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식어 버린 조그만 찻잔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다미언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한 건지, 릴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 제 병에 대해 숨겼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제게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전하께 항의할 자격이 없는 셈입니다.”
"예?”
“전하께서 제게는 말씀하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릴리엔은 다미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굉장히 시무룩해하고 있다는 게 전해지는 표정이었다.
“제겐 전하와 같은 기지도 없으니, 아마 전하께서 말씀해 주실 생각이 들 때까지 걱정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 순간 다미언은 눈치챘다. 릴리엔의 앞에서 수없이 애교를 떨고 시무룩한 척, 우울한 척으로 원하는 바를 얻어 냈던 그의 경력이 온 힘을 다해 외치는 느낌이었다.
“비, 지금 설마…….”
그의 비, 청렴결백하고 올곧은 그 릴리에 이슬라르가 지금 놀랍게도 일부러 시무룩한 척을 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제가 먼저 잘못한 거니까요.”
"........"
다미언은 말을 잃고 말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분명 매번 자기가 하던 수작질이었는데도 직접 당하니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릴리엔이 일부러 과장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아찔한 높이에서 툭 떨어졌다.
'내가 죽일 놈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한 자신이 그저 백번 죽일놈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릴리엔의 연기가 완벽해서 깜빡넘어간 건 아니었다. 처음 이런 연기를 시도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어설픈 데가 있었다. 말하기 전에 흘긋 다미언의 눈치를 보는 것도 그랬다.
훨씬 더 고단수인 여우, 다미언의 눈에는 허점이 속속들이 다 보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이라는 거였다.
저 릴리에이, 얕은꾀 부릴 줄 모르는 우직한 사람이 고작 다미언의 입을 열자고 안 하던 어설픈 연기까지 시도한다는 자체가다미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미언이 쿵 떨어진 심장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도 릴리 엔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전하의 심정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전하의 상태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합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분이란 걸 잘 알기에 더 걱정이 돼요."
이건 진심이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시작은 다미언을 흉내 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온통 진심이 되고 말았다. 릴리엔다운 일이었다.
다미언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다미언의 마음에 불쑥 이런 충동이 올라왔다.
'차라리 다 말해 버릴까.'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가능성이었다.
릴리에의 진심 어린 걱정과 그의 인간답지 않은 회복력을 문제삼지 않은 점이 그만큼 크게 다 미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만약 비가 나를 거부한다면…….’
여태까지 공포와 혐오감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 미언 스스로도 이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단 점에 약간 놀랄 정도였다.
물론 여태까지 다미언이 배척만 받으며 살아 온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이도엘이 있었고, 전쟁터에서 만난 인간 군상 중에는 목숨만 살려 준다면 괴물 상관을 모시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괜찮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반이 이 경우에 해당했다.
하지만 빈도를 따지자면 전자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 릴리에이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자신을 꺼린다면?
순간 그 의문에 답하듯 여러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말하던 릴리엔.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한 릴리엔…….
다미언은 희망을 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려고 노력했다. 릴리에이 그를 떠나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확실한 건, 다미언은 릴리 엔을 두고는 그 어떤 모험도 감수할 수 없다는 거였다.
'차라리 목숨을 판 돈으로 걸고 도박을 하고 말지.'
다미언은 릴리에에 한해서는 아주 약간의 불확실성도 용납할 수 없었다.
“전하?”
생각에 잠겨 말을 잃은 다미언을 릴리에이 일깨웠다. 다미언은 그쯤에서 결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사실을 털어놓기로, 거짓말이 아닌 척한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쁜 거짓말이었다.
* * *
아이반에게 생략했던 자세한 설명을 하는 동안, 다미언은 커다란 진실을 숨기는 데 정신이 팔려 그만 깜빡하고 코어에 생긴 손상에 대해서 털어놓고 말았다.
“코어에 손상을 입으셨다고요?”
차분하게 듣던 릴리엔의 표정이 금세 심각해졌다.
코어가 깨져 마력과 생명력을 순차적으로 잃게 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릴리엔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혹시 독 때문에…….”
