언의 말투가 뾰족해졌다.
“전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황한 릴리엔을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과민하게 굴었어.'
다미언은 이를 악물었다. 심정으로는 다 죽어가는 암살자들에게라도 확인사살 삼아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릴리에이 보는 앞에서 그런 잔인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소란을 느낀 건지 뒤늦게 호위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서재안의 난장판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
“전하, 비전하. 다치신 곳은"
“없어.”
다미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 하며 칼끝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수색하고 처분해라.”
"아, 예!”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 멍청한 놈들은 대체 그가 여기 없었으면 어쩔 뻔했단 말인가?
그대로 대공비를 잃고 그에게 낯짝을 들이밀 생각이었단 말인가?
“전하…….”
아아, 젠장할!
화가 치밀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여기선 안 돼, 여기서만은 안돼.’
릴리엔이 보는 앞에서만은 안된다. 다미언은 간신히 스스로를 추슬렀다.
"괜찮아요."
“상처가 괜찮지 않으십니다."
릴리엔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눈빛에 아직 다미언에 대한 공포감은 없었다. 그에 대한 걱정만 있었다.
잠깐이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보다 필사적인 기분이 되었다.
저 눈빛을 지켜야만 했다. 저 눈빛 속에 그에 대한 공포감과 혐오감이 깃드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제발.’
그러나 릴리엔은 다미언의 간절한 바람에 협조해주지 않았다.
릴리엔의 손이 다미언의 찢어진 옷깃으로 다가왔다. 상처를 살피려는 모양이었다. 걱정해주는 게 기쁘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었다. 다미언은 상처가 이미 아물어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릴리엔의 손을 밀어내고 말았다.
“전하? 왜…….”
릴리에의 얼굴에 적잖이 당혹감이 번졌다.
'젠장.’
다미언은 욕설을 뇌까리며 변명했다.
“피가 튀어서 그렇지 상처는 깊지 않습니다. 오히려 뭐가 묻어 있을지 모르니 비께서 손대지 않으시는 게…….”
“제가 손만 대서 위험해질 정도면 전하께서도 서 계시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만.”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다미언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릴리에의 말이 백번 지당했을 것이다.
다미언은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상처는 의사에게 보이겠습니다. 심하지 않으니…….”
“전하, 죄송합니다만 계속 피가 납니다.”
“예?”
릴리엔이 단호한 손길로 드물게 멍한 표정을 한 다미언을 자리에 앉혔다.
잠깐 어깨에 와 닿은 손길만으로도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릴 뻔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전신에 고통이 퍼지고 있던 차에 옷 위로나마 릴리에의 손이 닿으니 죽을 것 같았다.
죽을 것처럼 황홀했다.
사막 한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데 입술 위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진 것 같았다.
온몸의 정신이 깨어나 그 물방울 하나를 갈구하게 되는 느낌.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릴리엔을 붙잡을 뻔했다. 품에 안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싶었고, 그리고.
“......!"
시야가 흔들렸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제가 릴리엔에게 달려들었나 싶어 깜짝 놀랐다.
'안 돼!’
"손대지 마십…….”
“알겠으니까 가만히 앉아 계세요.”
릴리엔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비, 저는…."
“상처가 심하십니다. 움직이시니까 피가 더 흐르기 시작했고요.”
“……예?”
누가. 내가?
“휘청거리다 더 다치실 것 같으니 제발 얌전히 앉아 계세요. 손대지 않을 테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목에 난 상처에 손을 대었다 떼 보았다. 손이 피로 푹젖어 있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