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10화 (110/155)

110화.

베놈 코어는 티어가 높을수록 효과가 있는 독이다. 네이쳐 이 하부터는 이 독으로 큰 효과를 보기가 어려웠다.

대외적으로 티어 네이쳐로 알려져 있는 릴리에에게 쓸 독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비도 그 얘기를 하더군.”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황제와 황태자파 사이에 분쟁을 격발시키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비전하의 추측이 타당하군요.

대체 그게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쪽의 의도대로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내 아내를 공격한 책임을 져야 해.”

이 일을 두고 이미 내부적으로도 한 차례 물갈이가 있었다. 덕분에 대공가를 지키는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첨예하게 경계를 세우게 됐다.

그러나 다미언은 집안 단속만 하고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번 일을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다. 곱게 죽고 싶다면 대공비만큼은 건드려선 안된다는 걸 대외적으로 만천하에 가르쳐 줄 기회 말이다.

물론 릴리엔은 그런 다미언을 뜯어 말렸다. 다미언은 아내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 암살자들 시체 말이야.”

“전하, 설마…….”

불길한 예감에 아이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미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로 보내자. 형님께서 웬잡놈이 황제인 척 대공비를 건드렸다는 걸 아실 수 있도록 말이다.”

클로드의 성격에 감히 자신을 사칭하려 한 시도를 그냥 넘길리가 없었다.

릴리엔에게 약속했으니 직접 나서지는 않겠지만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길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미언은 손깍지를 끼며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대역 죄인을 둘째 형이 어떻게 작살내시는지 구경이나 해야겠다.”

* * *

다음날 아침.

암살자들의 모가지가 황제 앞으로 배달되었다. 전대미문의 사태에 황제는 격노했다.

이걸 왜 나에게 보냈냐고 황당해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심혈을 기울여 기른 최정예 암살자를 둘씩이나 네 멋대로 움직여?”

암살자들은 그가 황자 시절부터 은밀히 길러 온 수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암살자를 기르는 건 쉽지 않았다. 적임자를 찾는 것부터가 난 관의 연속이었다.

그런 귀중한 자원을 둘씩이나 잃다니!

“공을 세우려는 욕심도 정도가 있지! 네 독단으로 대공저에 암살자를 보내? 짐을 우습게 아는 것이냐?”

“폐, 폐하! 신은 억울합니다!”

암살자를 총괄하는 클로드의 심복, 모드술 자작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독단이라니요! 하늘에 맹세코 저는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다 부인께서 제게 지시한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레이첼이?”

황제의 의혹 섞인 시선이 정부에게 향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가 막 힌다는 듯 비웃음을 토할 뿐이었다.

“모드술 자작, 그리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시다니 우습군요.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지만…….”

“부인!”

"폐하, 아시겠지만 이 레이첼은 저런 머저리가 아닙니다.

레이첼이 탁, 하고 붉은 부채를 접었다.

“저였다면 대공의 눈앞에서 대공비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대공비를 황궁으로 끌어들여 일을 벌였을 겁니다.”

“하, 하지만 제게 분명 대공저에 침투해서, 베놈 코어를 쓰라고 조언을…!”

“티어 네이쳐를 공격하는 데 베놈 코어 같은 독을 쓰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가 폐하를 배신하기로 결정했다면 모를까.”

“나를 배신한다고?”

“아시잖아요, 폐하.”

레이첼이 요염하게 웃으며 다시 부채를 부쳤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는 폐하를 절대 배신할 수 없습니다. 저 교활한 모드술 자작이라면 몰라도, 저는 폐하께서 건재하셔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폐하를 제외한 모두가 이 레이첼을 증오하잖아요.”

사실이었다. 만일 클로드가 실각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이첼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저는 폐하를 위해 화살받이를 자처했어요.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네 말이 맞다.”

둘은 공범이었고 운명 공동체였다.

하지만 모드술, 이놈은 어떤가?

원래 암살자였던 놈을 거둬서 수하로 삼은 것이니 충성심을 기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작위를 얻었다는 자부 심이 큰 탓인지, 이렇게 과잉 충성으로 점수를 따려는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무능한 자를 쓰고 말지,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하는 자를 더 기용할 순 없다.

클로드가 넌더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끌어내라.”

“폐하! 폐하!"

토사구팽의 시간임을 직감한 모드술 자작이 애원했다.

“신은 억울합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 으억! 꼭………!”

