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11화 (111/155)

111화.

대상의 정신으로 침투하는 고대 병기에 대해 릴리에이 아는 거라곤 두 가지뿐이었다. 그게 다미언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다미언은 영혼의 방어막에 금이 가는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거였다.

'영혼의 한 조각을 빼앗겼다는 말은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문자 그대로 다미언의 영혼 한 조각이 자그레브에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지나친 걸까…….’

다미언이 서쪽 별궁을 꺼려한 것과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해했던 것.

그리고 다미언이 코어에 미세한 손상을 발견했다고 시인한 일까지.

그런 단편적인 것들이 릴리엔의 불안감을 자극한 나머지, 현 상황과 뒤섞여 심란한 꿈으로 나타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영혼의 조각이 다미언도 아닌 릴리에의 꿈에 나타난단 말인가.

릴리엔이 그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신 거 아닌가요?”

“전하, 일어나셨나요?”

다미언이 대답 대신 작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사실 그는 반은 깨 있고 반은 자는 선잠 상태로 있다가 릴리에이 옆에서 뒤척이자마자 말끔하게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지금은 혹시 귀엽게 보일까 해서 잠이 덜 깬 척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

"으응…….....”

가늘게 비치는 햇빛을 피하는 것처럼 다미언이 두툼한 어깨를 구부리며 릴리엔의 품에 파고들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일부러 이런다는 걸 반쯤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매번 호락호 락해지곤 했다.

‘매정해지기엔 너무 귀여운걸..'

특별히 오늘 아침은 유독 더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만약에 꿈에서 본 게 정말로 이 사람의 영혼이라면…….'

황자로 태어나서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야 할 다미언이다. 한데 왜 그렇게 보살핌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별궁 다락방에 혼자 있는 걸까?

그저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릴리엔은 왠지 다미언이 스스로를 물건처럼 다루는 이유와 꿈이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꾼 것도 그렇고, 예감일 뿐이지만 심상치가 않아.'

그냥 헛꿈을 꾼 것 같지는 않다.

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런 저런 추측을 하는 릴리엔의 허리를 다미언이 힘주어 껴안았다.

“전하.”

다미언의 보랏빛 시선이 새치름했다.

“드셔야 할 약에는 관심도 안주시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앗.”

다미언이 아프지 않게 릴리엔의 어깨를 잘근잘근 물었다.

여느 때와 비슷한 대공저의 아침 풍경이었지만 릴리엔은 오늘 꾸었던 꿈을 잊어버리지 않게 잘기억해 두었다.

***

대공비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서재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안 떨어지려는 남편을 떼어 놓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전하, 오늘은 국책 사업과 관련해 제법 큰 화의가 열린다면서요.”

“가기 싫어요.”

일정을 알려 줘도 다미언은 무작정 떼를 쓰며 달라붙었다.

“저더러는 상처 하나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달라고 하셨죠. 그래서 저는 착한 남편답게 주치의에게 진료도 받았는데.”

어제 주치의는 다미언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는 있지만 악화되지도 않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피가 계속 나질 않나.”

"아, 그렇긴 한데 원체 혈기가 왕성하셔서요. 이 정도 출혈로는 기별도 안 가실 겁니다."

혹시 어지럽거나 기절할 것 같으냐는 주치의의 질문에 다미언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얼굴에 윤기까지 살짝 도는 게…… 유일하게 걱정하는 릴리엔이 보기에도 다미언은 건강해 보였다.

다미언은 본인의 예상대로 '당분간은 별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공식적인 진단 결과를 손에 넣었다.

“저는 그렇게 비의 걱정을 덜어 드리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었다.

"…한데 왜 비께서는 유일한 약인 저를 드시는 일에 소홀하신 걸까요?”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농밀하게 빛났다. 릴리엔은 꼭 덫에 걸린 채 사냥꾼을 만난 사냥감처럼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다 미언이 속삭였다.

"해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일을 떠올린 릴리엔은 제법 창피한 기분이 되어 마른세수를 하고 말았다.

본인이 당사자만 아니었어도 곧 아이가 들어서겠구나 어림짐작하고 말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정도로 꿀이 뚝뚝 흐르고 깨소금 냄새가 고소한 신혼생활 그 자체였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중 하나로 다미언은 매일매일 릴리에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는 게 당연한 제국식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주책맞아 보일 정도로 진한 애정 표현이 되는 셈이다.

