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다미언 루펜바인이 피를 철철 흘린다. 십대 중반을 넘긴 이후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인 상처가 아물지 않아 지혈을 해야 한다니.
거의 십 년 만에 일반인처럼 상처 치료를 받고 있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심지어 상처 부위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열이 오르고 있었다.
뺨이 사과처럼 붉어지고 눈빛이 나른하게 풀렸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요염한 모습이었다.
다미언은 열에 들떠 생각했다.
'원래 사람의 몸이라는 건 이토록 불편하고 연약한 건가.'
절로 릴리엔에게 시선이 갔다.
일반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그도 베인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렇게까지 맥을 못 추는데 만약 릴리 엔이라면 어땠을까.
손쓸 새도 없이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았다.
'역시 너무 편하게 죽였어…….’
다미언이 편치 않은 기색으로 이를 악물자, 서늘하게 적신 물수건으로 신중하게 그의 달아오른 이마며 뺨을 식혀 주던 릴리 엔이 금세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전하,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불편한 생각을 한 거지 몸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걱정을 쉬이 떨쳐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다미언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수건을 다시 물에 담그고 대신 서늘해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열을 식혔다. 서늘한 대리석조각 표면 같은 아내의 손이 열오른 살갗에 와 닿자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전하…….”
기분이 좋아서였는데 릴리엔은 그가 아파서 그런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다미언은 흐려진 아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고 저 사람이 다치는 대신 제가 다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기분이 좋은걸……'
릴리에이 저토록 가슴 아픈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게 기분이 좋았다.
다미언을 낳아준 어머니도 저렇게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살뜰히 보살펴 준 적이 없었다.
사실 다미언의 몸 상태는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 다미언루펜바인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는 게 이례적인 사태일 뿐. 의식을 잃을 정도도 아니었고 크게 아픈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마비가 오는지 좀 얼얼하기도 하고 지혈을 해도 피가 완전히 멎지 않고 있긴 했지만 이보다 더 심한 일도 겪어 본 다미언의 기준에서는 거뜬히 견디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견딜 만하다고 솔직히 말하는 대신 서늘해서 기분 좋은 릴리엔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걱정하는 심정이 어떤지는 알지만 걱정과 보살핌을 받는 이 달콤하고 간지러운 감각을 좀 더 누리고 싶은 욕심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신 손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요…….”
“열이 많이 오르셨으니까요. 약을 드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때 다미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가지고 무언가를 시험해 보던 주치의가 돌아왔다.
“독에 당하셨습니다.
“네?”
놀란 사람은 릴리엔뿐이었다.
다미언을 오랫동안 알아온 이방의 측근들은 대개 “아, 독이구나. 어쩐지 훌쩍 털고 일어나질 못하시더라.”하고 납득하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정확한 건 좀 더 분석을 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베놈 코어'라는 용혈독의 일종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주 희귀한 극독인데, 특별한 점은 마력에 반응해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마력 말인가?”
대공비가 다급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대공의 특별한 체질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 주치의는 약간 당황해서 아이반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시나 보죠?’
아이반이 조용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 모르시는구나. 주치의는 보다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음…… 쉽게 말해서 마력을 많이 보유한, 티어가 높은 사람에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독성물질입니다.”
“그런…….”
“하지만 전하께서 워낙 강하시니까요. 제 기억으론 예전에도 한 번…….”
아이반이 다급히 눈치를 주었다. 주치의가 아차 하고 말을 바꿨다.
“예전에도 한 번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그러니까 그분도 금방 회복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아니 대공 전하께서도 금방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그런가.”
둘러대는 게 미숙한 주치의 때문에 아이반은 이마를 싸쥐었지만 다행히 대공비는 안도하기 바빠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단 해독과 해열에 도움이 되는 약제를 좀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대공비의 시선은 대공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더 놀라운 건 그 강철 같은 대공이 “괜찮을 거예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공비를 달래고 있다는 거였다.
대공비를 제외한 모두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거 지금.'
'대공비께서 속고 계시는 것 같은데.’
주치의는 얼른 제조한 약을 가져왔다. 릴리엔이 당연하다는 듯 약그릇을 받았다.
“전하, 약을 드셔야겠습니다.”
“비께서 먹여주시나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그녀를 지키다가 다친 다미언을 위해 릴리에이 해 줄 수 있는 건물수건으로 열을 식혀 주고 약을 먹여주는 것뿐이었다.
릴리엔은 안타깝고 속이 상했지만 그녀의 걱정과 보살핌은 다미언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들이었다.
대공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작은 은숟가락으로 약을 조금씩 떠서 대공에게 먹였다.
다미언은 아픈 새끼 짐승처럼 조금씩 떠주는 약을 기특하게 받아먹었다.
주치의와 아이반, 모린 부인과 엘런 총관을 위시한 대공의 최측근들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 뒤 일제히 그 광경을 외면했다.