“그렇다면 예전에 이 독에 당했을 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났어야죠.”
다미언은 자기 경우는 릴리엔의 경우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손상 정도가 너무 미세한 나머지 여태까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입니다.”
“혹시 짚이는 곳은 없으신가요?”
다미언은 말할까 말까 잠깐 망설였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에 대해 숨기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조금 더 솔직히 굴기로 했다.
“예전에 태자 전하를 구할 당시황실 소유의 고대 병기에 당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때 입은 부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대병기라면….”
릴리엔의 표정이 이제까지보다 더 심각해졌다. 다미언은 황급히 설명했다.
“여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부상에 불과합니다. 목에 난 상처 역시 마찬가지고요.”
“미약하다고요?”
“예. 계속 피가 나면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뿐입니다.”
“전하…….”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그가 안쓰러웠다.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부터 종종 생각했던 어렴풋한 느낌이 확신이 되었다. 다미언은 자기 자신을 함부로 다뤄도 고장 나지 않는 물건쯤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소중하게 다뤄진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 같아.'
“왜 그러세요, 비?”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릴리엔은 일단 부드러운 어조로 신중하게 접근해 보았다.
“예전에 제가 전하께 자신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아무래도 잊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대수롭잖게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다미언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였다.
“글쎄요. 스스로를 아낀다는 건 괜찮은 일도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 순간 릴리엔은 암담해졌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아낀다는 건 다미언에게 있어 상당한 난제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다미언은 전쟁 영웅이고 선황의 동생이었다.
게다가 저토록 아름다운데.
대체 어디부터 어긋나야 저 모든 조건을 가지고도 자신을 물건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릴리엔도 스스로의 가치에 상당히 무심한 편이었지만 다미언은 보통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자존감이 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두면 다미언은 영영 자신을 아끼지 않고 물건처럼 사용해 버릴 것 같았다.
'일단…… 비슷한 눈높이로 내려가야겠다.'
“한 가지 여쭐게요, 전하. 만약 제 몸에 난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이시겠어요?”
당연히 끔찍하다. 가능하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영민한 다미언은 릴리엔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릴리에이 빙그레 웃으며 마저 설명했다.
“전하의 상처가 낫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그저 조금 불편하고 말뿐이시겠지만 저는 속상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릴리엔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건 이미 몸으로 겪어 알고 있다. 하지만 말로 확인받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이 달콤한 확언을 좀 더 듣고 싶었다. 그런 다미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릴리엔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세요.”
“저를 속상하게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주의… 하겠습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다미언의 눈빛에 여전히 릴리에이 하는 말을 이해한 기색은 없었다.
'시간이 걸리겠구나.'
릴리엔은 말없이 다미언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미언이 한숨을 쉬며 릴리엔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릴리엔은 넓은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이면서 생각했다.
'…분명 고대병기라고 말했지.'
다미언이 지칭한 병기에 대해서는 릴리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랑스럽고 가엾은 사람의 정신을 휩쓸고, 결국엔 미쳐 버리게 만든 것.
'자그레브.'
* * *
잠시 후.
“주치의를 부르라고요?"
“그래.”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태도에 아이반은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그는 릴리엔에게 고자질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컸다. 한데 이토록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자발적으로 의사를 보겠다고 말씀하시다니…….'
다미언은 어차피 두면 나을 상처를 가지고 소란스럽게 군다며, 의사를 귀찮은 족속 취급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뿌리 깊게.
그 싫어하는 의사를 불러 놓고도 만면에 화색이 가득했다.
“오늘부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로 결심했다.”
아이반은 주군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대충 장단을 맞췄다.
“예….그러십니까…….”
“왜냐면 내가 다치면 비께서 아주 속상해 하시거든.”
"어련하시겠습니까.”
아이반은 한숨을 쉬었다. 남의 말은 조금도 안 듣는 인간인데, 그나마 목줄을 쥔 비전하께서 상식과 도덕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분이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역시 하나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을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 두시는 게 분명했다.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했다.
“그나저나 그 암살자들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니 굳이 베놈코어를 사용한 게 좀 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