“어휴, 전하께서는 비전하가 그렇게 좋으신가 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매일 한 방을 쓰시니……..."

“하루라도 각방을 쓰시는 걸 못봤네.”

잠결에 들었던 시녀들의 수다를 떠올린 릴리엔은 마른세수로도 모자라 아예 양손에 붉어진 얼굴을 묻고 말았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건 안다.

흉을 보는 게 아니라 다들 그저 금슬 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에 흐뭇해하는 것뿐이란 건 알지만…… 릴리엔은 어쨌든 창피했다.

그나마 모린 부인이 임신이나 아기씨 운운하는 말만은 오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단속을 해서 이정도였다.

침실 정리를 총괄하는 사람으로서, 부인은 대공 부부 사이에 결정적인 일이 아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약한 대공비를 사랑하게 된 부인은 불만을 품지 않고 입단속에 힘썼다.

“때가 되면 자연히 일어날 일을!”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신 비전하께 부담을 줘선 안 된다는 게 부인의 요지였다.

"정 그렇게 아기씨가 태어나길 바란다면 떠들지들 말고 방에 가서 기도나 한 번씩 더 드리도록 하렴!”

"지당하신 판단이십니다.”

리타는 여기서나 저기서나 무표정한 얼굴로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는 기묘한 역할을 도맡았다.

어쨌든 릴리엔은 그 배려 가득한 조처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아아, 안 돼. 그만 생각해야지.”

겨우 다미언을 내보내고 일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머릿속에서 그에 연관된 생각이 떠나질 않다.

니.

릴리엔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우선 안경을 썼다. 그리고 막 일에 집중하려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비전하, 모린 부인입니다.”

이런. 맥이 빠졌지만 하는 수 없었다.

“들어오세요. 오늘은 무슨 일인가요?”

모린 부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콧김을 흥 내뿜었다.

“비전하, 저는 선황 폐하를 모신 종복이자 대공가의 일원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 ?"

릴리엔은 의아했다. 물론 모린 부인이 모자람 없이 맡은 바 본분에 충실하다는 데는 그녀도 동의하지만…….

“하지만 고백하건대 저는 최근에 상당히 품위 없는 글줄에 마음을 빼앗겨…….”

“페이지 식스말인가요?”

릴리엔이 책상에 놓인 신문 더미를 뒤적였다. 그리고 그중에서한 부를 능숙하게 뽑아냈다.

“그거라면 저도 보고 있어요."

"......?”

“예전에 제 불륜 기사가 난 걸 봤는데 필력이 좋아서 그런지 썩재미가 있더라고요.”

모린 부인은 얼떨떨하면서도 어쩐지 안도한 눈치였다.

“그,비전하께서도 그러셨군요…….”

“점잖지 못한 짓인 줄은 알면서도 그만.”

릴리에이 겸연쩍게 웃자 모린 부인이 돌연 태도를 싹 바꿔서 강경하게 주장했다.

“모름지기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여성이라면 정보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이 페이지 식스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실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네? 모린 부인……?”

“나도는 소문에 너무 무지한 것도 남들에게 얕보이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전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행동하고 계신 거지요.”

"음…….”

그렇게까지 포장될 행동이 아닌데. 정말로 흥미 본위였던 릴리 엔은 많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대공저에서는 릴리엔이 하는 행동이라면 무조건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처럼 추앙하는 부담스러운 풍조가 형성돼 버렸다. 릴리엔은 앞선 경험을 통해 여기서 반박해 봤자 괜히 말만 길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모른 척 말을 돌리는 게 최고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오늘은 아직 이걸 읽어 보지 않았네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같이 볼까요?”

“저는 이미 확인했고 그 내용 때문에 비전하를 찾아온 겁니다.”

“그래요?”

혹시 또 내 기사라도 났나? 하지만 에단과의 스캔들은 다미언과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흔적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머?”

신문을 펼치자 보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첼 부인이 백작이 되었다.

고요?”

“록웰 백작위는 50년 전쯤에 세습이 끊겨 황실로 회수된 작위중 하나입니다.”

릴리엔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실감했다. 그녀의 기록에 레이첼이 백작이 된다는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자면 백작이 될 그 여자가 아주 대대적인 축하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듣자 하니 낮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거창한 가면무도회를 준비한다고 하던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공은 두 통의 편지를 든 시종이었다.

“비전하께 온 우편물입니다.”

아무래도 초대장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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