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예전에 같은 독에 당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더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세 시간 만에 회복세에 접어들기 시작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지금 몸상태가 이상한 게 확실하지만…….
“비상 상황은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래.”
다음날 아침.
태평하게 비보를 전하는 다미언 때문에 아이반은 또다시 머리를 싸쥐어야 했다.
“근 10년이 넘게 몸을 그토록 험히 굴리면서도 흉터 하나 남지 않았잖습니까. 그런 회복력이 갑자기 오작동을 일으켰다는데, 그게 비상 상황이 아니라고요.
“음.”
“혹시 과다 출혈이나 실혈사라고 들어는 보셨습니까?”
비꼬는 말에도 다미언은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아예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는 비가 걱정해 주는 게 너무 좋아서 깜빡 잊었는데, 작은 형님을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 나라면 몰라도 비에게까지 암살자를 보내다니…….”
“아니, 이 시국에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다미언 루펜바인의 전술적 가치를 고려했을 때, 그 몸에 난 상처가 평소처럼 아물지 않는다는 건 그냥 “그렇구나.” 하며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태자파를 지켜 주고 있는 성벽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급히 보수 공사를 하고 무너지게 한 원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다미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내 비를 암살하려 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지?”
아이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다미언은 자신의 이상 상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대책 마련을 위해 협조할 태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이 저택에는 이 말 안통하는 남자와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하며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딱 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반은 '비전하께 고자질하기’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비정하게 마음먹었다.
* * *
다미언 루펜바인의 뒤치다꺼리로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아이반의 호소에는 심금을 울리는 절절함이 있었다.
릴리엔은 차분하게 아이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경.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일은 제가 해결해 보도록 하지요.”
이 어찌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가!
아이반은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다미언에게 돌아가 전했다.
“전하, 비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뭐?”
다미언 역시 그 한마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반, 너…….”
그새를 못 참고 비에게 고자질을 해? 다미언의 기세가 흉흉해 지려 하는 순간…….
“안 가 보십니까? 비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너, 다녀와서 보자.”
다미언은 릴리에에게 부상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물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대단치 않은 상처였다. 출혈량도 많지 않았다. 이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원인 점검차 아주 오랜만에 코어와 마력을 확인했을 때 코어 쪽에 미세한 손상이 감지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으로 드는 핑계에 불과하고 다미언의 본심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상처가 곧바로 아물지 않는다는 게 문제시 되는 건 다미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게 보통이었다.
다미언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
는 걸 릴리에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비에게 고자질을 해?'
아이반에 대한 짜증이 거의 살의로 변모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불안이 다미언의 마음을 잠식했다.
다미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비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혹시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미언이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비밀의 존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오는 고통 정도는 의식할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한 불안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다미언은 도망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릴리엔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굶주린 짐승을 길들여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직 도망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두려웠다. 격렬하게 이는 감정의 풍랑을 따라 마력이 불길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코어의 손상을 의식하기 시작해 서일까, 마력의 움직임이 미세한 손상을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다미언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멈춰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덜컥.
"....!”
돌리지 않은 문고리가 돌아갔다. 안에서 문을 연 것이었다.
“비…….”
“전하.”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였다.
다미언의 머릿속에 블란쳇 공작가에서 깽판을 치고 돌아온 날 밤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들어오세요.”
“네…….”
다미언은 그답지 않게 묘하게 주눅이 들어 릴리엔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좀 드시겠어요?”
“그게…….”
릴리엔이 그를 위해 손수 뭔가를 해 주는 걸 사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마 평소라면 좀 더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불안한 탓인지 대답조차 쉬이 나오질 않았다.
“맛은 별로 없겠지만 그렇게 긴장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음……아마도.”
“비께서 주시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다미언은 다급히 대답했다. 속으로는 머리를 팽팽 굴려 가며 릴리엔의 태도를 다각도로 해석하는 중이었다.
아직 도망가지 않고, 그를 꺼리지도 않는 걸 보면 안심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본격적인 추궁전에 뜸을 들이는 걸로 받아들이고 긴장해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것과는 달리, 다미언의 몸은 릴리엔이 앉으라는 곳에 착실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기다려' 명령을 수행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릴리엔은 차분한 태도로 다미언과 자신을 위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다미언은 릴리엔의 취미가 차 대접하기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달그락거리는 도자기들, 따뜻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릴리엔은 조용하고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무척 릴리엔다운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차 향기가 피어오를 때쯤 다미언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았다.
사실 차향보다도 릴리엔이 그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심신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드셔 보세요. 맛은 취향에 안맞으실 수도 있어요.”
릴리엔이 그를 위해 정성껏 준비해 준 거였다. 취향이라는 기준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다미언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풀 맛이 났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 한 모금에 불안으로 날뛰던 마음이 약간 이나마 가라앉았다.
이 차도 그 매듭처럼 릴리에이 만들었기 때문일까. 다미언은 제도 모르게 홀짝홀짝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입에 맞으시는 모양이네요."
"네."
다미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비께서 주신 것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순종적인 다미언이었다. 커다란 손에 무척 작아 보이는 차 한 잔을 조심스럽게 잡고 홀짝거리면서 릴리에의 눈치를 살피는 게…….…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내가 잘못된 걸까?
어쨌든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이건 이거였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찻잔을 반쯤 비운 걸 확인하고 본론을 꺼냈다.
“전하의 상처에 대해 들었습니다.”
“……예.”
긴장으로 털을 곤두세운 채 다 미언이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 경이 말하길 전하께서는 회복력 면에서 굉장히 특출하신데 유독 이번 상처가 낫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실입니다.”
릴리엔의 표정이 흐려졌다. 다 미언은 황급히 덧붙였다.
“비께서 걱정하실까 봐 그랬습니다. 대단치 않은 상처일 뿐이........”
"대단치 않다고요?”
“사실 독에 당한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 건 평범한 일입니다. 그동안 제가 평범하지 못했던 거지…….”
“죄송합니다만 전하."
릴리에이 드물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여태까지 전하께서 보였던 회복력이 지금 그 상처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전하의 건강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저는 지금 전하의 용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요.”
다미언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의 괴물 같은 회복력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도 릴리엔은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복력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후, 한 발 더 나아가 다미언을 걱정하고 있었다.
'꺼림칙하지…… 않은 건가?'
서너 살 때쯤이었다. 괴물과 닿기 싫다며 다미언을 밀쳐 낸 시녀가 있었다. 밀쳐진 다미언은 이마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어린 다미언은 너무 아팠던 나머지 상처가 빨리 없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이마에 난 상처가 눈앞에서 아무는 걸 본 시녀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치다 발을 헛디뎌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 사건 뒤로 다미언은 상처가 빨리 없어지길 바라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누군가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아도 그냥 견디려고 노력했다.
혐오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픈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러나 그가 좀 더 나이를 먹고 십대가 되면서 회복력은 아예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다미언은 결국 그쯤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전쟁터로 향하게 됐다.
하지만 릴리엔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다미언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