'못 본 척 합시다.'
‘그럽시다.'
암묵적으로 합의가 오갔다.
* * *
그날 밤 릴리엔은 밤새 다미언을 간호했다. 간호라고 해 봤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부채질을 하거나 물수건으로 열을 식혀 주고 때가 되면 약을 먹였다.
다미언의 상태는 호전되지도 않았지만 크게 나빠지지도 않았다.
“아까 그 암살자들은…… 황제폐하께서 보내신 걸까요.”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은형님치고는 방법이 좀 과격하다 싶긴 하지만요.”
“블란쳇 공작의 건으로 심기가 상했기 때문이겠죠?”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오래전 도식으로 정리해 놓았던 내용을 기억 속에서 조금씩 되짚어 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한 기록은 사실 큰 의미를 두긴 어려웠다. 지난 세월 릴리엔이 꾸준히 변수로 작용한 결과,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큰 줄기 정도일 것 같았다.
릴리에이 아는 한 마테오가 황제로 등극하는 정황은 다음과 같다. 일곱 명의 선제후가 만장일치로 클로드에게 거부권을 행사하고, 클로드가 끌어내려진 자리를 자연스럽게 마테오가 이어받게 된다.
'이후 클로드 황제와 레이첼 부인이 동반 자살하면서 끝…'
게다가 지금은 예전과 달리 황태자와 튜린의 동맹이 위태롭지 않고 굳건한데다 블란쳇 공작까지 이쪽 편에 가세하기까지 했다.
황제가 조급하게 굴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 그녀를 꼭 죽이려고 들어야만 했을까?
석연치 않은 점은 있었지만 어쨌든 이 일이 황제의 행각이라는 데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미언을 상대로 합을 겨룰 만한 실력자를 암살자로 보내면서 베놈 코어 같은 희귀한 독을 보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현재 일곱 명의 선제후 중 세분은 황제 폐하의 편에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헤멘린나 선제후인 다미언과 튜린 선제후인 세드릭, 이 카난 선제후가 마테오 황태자를 지지했다.
남은 한 명은 바로 카스타나 선제후였다. 아라티네 황후의 아버지이자 마테오 황태자의 외할아버지인 그는 현재까지도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카스타나 선제후께서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외손자인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마 형수님께서 작은 형님과 재혼하지만 않았어도 그러셨겠죠.”
비단 카스타나 뿐만 아니라 이 황태자파의 그 누구도 아라티네 황후를 전면으로 배척하고 비방할 순 없었다. 그녀는 그들이 지지하는 황태자의 어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카스타나가 아라티네 황후를 잘라내지 않은 채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에 가담하는 건 상황적으로 애매했다.
게다가 카스타나 선제후는 클로 드 황제에게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다.
복잡한 상황이었고 카스타나 선제후는 잃을 것이 많은 데다 나이도 많았다. 그래서 한쪽 편을 들다가 같이 몰락하는 것보다 중립을 지키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 카스타나 선제후를 포함해서 적어도 한 분, 혹은 두 분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이군요.”
그렇게만 되면 나머지 선제후도 클로드를 포기하고 마테오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컸다.
전쟁이 아니라 표결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적은 수로 대군을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표결로 가면 단둘로는 무슨 수를 써도 다섯을 이길 수 없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아마도 아라티네 황후의 입장이 카스타나 선제후를 끌어들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황후 폐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들어 본 적이 없어. 소문만 무성할 뿐…….’
그때 다미언이 가느다랗게 끙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릴리엔은 그제야 생각에 잠겨 부채질을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앗, 전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비께서도 팔이 아프실 텐데 계속 무리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부채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릴리에의 관심을 자기 쪽으로 붙잡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의사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질 거라고요.”
다미언이 멀쩡한 쪽 팔로 반쯤 몸을 일으킨 릴리엔을 눕혔다.
“저를 간호해주시는 건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비께서 무리하시다 탈이라도 나면 제 마음이 아플 것 같군요.”
릴리엔이 걱정해주는 게 좋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혹사시키고 싶진 않았다. 다미언의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둘 뿐인 밤에 한 침대 위에 있어서인지, 그 진심은 확실하게 릴리엔에게 닿았다.
릴리엔은 부채를 내려놓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언제나 다미언의 진심은 그녀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대공비의 껍질이 벗겨진 그 작고 몸 둘 바를 모르는 릴리엔을 다미언이 얼마나 흡족하게 사랑하는지, 릴리엔은 몰랐다.
“같이 자 줄 거죠? 생각은 제가 좀 괜찮아지면 그때 같이 해요.”
릴리엔을 재우고 나서, 다미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처에 처치해둔 거즈와 붕대를 풀어 내렸다.
여전히 벌어져 있는 베인 상처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미언의 경험과 계산에 따르면 이미 아물었어야 하는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