결국 기사들이 그의 급소를 때려 기절시키고 나서야 끌고 나갈 수 있었다.

클로드는 어쩐지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기절한 채 끌려 나가는 모드술 자작을 바라보았다.

정황이 명백해서 일단 그를 내 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가 레이 첼을 걸고넘어진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요즘 들어 태도가 좀 이상하던데. 설마…….’

그때 레이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게 다 폐하 탓이에요.”

“뭐?”

클로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정부가 돌연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 레이첼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폐하뿐이신데, 고작 저런 근본 모를 자들이......."

레이첼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자, 클로드는 황당했다.

“대체 짐이 뭘 어쨌다고 우는 것이냐?”

“저는 폐하의 곁에 남기 위해서 후작 부인 자리도 포기했어요!"

레이첼의 남편은 황제의 내연녀가 된 아내를 감당하지 못했다.

기세 좋게 소리친 것과 달리, 레이첼은 곧 가슴을 들썩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습니다.

제 신세를 좀 보세요! 폐하를 위해 그토록 헌신했는데 저깟 놈이 받는 자작위조차 받지 못해 무시당하는 신세라니…….”

“그만, 그만.”

클로드는 머리가 아팠다. 어쨌든 덕분에 내내 신경을 거스르던 의문점 하나가 풀렸다.

“그래서 요즘 태도가 엉망이었던 거냐.”

레이첼이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폐하께서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황제시니, 무시당하는 제 마음같은 건 모르실 겁니다.”

클로드는 혀를 끌끌 찼다. 건방진 작태였지만 그간 꽤 속앓이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귀엽기도 했고 애처롭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정부에게 아무 작위가 없는 건 황제의 위신에도 문제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래. 내가 네 마음을 몰라주었구나.”

"폐하……!”

레이첼이 클로드에게 와락 안겼다. 클로드는 건성으로 달랬을 뿐인데 그가 생명줄인 양 매달리는 레이첼 부인의 금빛 정수리를 보며 우월감에 찼다.

'이런 계집을 달래는 것쯤이야 쉽지.'

“모드술이 자작이었으니 네게는 백작위를 주마. 그리고 기념 파티를 아주 성대하게 열도록 하자꾸나.”

"폐하………! 정말이신가요?”

레이첼이 마치 클로드를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러러보았다.

“그래, 짐이 그동안 네게 너무 무심했다.”

"폐하……!”

나긋하게 안겨 드는 여체를 다 독이며 클로드는 간만에 너그러운 황제 역할에 한껏 도취되었다.

***

그날 밤, 릴리엔은 또 다시 예의 서쪽 별궁 꿈을 꾸었다.

'그때 다친 아이를 만났던 곳이잖아.'

그동안 잊고 있었던 첫 번째 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미처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릴리엔은 무작정 다시 아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소리를 따라갔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인내심이 강한 사람답게 릴리에은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침실을 몇 번이나 열어보았을까. 어느새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해 있었다.

안 열어 본 방문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 주변에 아이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릴리엔은 마지막으로 다락방을 한번 뒤져 보기로 결심했다.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은 외진 곳에 있었다. 하인들만 사용하는 계단은 폭이 좁고 나무 재질이라 삐걱거리기까지 했다.

다행히 거기엔 릴리엔이 애타게 찾던 아이가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저분하게 자라난 머리카락과 한눈에 보기에도 말라 보이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작은 발 역시 피투성이 상태였다.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구나.”

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릴리엔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랑 같이 가서 치료를 받아 주지 않을래?”

“……난 못 가.”

갑자기 주변 풍경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불현듯 잠에서 깨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안 돼, 아직 깨면 안 되는데. 릴리엔은 다급하게 말했다.

“네가 못 온다면 내가 갈게. 거기가 어디인지만 알려 준다면…….”

“나는 거울 속에 있다니까.”

아이가 체념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제는 아이의 모습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필사적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 거울이 어디 있는데……?”

아이가 작은 입술을 무어라고 달싹인 순간.

"!”

릴리엔은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났다기보다 다른 세상에 갔다가 억지로 끌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얼얼했다. 다락방에 비치던 햇살과 아이 주변에서 반짝이며 부유하던 먼지까지 너무도 생생했다.

그리고 릴리에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마지막에…….

"자그레브라고 했어.”

다미언의 정신을 난도질한 고대 병기의 이름을 듣자, 이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닌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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